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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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떴다, 노무현!

등록 2002-03-21 00:00 수정 2020-05-03 04:22

유력 여권후보로 급부상 대선가도 파란 예고… 당내 경선의 돌풍은 청와대까지 이어질 건가

지난 16일 광주 경선 결과가 발표되자 염주체육관은 폭발할 듯한 흥분으로 들끓었다. 지지자들은 눈물을 훔쳤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약칭 노사모) 회원들도 얼싸안고 울었다. ‘2002 희망만들기’라고 적힌 노란 수건을 열광적으로 흔들어댔다. 무대에 뛰어올라 노 고문을 헹가래치기도 했다. 대구에서 올라왔다는 노사모 회원 김홍선(37·회사원)씨는 “노 고문을 열렬히 지지한다. 경선이 열리는 도시마다 찾아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경선 판도를 뒤흔드는 ‘노무현 돌풍’

노 고문의 광주경선 1위는 ‘노무현 돌풍’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지지세가 순식간에 폭발했기 때문이다. 불과 열흘 전만 해도 대부분 이런 돌풍을 예견하지 못했다. 그의 득표율은 제주 18.6%에서 울산 29.4%, 광주 37.9%로 수직상승 추세를 보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과 여론조사에 이어, 여론조사에서도 39.6%의 지지율로, 37.3%의 지지를 얻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앞섰다. 이인제 고문(36.8%)은 이 총재(40.6%)에게 뒤졌다. 박근혜 의원이 낀 3자 가상대결에서도 노 고문의 경쟁력이 이 고문보다 높은 것으로 나왔다. 노무현 돌풍이 대선을 앞둔 한국정치의 지형을 밑동부터 뒤흔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이인제 고문도 “일종의 돌풍효과다”라고 바람의 위력을 일단 인정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가 엄청나게 띄워졌고, 일시적으로 국민 마음속에 영향을 준 것 같지만 잠시일 뿐이다”라고 평가절하했다.

돌풍은 이인제 대세론의 주요 근거지인 호남지역에서 대세론이 거품임을 입증했다. 민주당 주요 기반인 광주지역 선거경향은 수도권 등 다른 지역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이 경우 돌풍이 더 드세질 수도 있다. 거꾸로 돌풍이 서서히 잦아들 수도 있다. 영남지역에서 지지세가 폭발하지 않을 경우다.

대전에서의 몰표로 이 고문이 누계성적 1위 자리를 탈환했고, 노 고문은 2위로 밀려났다. 노 고문의 득표율도 대전에선 16.5%로 꺾였다. 하지만 이는 이미 예견된 결과여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대전은 이 고문과 지역연고가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대전몰표에 기댄 1위 탈환만으로 노무현 돌풍을 잠재웠다고 속단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광주발 노무현 돌풍은 견고한 지역구도 타파의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이유로든 광주시민들이 영남후보를 대안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 우리는 영남인을 후보로 선택했소. 이젠 당신들이 대답할 차례요.” 광주시민들은 영남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 고문은 광주경선 직후 물기 어린 목소리로 이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광주시민들의 선택은 동서화합의 이정표가 됐습니다. 역사는 오늘을 의미 있게 기록할 것입니다. 영남사람들도 광주시민 여러분의 뜻을 살려내기 위해 꼭 화답할 것입니다.”

노무현 돌풍은 또한 서민과 중산층이 무엇인가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노 고문을 지지하는 천정배 의원은 “노 고문의 대중적 설득력과 진솔한 이미지가 대중들의 원초적인 정치불신을 자극했다. 대중들의 정치적 역동성이 노 고문을 통해 폭발했다”라고 분석했다. 정치권의 온갖 추문에 넌더리를 느끼며 변화욕구에 목말랐던 보통사람들이 노 고문을 통해 갈증해소를 꾀했다는 것이다. 노 고문은 그간 제시한 각종 정책에서 다른 후보들보다 개혁적인 노선을 견지해왔다. 이인제 고문의 핵심참모인 한 재선의원의 분석도 이와 비슷하다. “이회창 총재의 ‘빌라 게이트’와 대통령 아들의 게이트 연루설 등이 터져나오면서, 우리 사회의 학벌 좋고, 가문 좋고, 돈 있는 기득권층에 대한 반역의 기운이 일고 있다. 이 때문에 보수·기득권 세력의 이미지가 있는 이인제 고문도 덤으로 무너지고 있다. 이 밖엔 노 고문이 갑자기 뜨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비틀대는 여야 대세론… 살아나는 30, 40대

