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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김포에 뿌리내린 원동력은?

<한겨레21>, 줌머 난민 30명 설문조사… 지역사회 도움과 줌머인의 끈끈한 유대가 비결
등록 2019-05-28 11:39 수정 2020-05-02 04:29
방글라데시 줌머 난민들이 지역주민들과 함께 보이사비 축제를 시작하는 촛불을 켜고 있다. 박승화 기자

방글라데시 줌머 난민들이 지역주민들과 함께 보이사비 축제를 시작하는 촛불을 켜고 있다. 박승화 기자

“조화롭게 잘 어울려 살아가는 난민의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꼭 취재해 기사화해주면 좋겠습니다.”
#난민과 함께 기획연재를 1년 가까이 끌어오면서 독자로부터 많은 편지와 피드백을 받았지만 가슴속에 가장 깊이, 오래 남았던 질문이다.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는 난민은 없을까?’
고민을 털어놓는 기자에게 난민인권센터의 한 활동가가 말했다. “김포에 사는 줌머 난민을 취재해보면 어때요?”
은 2003년 10월 제479호 ‘자유를 갈구하는 아, 줌마!’ 제하의 기사에서 줌머 난민 11명의 이야기를 다뤘다. 16년 동안 이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해 살고 있을까? 줌머인이 한국 사회에 평화롭게 잘 정착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늘어나는 국내 난민 신청자들은 줌머인에게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은 이 질문에 답을 찾고 줌머인의 한국살이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지난 두 달 동안 틈틈이 경기도 김포를 찾았다. 줌머인을 만나 인터뷰했고, 30명에게 심층 설문조사를 벌였다.

“2012년 한국으로 귀화하고 2013년에 이름을 바꿨는데, 그때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어요. 그래서 이름 바꿀 때 성을 ‘박’으로 정했습니다.” ‘통진천막’의 대표 박민수(43·니킬 차크마)씨가 왜 성을 ‘박’으로 정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2002년 10여 명에서 2019년 150명으로

‘한국 방문의 해’였던 1994년에 이어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에도 한국의 국경은 낮았다. 외국인이 관광비자를 받기가 쉬웠다. 민수씨는 2002년 한국에 와 난민 지위를 신청했다. 당시는 한국이 IMF 외환위기를 겪은 뒤 조금씩 경제가 회복되던 때였지만 여전히 외국인 노동자가 일할 곳은 많지 않았다. 민수씨와 줌머인들이 천막 설치 일을 한 이유다. 공장과 창고 천막은 규모가 커서 크레인을 이용해 작업할 때가 많고, 높은 곳에 자주 올라가 위험하다고 한국인들이 꺼렸다.

2004년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민수씨는 2009년 인도에서 지인에게 소개받은 줌머인과 결혼해 한국으로 함께 돌아왔다. 민수씨는 지난해 독립해, 크지 않지만 직접 천막사를 차려 ‘사장님’이 됐다. 2012년 한국인으로 귀화하고 이름을 바꾼 민수씨는 2016년 첫째 ‘니디’를 낳았고, 올해 초 둘째 ‘디골’을 낳았다.

2002년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왔던 민수씨가 어엿한 네 식구의 가장이 되었듯, 10명 남짓이던 줌머인이 지금은 15배 늘어나 150명이 넘는다. 이들 줌머인은 김포 양촌읍 근처에 모여 산다. 이 중 100명이 성인이고, 50명이 아동·청소년이다. 줌머인과 함께 김포에 사는 이웃들은 줌머인의 성실함을 칭찬했다. 주민 최해복(72)씨는 “줌머인을 보면 1950년대 전쟁 이후 한국과 풍습이 비슷해 친근하게 느껴진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 돕고 잘 적응하며 살고 있다. 옆에서 보면 정말 성실하고, 생활력이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한국인에 대한 신뢰 높은 줌머인

“2013년 난민법이 시행되면서 한국 정부가 난민의 생활을 지원하기 시작했는데 그전에는 정말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초기에 정착할 때 시민사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몇 안 되는 우리 줌머인끼리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했다.” 1994년 가장 초기에 한국을 찾았던 이나니(47·로넬 나니 차크마)씨는 줌머인들이 김포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지역사회의 도움’과 ‘줌머인의 유대’를 꼽았다.

