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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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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미션, 플라스틱 프리

죄책감 줄이기 위해 시작한 독자,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의문과 노력뿐
등록 2019-06-04 12:15 수정 2020-05-09 11:27
<한겨레21> 독자 김수지씨(맨 왼쪽)와 함께 5월23일 서울 강북구 번동의 강북재활용품선별처리시설을 찾아 재활용 쓰레기 처리 과정을 취재했다(왼쪽). 독자 김수지씨가 플라스틱 가계부를 쓰며 5월2~9일 사용한 플라스틱을 모아놓았다. 김진수 기자, 김수지 제공

<한겨레21> 독자 김수지씨(맨 왼쪽)와 함께 5월23일 서울 강북구 번동의 강북재활용품선별처리시설을 찾아 재활용 쓰레기 처리 과정을 취재했다(왼쪽). 독자 김수지씨가 플라스틱 가계부를 쓰며 5월2~9일 사용한 플라스틱을 모아놓았다. 김진수 기자, 김수지 제공

무분별한 플라스틱 사용이 초래할 재앙에 대해 보통 ‘생산에 5초, 사용하는 데 5분, 분해되는 데 500년’이라고 한다. 이 표현은 전세계가 골치를 앓는 ‘플라스틱’ 문제의 본질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당장의 편의는 가깝고 이후 벌어질 문제는 멀리 있다.
문제는 편리함을 이유로 외면해온 플라스틱의 재앙이 점점 현실화한다는 것이다. 전세계 플라스틱 생산량은 한 해 3억4800만t(2017년 기준)으로 추정된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이 외국 통계 자료를 분석한 것을 보면, 1950년 150만t이던 전세계 플라스틱 생산량은 2050년에 11억2400만t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적 규모로 생산된 플라스틱은 어떻게 처리됐을까. 1950~2015년 플라스틱 누적생산량은 8억3천만t으로 이 가운데 4억9천만t(59%)이 쓰레기로 매립되거나 버려진 것으로 짐작된다. 플라스틱을 삼켜 죽는 거북이와 물고기는 지금도 세계 바다 곳곳에서 꾸준히 발견된다.

지난해 11월 <한겨레21>은 제1239호 ‘독자의 발제가 표지가 됩니다’라는 제목으로 독자편집위원회(독편)3.0 중간보고를 하며 독자 표지공모제의 출발을 알렸다. 당시 독자들은 <한겨레21> 표지에서 가장 보고 싶은 주제로 ‘일회용품의 나비효과’를 꼽았고, 내부 회의를 거쳐 ‘플라스틱 로드’로 구체화했다. 나날이 쌓이는 플라스틱 문제를 편리하다는 이유로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독자들의 의지가 담겼다.

<한겨레21>의 내부 사정으로 3월 초(제1251호)에야 플라스틱 로드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 전자우편과 독편3.0 단체대화방을 통해 의견을 주신 분들은 25명이다. ‘<한겨레21> 플라스틱 로드’ 단체대화방에 참여해 기획부터 취재, 기사 작성까지 함께하신 분은 13명이다.

든든한 25명의 ‘동료’와 머리를 맞댔다. 제1265호 표지이야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한겨레21>과 독자들의 끈끈한 연대로 이뤄진 결과물이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곽민희·손승희·이삼식·정유리·장인숙·조배원·지윤정 등 ‘<한겨레21> 플라스틱 로드’ 참여 독자 25명
플라스틱, 많아도 너무 많다. 지구인으로서, 시민으로서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야 하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하지만 플라스틱을 안 쓰려고 대나무 칫솔을 주문하면 비닐 포장과 에어캡(일명 뽁뽁이)이 잔뜩 딸려 온다. 플라스틱을 피하려 방향을 바꾸면 다시 플라스틱을 만나는 미로 같은 플라스틱 사회. 출구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근데 도시락이라고 하면 일회용 플라스틱에 담겨서 오는 건 아닌지… 갑자기 괜한 걱정이ㅎㅎ;;; 그건 아니죠?”