노 고문의 급부상은 당 안팎의 여러 가지 요인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선거분석 전문가인 이강래 민주당 의원은 주요 원인을 외부에서 찾았다. “박근혜 부총재의 탈당과 연이어 터진 빌라게이트로 한나라당의 이회창 대세론이 먼저 흔들렸다. 그러자 민주당의 이인제 대세론도 덩달아 설자리를 잃었다. 그동안 이회창 대세론과 이인제 대세론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불안하게 동거해왔다. 한쪽이 흔들리자 다른 쪽도 비틀거린 것이다. 대세론이 요지부동이 아님을 깨달은 사람들은 대안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노 고문이 그 자리를 찾아들어갔다.” 이인제 고문의 측근 의원도 이런 해석에 동조했다. “이인제 대세론의 붕괴는 이회창 대세론의 몰락과 서로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우리로서는 이회창 대세론이 굳건히 버텨주는 게 좋다. 그래야 우리가 싸우기 좋은 양강구도가 형성된다. 만일 한나라당에서 이회창 대세론이 무너지면 판이 복잡해진다.”

노무현 돌풍은 일차적으로 국민경선제라는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노사모라는 자생적인 지지모임 이외엔 특별한 정치조직도, 줄을 선 현역의원도, 이렇다고 할 당내 기반도 없던 그에겐 국민 절반의 참여를 보장한 이 제도가 큰힘이었다. 이회창 대세론을 뒤흔든 박근혜 의원의 탈당도 결국 민주당 국민경선제에서 비롯됐다. 이 제도가 박 의원의 탈당에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노 고문에게 핵심 지지층이 존재했던 것도 돌풍의 주요한 요인이다. 시사평론가 유시민씨의 분석은 이렇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30대와 40대 초반에서 노무현 지지세가 높다. 이들이 노무현 돌풍의 핵이다. 80년대에 20대를 통과한 이들은 지역주의와 부패가 판치는 정치현실에 낙담한 나머지 정치에 냉소했고, 무관심했다. 그런데 울산에서 노무현이 1위로 올라서자 이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광주 1위다. 여기에 영남사람들이 노무현을 눈여겨보기 시작하면서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율로 나타났다.” 한화갑 고문을 지지한 설훈 의원은 “노무현 고문 지지표는 끌어오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인제 고문 지지표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마음을 돌이킬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노 의원과 지지층이 겹치는 김근태 의원의 저조한 성적과 사퇴도 도움이 됐다. 김 의원이 정치자금 고해성사로 역풍을 맞으면서 밀려나자 노 후보에게 개혁성향 지지자들의 표쏠림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DJ 지지자에 신뢰감 등 전략의 승리

전략면에서도 주효했다. 노 고문은 각종 게이트 의혹 등에 대해 “이전 정권에선 더하지 않았느냐”며 크게 비판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민주당과 DJ 지지지들에게 신뢰감을 줬다. 열패감에 젖어 있던 민주당 지지자들에겐 심정적인 위로가 된 것이었다. 노 고문이 DJ의 계승자임을 지속적으로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가 지난해 쇄신파동 당시 개혁파 의원들과의 관계악화를 무릅쓰면서까지 동교동계를 공격하지 않은 것도 결과적으로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그는 정책적으로도 서민과 중산층을 중시하는 민주당의 기본정책을 충실히 따랐다.

텔레비전 토론회에서도 친근하고 진솔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가 도발적으로 제기한 정체성 논쟁은 이 고문을 민주당 지지자들에게서 떼어내는 효과를 거뒀다.

이인제 대세론이 허망하게 무너진 원인은 노무현 돌풍이 분 원인과 동전의 양면이다. 대세론은 이 고문이 97년 대선에 출마함으로써 정권교체에 기여한 데 대한 호남지역의 ‘보은론’에서 시작됐다. 보은론은 이 고문 외엔 내세울 만한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대안부재론’으로 이어졌고, 그렇다면 확실히 밀어주자는 대세론으로 발전했다. 노력해서 쟁취한 게 아니라 쉽게 얻은 대세론은 기초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 고문쪽은 대세론에 안주하면서 소극적인 수성전략으로 일관했다. ‘부자가 몸조심하는 꼴’이었다.