나니씨가 강조한 두 가지가 줌머인의 한국 정착을 도왔던 것은 의 설문조사 결과로도 확인됐다. “가족/친척/줌머인으로부터 얼마나 지지나 도움을 받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조사 대상자들의 답변을 취합해 평균을 낸 결과, 100점 만점 중 76점 정도로 높은 점수가 나왔다. “한국인으로부터 얼마나 지지나 도움을 받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67.5점을 기록해 줌머인은 한국인이나 외국인보다는 같은 줌머인에게 깊은 신뢰를 가진 것으로 파악됐다. 이 통계 프로그램 SPSS를 이용해 분석한 결과 이런 차이는 유의미한 것으로 확인됐다.

취재 현장에서 만난 이현욱 이화여대 사회과교육과 연구교수는 “현장에서 연구하면서 만난 줌머인을 보면 김포에 강하게 뿌리내리고 살면서 같이 육아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다른 이주민 집단과 뚜렷하게 구별될 정도로 같은 가족이라는 정체성이 강하고, 재한줌머인연대 운영비를 자체적으로 모으는 등 끈끈한 연대가 눈에 띈다. 이러한 강한 연대가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사에 응한 줌머인들은 다른 난민들보다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확인됐는데,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다는 특징도 있었다. 응답자 30명 중 대학을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이 26명(86.7%), 대학원까지 진학한 사람은 4명(13.3%)으로 조사됐다. 고졸 이하 학력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젊은 남성은 가짜 난민? 모든 난민이 그렇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줌머인 30명 중 15명이 남성이고, 나머지는 여성이었다. 줌머인은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체류 기간이 짧을수록 임금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은 남성보다 체류 기간이 짧았다.

이처럼 성별에 따라 체류 기간과 임금의 차이가 나는 것은 이들이 정착하는 방식 때문이다. 앞의 기사에서 살펴본 민수씨 사례처럼 이 만난 줌머인 가족은 아빠나 남편이 먼저 한국에 와 난민 인정을 받은 뒤 조국에 있는 가족을 초청하는 ‘가족결합’ 형태로 한국 사회에 자리잡는다.

이번 조사 결과, 지난해 한국 사회가 예멘 난민에게 품었던 ‘젊은 남성이 대부분인 예멘 난민은 가짜 난민’이라는 한 가지 오해를 풀 수 있었다. 당시 제주 출입국·외국인청이 파악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제주도를 나가지 못하도록 출도제한 조처를 받은 예멘 난민 549명 중 504명이 남성이었다. 난민 중 젊은 남성이 많은 것은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2015년 유럽연합(EU)의 난민 현황을 조사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유럽연합 회원국에서 난민 신청자 73%가 남성이었다. 시리아 난민의 71%가 남성이었고, 아프가니스탄은 80%가 남성이었다. 감비아(97%), 파키스탄(95%), 방글라데시(95%)처럼 난민 신청자의 대부분이 남성인 국가도 있었다. 줌머인은 방글라데시 난민에 속한다.

이렇게 한국에서 먼저 난민 지위를 받은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한국 문화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먼저 일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은 남편에게 생계를 의존하고, 여성은 집안일과 양육을 맡는 일이 많았다.

체류 기간별로 살펴보면 1년이 8명(26.7%)으로 가장 많고, 2년 4명(13.3%), 3년 3명(10%)이 뒤를 이어 한국 사회 내 줌머인 수는 최근에도 꾸준히 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김포에서 만난 한 줌머인은 “한국이 줌머인에게는 난민 지위를 잘 인정해줬는데 최근 들어 난민 인정률이 낮아져, 불안정한 지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줌머인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학력자도 한국에선 단순노무직으로