4월18일 오후 ‘<한겨레21> 플라스틱 로드’라는 이름의 단체대화방에 독자 장인숙씨가 이런 메시지를 올렸다. 4월11일 개설한 플라스틱 로드 단체대화방에는 독자 13명이 참여해 수시로 플라스틱과 관련한 생각을 주고받았다.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4월19일 저녁 7시30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오프라인 기획회의를 하기로 했다. 시간을 절약한다고 도시락을 먹기로 했는데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온다는 걸 기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회사 주변 플라스틱 용기를 쓰지 않는 도시락집을 ‘폭풍 검색’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대안으로 플라스틱 재질 비율을 줄여 분해가 빠른 친환경 용기를 쓴다는 가게의 도시락을 주문했다. 기자는 그동안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음식을 먹어왔다. 출발부터 플라스틱 없는 사회를 꿈꾸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첫 난관, 플라스틱 안 쓰는 도시락집이 없다

이날 한겨레신문사 4층 <한겨레21> 뉴스룸을 찾은 독자 5명(김○○, 손승희, 정유리, 장인숙, 지윤정)은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려 자신의 일상에서 매일매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플라스틱 없는 도시락을 찾아헤매던 기자처럼, 그동안 ‘플라스틱 사회’라는 공고한 벽 앞에서 좌절하거나 갈팡질팡하던 참이었다.

“나 혼자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요.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플라스틱을 마구 쓰고 싶지 않아요. 개인의 노력이 모여 의제를 만들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니 우리부터 희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플라스틱의 폐해를 의식하면서 소비하면 좋겠어요. 생산자도 소비자에게 선택지를 주면 의외로 (플라스틱 없는 제품을) 선택하는 분들이 있다는 걸 알릴 기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지난해 11월 독자 표지공모제에 “플라스틱 문제를 다뤄달라”고 ‘발제’한 정유리씨는 ‘책임감’으로 참여했다고 웃었지만 이내 플라스틱 로드에 임하는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그는 영화 <플라스틱 차이나>를 보고 우리가 버린 쓰레기가 고스란히 다른 국가로 가서 돌고 도는 모습에 충격받아 플라스틱 문제에 관심 가지게 됐다. 정유리씨처럼 독자들은 무심코 쓴 플라스틱이 거북의 생명을 앗아가고, 필리핀이나 베트남 등 다른 나라에서 떠도는 현실에 ‘나부터 뭐라도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각자 자기 자리에서 ‘플라스틱 줄이기’를 해온 이들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이들의 싸움은 늘 ‘판정패’였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유난 떤다’는 시선을 받기도 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어느 펍(술집)에 갔는데 일회용 플라스틱컵에 맥주를 주더라고요. 유리컵에 달라고 하니 세상 이상한 사람 대하듯 불쾌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거예요.”(김○○씨)

“플라스틱 칫솔 대신 대나무 칫솔을 쓰려고 인터넷에서 주문했어요. 칫솔에 글자까지 새겨준다고 해서 좋다고 샀는데 배송받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요. 칫솔 한 개마다 플라스틱 포장된데다 파손 위험이 적은데도 각각 한 개씩 두툼한 완충재로 싸여 있더라고요.”(곽민희씨가 전자우편으로 보낸 의견)

“회사에서 일회용 컵 대신 개인 머그잔을 쓰자고 해봤어요. 그런데 머그잔을 씻는 데 쓰는 세제나 물, 물기 닦는 휴지를 생각하면 일회용 컵을 쓰는 게 낫다는 반론이 나왔어요. 손님이 왔을 때 컵이 없어 음료를 대접하지 못하는 일까지 생기고…. 무엇이 최선일까요?”(지윤정씨)

