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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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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비 동결이라는 상상력

문재인 정부 ‘평화’ 강조하면서 국방비 인상률은 두 배

3년 동결 땐 ‘과로사’ 집배원·학교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록 2019-07-09 02:06 수정 2020-05-02 19:29
2018년 6월 김도균 남쪽 수석대표(왼쪽)와 안익산 북쪽 수석대표가 경기도 파주 판문점 북쪽 통일각에서 남북 장성급회담을 마친 뒤 공동보도문을 교환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2018년 6월 김도균 남쪽 수석대표(왼쪽)와 안익산 북쪽 수석대표가 경기도 파주 판문점 북쪽 통일각에서 남북 장성급회담을 마친 뒤 공동보도문을 교환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2020년부터 2022년 3년간 국방비를 동결하겠습니다. 일각에선 대대적인 군축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우리는 대화와 신뢰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적절한 수준의 국방비 확보를 통한 튼튼한 안보에도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올해 46조7천억원에 달한 국방비를 3년 동안 동결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취지에 부합합니다. 이를 통해 단계적 군축을 추진키로 한 남북한의 역사적 합의에 첫발을 내딛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동시에 적정 수준의 군사력도 계속 보강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초 계획과 비교할 때 3년간 약 15조원의 국방비 절감이 가능해져 ‘국민을 위한 평화’에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년 국방비 50조원에 이를 듯

문재인 대통령이 6월30일 한 편의 영화와 같았던 남·북·미 판문점 회동을 마치고 사흘 뒤에 열린 국무회에서 가장 강조한 단어는 ‘상상력’이었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만남은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상상력의 산물”이라며,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실로 어려운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도 끊임없는 상상력의 발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6월12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국민을 위한 평화’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평화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익이 되고 좋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상상력을 발휘해 가상의 연설문을 써봤다. 문 대통령이 위와 같은 발표를 해주길 간절히 염원하면서 말이다. 지금까지 국방비를 늘리는 것은 상식처럼 간주돼왔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보다 더 심해졌다. 2018년 7%와 2019년 8.2%에 이어 2020년에는 8.0% 인상을 예고하는데, 이는 이전 두 정부 때보다 2배나 높은 인상률이다. 더구나 국방중기계획에 따르면 2023년에는 60조원을 돌파하게 된다. 이러한 국방비 증액은 몇 가지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다.

문 대통령은 6월 중순 유럽 순방 때 “북한의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대화”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국방부는 공교롭게도 문 대통령 유럽 순방 중에 2020년 국방예산안을 공개했다. 올해보다 8% 늘어난 50조4천억원을 제출한 것이다. 정부와 국회의 심의를 거쳐 내년도 국방비가 50조원 정도로 결정될 경우 이는 북한 국내총생산(GDP)의 약 1.5배, 북한 군사비의 30배 안팎에 이르게 된다. 이에 따라 ‘남한은 대규모로 국방비를 늘리면서 북한에 비핵화를 촉구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핵무장을 결심한 핵심적인 배경에는 한미연합전력보다 큰 열세에 있는 재래식 군사력을 핵무장으로 상쇄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이는 북한이 핵포기 이후 한미연합전력과 군사력 격차가 여전하거나 더 심각하게 벌어질 것이라고 여기면 핵포기를 주저하리라는 점을 의미한다. 더구나 지난해 4·27 판문점선언과 9·19 군사 합의에서는 “단계적 군축”을 추진키로 했다.

공허한 ‘국민을 위한 평화’

상상력을 또 동원해보자. 김정은 주재하에 핵무력 폐기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린다고 가정해보자. “남조선은 단계적 군축은 고사하고 오히려 대규모로 무력을 증강시켜왔습니다. 우리가 핵무력마저 완전히 폐기하면 군사력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북한 군부가 이런 의견을 제시하면서 핵폐기에 반대하고 나설 가능성은 없을까?

판문점 회동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인 7월3일 급식과 돌봄교실 등에 종사하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정규직 대비 80% 수준으로 임금을 올려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은 1800억원 안팎이다. F35 전투기 한 대 값에 해당한다.