이인제, DJ와 차별화 시도해 화 불러

여기에 ‘지역편중인사가 부른 참화’라는 표현 등 DJ와의 차별화 시도로 해석될 만한 일련의 발언들이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거부감을 일으켰다. 이는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과연 이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으로 이어졌다. 이런 생각에 노 고문이 제기한 정체성 논쟁은 불을 댕겼다. 이 고문 쪽에서도 이런 실수를 인정하면서 전략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정책노선에서도 보수층 끌어안기에 치중함으로써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의 이반을 불렀다. “이 고문이 보수적인 노선을 취하면서 외연확장을 시도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오히려 민주당 지지자들과의 동질성만 상실했다. 이와 달리 노 고문은 개혁노선을 분명히 함으로써 지지층 다지기에 주력했다.” 민주당 실무 당직자의 분석이다.

경선 직전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노 고문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꺾는 것으로 나오자 노 고문 쪽엔 큰 호재가, 이 고문 쪽엔 엄청난 악재가 됐다. 노 고문의 본선 경쟁력을 이 고문보다 나은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여론조사에서 이 고문은 이 총재에게 줄곧 지는 것으로 나왔고, 이 때문에 ‘필패론’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밖에 한화갑 고문에게 당원과 대의원 등 공조직표를 잠식당했고, 이 고문과 가까운 것으로 인식된 권노갑 전 고문이 곤경에 처한 점 등도 이 고문 쪽엔 악재로 작용했다.

영남표 우호적, 본선 경쟁력 자신

23·24일 경선이 치러지는 충남과 강원지역은 이 고문 강세지역이다. 따라서 이때까지는 노무현 돌풍이 일단 잠잠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0일 경남 경선을 시작으로 돌풍이 다시 불어닥칠 개연성은 충분하다. 천정배 의원에 이어 노 고문을 지지하는 현역 의원들이 속속 합류하는 양상이 이를 뒷받침한다. 김원기·정대철·임채정·이해찬·신기남·임종석 의원 등이 이미 노 고문 지지 쪽으로 돌아섰다. 이해찬·임채정·이강래 의원 등 당내 지략가들이 일제히 노 고문의 본선 경쟁력을 이 고문보다 높게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러나 충청권에서 이 고문에게 뒤진 부분을 전북과 경남 등지에서 회복하지 못할 경우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승부는 수도권에서 돌풍이 재연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노 고문의 본선 경쟁력은 민주당 내부에서 어떻게 평가받고 있을까? “노 고문이 민주당 후보가 되면 지지세가 폭발할 것이다. 영남지역에서 굉장히 우호적으로 변한다. 영남표의 절반 정도는 노 고문 쪽으로 돌아설 것이다. ‘귀족대 서민’의 대결구도가 형성되면 한나라당은 방어가 어려울 것이다. 노무현 돌풍은 두개의 대세론을 동시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경선에서 이인제 대세론을 꺾을 경우, 본선에선 이회창 대세론을 잠재울 수 있다.” 이해찬 의원의 관측이다.

이강래 의원은 다른 측면에서 노 고문의 본선 경쟁력을 높이 평가했다. “노무현이 민주당 후보가 되면 부산·경남표가 크게 움직인다. 여기에 YS와 민주계가 동조하고 나서면 폭발력이 크다. 그러나 수도권 충청표에 대한 득표력은 이인제 고문보다 떨어진다. 전체적으로 보면 노 고문의 잠재력이 약간 높다고 볼 수 있다.”

노 고문이 민주당 후보가 되면 정치판에 일대 파란이 일 것으로 전망된다. 노 고문이 “후보가 된 이후엔 정계개편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해왔기 때문이다. 노 고문의 정계개편론은 먼저 영남지역에 기반을 둔 옛 민주계와 손을 잡겠다는 것이다. 노 고문은 “후보가 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또 김정길 전 의원, 김혁규 경남지사 등과의 연대를 통해 지방선거에서도 영남지역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해왔다.

노 고문과 민주계가 손을 잡는다면…

노 고문은 또 한나라당 개혁파 의원들에 대한 흡인력도 일정 부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김홍신·김원웅 의원 등과는 음식점을 함께 경영하기도 했고, 이부영 부총재와도 ‘꼬마민주당’을 같이했다.

노무현 돌풍은 박근혜 의원 등 신당 추진 세력에게도 새로운 고민을 안겼다. 신당 추진의 주된 동력이 ‘영남후보론’과 ‘개혁세력 결집론’ 등인데, 모두 노 고문 쪽과 겹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반이회창 세력’의 대안이라는 자신들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 계산이 훨씬 복잡해지는 것이다.

일부에선 ‘노무현-박근혜 연대’ 가능성을 점치기도 하지만 아직 실현 가능성은 높아보이지 않는다. 노 고문은 “박근혜 의원의 신당 구상에 동의하지 않으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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