“플라스틱 줄이기를 결심하니 살 수 있는 게 없어요. 채소나 과일은 생산자가 앞서 플라스틱 용기나 비닐로 소포장해서 가게에 납품하는 게 대부분이더라고요. 생활협동조합 매장도 마찬가지예요. 집 앞 횟집에 통을 들고 가서 회를 담아오려고 했는데, 주인분이 비닐과 랩을 씌워서 주셨어요. 그걸 안 쓰려고 통을 가지고 간 건데….”(장인숙씨)

두유에 붙은 빨대, 제품 속 숟가락…

재활용 업체의 폐비닐 수거 거부로 불거진 ‘쓰레기 대란’이 벌어진 지 1년이 됐고 그동안 환경부가 생산-소비-재활용-폐기 각 분야에 걸쳐 대책을 발표했지만, 독자들의 궁금증은 대체로 일치했다. “내가 분리수거한 플라스틱이 제대로 재활용되는 건가요?” “이렇게 많은 플라스틱 제품이 생산되는데 이걸 다 재활용할 수 있나요?”

2시간 동안 진행된 오프라인 회의는 물음표에 물음표가 꼬리를 무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먼저 ‘실태 조사’를 하기로 했다. 오프라인 회의에 오지 않은 분들에게도 요청해 ‘플라스틱 가계부’를 써보기로 했다. 김수지, 곽민희, 조배원, 이삼식 독자가 1~2주일 동안 플라스틱 가계부를 써서 사진과 함께 보냈다. 지난해 지인과 플라스틱 가계부 쓰기를 실천한 ‘선배’인 정유리씨는 “플라스틱을 최대한 안 쓰려 해도 뭔가를 사는 순간 포장을 피할 수 없다. 선택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했는데, 독자들이 보내온 가계부에도 이런 곤란한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대부분 1~2주 만에 40~50개 플라스틱이 배출됐다.

5월2~9일 플라스틱 가계부를 쓴 김수지씨(4인 가족)는 시작부터 고민에 빠졌다. “가계부 첫 플라스틱 쓰레기가 된 녀석은 두유에 붙어 있는 빨대다. 이 포장은 빨대를 쓰지 않으면 먹기 어려운 구조다. 선택의 여지 없이 두유팩마다 비닐에 싸여 접착제로 붙어 있다. 외출해서 먹을 때는 빨대를 쓸 수밖에 없지만 집에서 먹을 때는 시간 여유가 있으면 가위로 잘라서 컵에 따라 먹고 빨대는 따로 모아두기도 한다. 이렇게 집에서 모을 수 있는 새 플라스틱 용품을 재활용이 아니라 새로 사용(?)할 방법은 없을까?”

가계부를 쓰니 그동안 인식하지 못하던 플라스틱이 우르르 쏟아졌다. 냉장고를 열어본 김수지씨는 가계부를 적으며 다시 고민에 빠졌다. “냉동실에 있는 아이스크림. 뚜껑과 내장된 숟가락이 플라스틱이다. 숟가락은 예전에 필요하면 계산대에서 받아갔는데, 요즘은 다 제품 안에 들어 있다. 집에서 먹으면 필요가 없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삼식씨(5월2~5일 작성)도 “가족과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그릇은 유리인데 수저는 플라스틱이었다”며 갸우뚱거렸다.

독자들의 가계부에는 식재료나 반찬을 살 때마다 피할 수 없는 플라스틱에 대한 당혹감이 공통으로 묻어났다. 조배원씨(4월29일~5월8일 작성·4인 가족)는 식구들이 집에서 밥 먹는 일이 많지 않아 식재료를 조금씩 산다. 그는 “마트에 가면 비닐·플라스틱 용기에 소분된 것밖에 없다. 종이봉투나 재사용 비닐봉지를 갖고 가서 담을 수 있는 식재료는 거의 없었다”고 가계부에 적었다. 그의 가계부를 보면 요리할 경우 최대 7개의 플라스틱이 나왔고, 장을 본 날은 과일 포장 용기부터 비닐까지 10개의 플라스틱이 나오기도 했다. 맞벌이하는 김수지씨도 가계부를 쓰는 동안 플라스틱에 담겨 팔리는 반찬이나 배달 음식으로 생긴 플라스틱이 10여 개에 이르렀다.