2018년 한 해만도 집배원 25명이 사망했다. 과로가 주된 원인이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인력 증원이 필수고, 2천 명 정도를 증원하면 법정 노동시간인 주 52시간을 지킬 수 있다. 2천 명을 증원할 때 연봉을 3천만원으로 책정하면 600억원이 소요된다. 하지만 예산 부족을 이유로 증원은 계속 미뤄졌고 그 자리를 과로사가 차지하고 말았다.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력의 부족은 비단 집배원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소방대원, 사회복지사, 간호조무사 등 인력 부족을 호소하는 직업군은 많다.

과연 예산이 부족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일까? 앞에서 제안한 것처럼 3년간 국방비를 동결하면 약 15조원을 확보할 수 있다. 상기한 문제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소중한 재원이 될 수 있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비정규직 문제 해결’ ‘국민을 위한 평화’를 주창한 문재인 대통령이 반드시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상상의 나래를 더 멀리 펴보자. 문재인 정부는 GDP 대비 국방비를 현재 약 2.5%에서 2023년에는 2.9%로 인상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그 이후에도 2.9% 안팎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내년부터 국방비를 동결해 10년 후에는 GDP 대비 2.0%에 맞춰나간다고 가정해보자. 둘 사이 10년간 누적액의 차이는 200조원 안팎에 이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누적액 차이는 더욱 커지게 된다. 그래서 상상해본다. 이 정도 재원이면 기본소득 논의의 물꼬를 트게 할 수 있지 않느냐고.

국방비 동결해도 군사력은 증강

국방비 증액이 상식인 사회에서 동결을 주장하면 안보를 무시하는 철없는 발상으로 간주하기 십상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도 불확실하고, 전시작전권도 환수해야 하며, 일본과 중국 등 주변국의 위협에도 대처해야 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많다. 하지만 국방비를 동결해도 군사력은 계속 증강된다. 왜 그럴까?

올해 국방비 가운데 군사력 증강에 해당되는 방위력개선비는 약 15조4천억원이다. 일단 3년간 총국방비를 동결하고 방위력개선비를 1조원씩 줄이면서 급여와 복지 등 장병 처우 개선을 위한 예산을 1조원씩 늘려나간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해도 3년간 모두 41조1천억원의 방위력개선비를 확보할 수 있다. 이 정도도 상당한 수준의 군비 증강이다.

군사력 평가에선 누적 군비 투자가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은 이미 상당한 액수를 국방에 투자해왔다. 흔히 국내에서 ‘군사 대국’으로 일컫는 일본과 비교해보자. 20년 전 한국의 국방비는 일본의 3분의 1 수준이었고, 10년 전에는 약 2분의 1이었다. 그런데 올해에는 약 87%다. 일본은 GDP 대비 1% 미만으로 국방비를 책정해온 반면, 한국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 높여온 결과다.

이 결과를 반영하듯 군사력 평가 기관인 글로벌파이어파워에서는 2018년과 2019년 한국의 군사력을 세계 7위로 평가했다. 일본은 2018년 8위였고 올해는 6위로 기록됐다. 양국의 군사력이 대등해졌다는 것이다. 북한은 2년 연속 18위로 평가됐다.

한반도 문제에는 당위와 현실이 얽혀 있다. 한국이 당사자로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성과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북-미 관계에 있다는 현실적 한계가 맞물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 주도의 경제제재가 촘촘하게 짜여 과거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추구에서 유력한 방식이었던 남북 경제협력마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고, 실제 지난해에 찾은 바 있다. 바로 남북 군사 분야의 합의와 이행이었다. 이는 거꾸로 대규모 국방비 증액이,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책 수단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비경쟁 종식으로 주변국 상대 여력 커져

당장 국방비 감축이 어렵다면 동결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는 “단계적 군축”에는 미치지 못해도 유의미한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비핵화 수준에 발맞춰 전방 배치 군사력과 병력을 중심으로 재래식 군축 협상도 준비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주도적 역할과 남북한의 자주적 문제 해결 의지는 이를 통해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군사적 적대 관계와 군비경쟁 종식은 주변국 위협에 대처하는 데도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북한을 상대로 한 국방 수요가 줄어들수록 주변국을 상대할 여력이 커지고 6자회담에서 합의했던 동북아 평화안보 체제 논의도 본격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남북관계가 연합 단계에 접어들면 군사협력과 심지어 ‘남북연합사령부’ 창설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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