한국 사회에 난민이 정착한 초기에는 의사소통과 일자리 구하기 등 적응과 관련된 문제가 중요 관심사가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고민의 폭이 넓어지고 종류도 다양해진다.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지(중복 응답 허용) 묻는 말에 14명(46.7%)이 “생활비 등 경제적인 문제”를 꼽았다. 다음으로 각각 11명(36.7%)이 “한국 사회에 적응(한국어, 한국문화)”과 “고국에서 박해받은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꼽았다. 8명(26.7%)이 응답한 “자녀 양육과 교육”, 7명(23.3%)이 꼽은 “다른 나라에 있는 가족 문제”가 뒤를 이었다. 아직 수가 많지는 않지만 한국에 온 지 20년이 넘는 줌머인도 늘면서 일부는 은퇴 이후의 삶을 걱정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응답자 중 4명(13.3%)이 “노후 준비”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꼽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줌머인들은 한국에 오기 전 본국에서 높은 학력과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한국에 망명하면서 ‘단순노무 직종’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가장 많은 10명(33.3%)이 ‘학생’이었다. ‘정치인’ ‘교사’ ‘자영업자’ ‘가사노동’ ‘정치인 또는 활동가’가 각각 3명(10%) 있었고, ‘엔지니어’ ‘비정부기구’도 각각 2명(6.7%) 있었지만, 줌머인 대부분은 한국에 오면서 자신의 원래 직업을 잃어버렸다.

한국에선 ‘단순노무직’이 12명(40%)으로 가장 많았고, ‘가사노동’이 6명(20%), ‘무직’이 5명(16.7%)으로 뒤를 이었다. 2005년 난민 인정을 받은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강노나(39)씨는 방글라데시에서 간호사로 일했지만 한국에서는 과일 포장 일을 한다. 노나씨는 “방글라데시에서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대학에서 4년 동안 간호학을 공부했고, 5년 동안 병원에서 간호사 일을 했지만 한국에 와서는 간호사 일을 계속할 수 없어서 아쉽다”고 했다. 오랫동안 재한줌머인연대를 이끌었던 나니씨는 “줌머인 커뮤니티에는 건축대학을 나오거나 전기기술자, 간호사 등 다양한 전문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한국에 난민으로 오면 여러 가지 자격이나 기술을 인정받지 못해 공장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가 난민의 기술과 능력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더 잘 활용하면 한국 사회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정체성 혼란 겪는 난민 2세

이러한 직업의 변화와 더불어 줌머인의 임금 수준은 한국인의 평균 소득에 미치지 못했고, 월 최저임금(174만원)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파악됐다.

“줌머 난민 2세들은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 태어난 줌머 2세들은 어린이집에서 한글을 먼저 배워 부모와 대화가 잘되지 않는다. 부모들은 차크마어를 가르치려고 하지만 자녀들은 관심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단순 이주민이 아니라 난민이기 때문에 민족의 정체성을 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나니씨는 줌머인 사이에서도 점점 희미해지는 전통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하윤창(44·어닐 차크마)씨는 아들 서윤(12)이에게 줌머 전통 음식을 먹이려고 하지만 서윤은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일이 많다. 한국 학교에서 한국식으로 식사하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서윤이는 부모가 쓰는 차크마어를 알아들으면서도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방문한 줌머인의 집에는 한쪽 벽에 차크마어 철자를 크게 써 붙여둔 것을 볼 수 있었다. 차크마어와 줌머인의 전통을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익숙해지도록 하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부부가 온종일 일해도 생활비와 자녀 교육비를 대기가 빠듯한 상황에서 자녀들이 깨어 있는 얼굴을 마주하기도 어렵다. 이 만난 많은 줌머인 부모들은 주말에도 공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선 부부가 바쁘면 조부모가 손자 교육을 대신하기도 하지만, 줌머인 중 조부모와 함께 한국에 온 경우는 없었다.

25년 동안 범죄 저지른 적 없다

지난해 한국 사회에 500명이 훌쩍 넘는 예멘인이 제주도로 몰려와 난민 신청을 하면서 일부 여론은 범죄율 증가를 우려했지만 줌머인은 지난 25년 동안 한국인에게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법무부 당국도 줌머인의 모범적인 한국 생활을 높게 평가한다고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인천출입국·외국인청 관계자는 “줌머인이 정부에서 추가 지원을 검토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 적응해서 성실하게 살고 있다. 현지 주민과 아무런 마찰 없이 잘 지내고 있어 법무부에서 모범 사례로 손꼽는다. 올해 미얀마에서 4기 재정착 난민(8가구, 26명)을 초청할 계획인데 줌머인이 이들 재정착 난민의 멘토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김포로 데려올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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