독자 조배원씨가 플라스틱 가계부를 쓰며 찍은 사진(왼쪽). 독자 곽민희씨는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기 위해 천가방과 스테인리스통을 갖고 다니며 장을 본다.

독자 조배원씨가 플라스틱 가계부를 쓰며 찍은 사진(왼쪽). 독자 곽민희씨는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기 위해 천가방과 스테인리스통을 갖고 다니며 장을 본다.

바꿀 수 없다면 선택권을 달라

플라스틱 늪에 빠진 가계부는 여러 종류가 뒤섞인 플라스틱 제품을 ‘어떻게 버려야 하나’는 고민으로 자연스레 연결됐다. 플라스틱과 거기에 붙은 라벨 스티커를 제거할 때의 어려움, 용기에 남은 접착제 자국은 재활용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궁금증, 비닐과 플라스틱 용기를 깨끗이 분리하는 데 드는 수고 등이 대부분 가계부에 공통으로 나타났다.

가계부 작성이 끝나갈 즈음, 독자들은 플라스틱이나 비닐을 줄이기 위해 생산되는 제품이나 그 노력조차 진정으로 플라스틱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오는지 의문에 이르기도 했다. “리필 제품도 비닐로 포장됐는데 이게 환경을 생각하는 일일까?”(김수지씨) “옷을 샀는데 담아갈 봉투는 정부 규제에 따라 무상 제공할 수 없다면서 정작 옷 하나하나는 비닐 포장해 팔았다.”(조배원씨)

플라스틱 로드를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독자들의 생각이 한곳으로 모였다. “개개인이 플라스틱을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플라스틱을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은 제한적인 것 같다. 개인에게 죄책감을 주는 방식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장인숙씨) “종이 봉투나 상자에 소분한 과일, 생분해되는 용기에 담긴 고기와 생선, 플라스틱이 아닌데도 가볍고 잘 깨지지 않는 그릇에 음식 등을 담아 파는 가게, 어디서나 쉽게 이런 가게를 이용할 수 있다면 좋겠다. 결국 정부가 생산과 유통 단계에서 플라스틱 사용을 규제하고 대체재 사용을 유도하는 것이 먼저 이뤄져야 할 것 같다.”(조배원씨)

개인의 노력을 넘어 막대한 플라스틱을 양산하는 사회와 생산자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당장 플라스틱 사회를 바꿀 수 없다면 소비자에게 선택권을 달라는 의견이 여러 독자 사이에서 나왔다. 외출할 때 텀블러, 스텐인리스통, 손수건, 천가방을 꼭 갖고 다녀 플라스틱을 줄이는 노력에 힘을 쏟는 곽민희씨도 소비자 선택권이 개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대형마트에서는 자체적으로 플라스틱 상자와 봉지를 만들어 과일과 채소 따위를 소량으로 나눠 파는데, 대형마트 계산대에서 비닐봉지를 안 준다고 플라스틱 쓰레기가 줄어들지 의문이다. 상자 포장대처럼 포장지 수거대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플라스틱 용기를 안 쓰는 음식점이 많이 늘고 있다. 맛도 중요하지만 플라스틱을 덜 쓰는 음식점 정보를 공유하면 어떨까.”

생산자 책임은 어디에

<한겨레21>과 독자들의 ‘집단지성’은 결론을 내렸다. 먼저 개인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분리 배출 요령을 제대로 파악하고, 플라스틱을 안 쓰는 가게를 찾아보기로. 그다음에는 플라스틱 늪에 빠진 우리 사회의 구조와 플라스틱 생산자들의 책임이 없는지 좀더 들여다보자고.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곽민희·손승희·이삼식·정유리·장인숙·조배원·지윤정 등
‘플라스틱 로드’ 참여 독자 2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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