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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떠 있는 우리가 보이지 않나요

사람에 상처받고 꿈을 잃고 방으로 숨은 은둔형 외톨이… 삶의 닻 내리게 하는 ‘중력’이 필요해
등록 2019-05-21 03:31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10년 동안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한 자신의 경험을 쓴 김재주 작가의 책 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한 친구가 김 작가의 은둔생활에 대해 물었다.
“네가 그 오타쿠인가, 십덕후인가 그런 거냐?”
“아니, 난 히키코모리라는 거야.”
“어쨌든 방 안에서 은둔해서 살고, 막 일본 만화 보고 인형 베개랑 사랑에 빠지고 이러는 거냐?”
“아니, 난 히키코모리라고 은둔형 외톨이 같은 거야. 인형하고 사랑에 빠지지 않아.”
“암튼 둘 다 방 안에서 거의 안 나오고, 게임만 하고, 만화 보고 이런 거 아니야? 똑같은 거 아냐?”
오타쿠, 찌질이, 루저…. 은둔형 외톨이에 마구 붙는 다른 이름들이다. 사회에서 상처 입고 자발적 고립을 택한 당사자와 가족은 부정적 낙인에 두 번 운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이들이 항변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정부도 이들을 애써 찾아나서지 않는다. 통계도 정의도 없는 사람들의 삶.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사람은 아니다. 이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문을 꼭 닫은 방 안은 주우연(36·가명)씨에게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집 밖에 나가면 바람이 날카로운 칼처럼 느껴졌다. 이 고통이 상상이라는 걸 주씨도 알았지만, 그가 몸으로 고스란히 느끼는 통증이기도 했다. 주씨는 집 밖에 있는 게 무섭고 불안했다. 그리고 방 밖은 방 안보다 불편한 공간이었다.

대학 생활은 ‘잠수’의 연속이었다

주씨는 사람들이 일컫는 ‘모범생’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문제없는 가정이었다. 주씨도 그 가정 아래에서 말썽 한번 일으키지 않고 자랐다. 다만 밖에서 노는 것보다 집에 있는 게 편했다. 집엔 텔레비전도 있고, 주씨가 좋아하는 책도 있었다. 무엇보다 친구 관계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주씨는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게 힘들었다. “친구라면 싸울 수도 있고 맘에 안 드는 구석도 있을 것인데 그런 상황이 되면 문제를 풀기보단 도망치고 싶더라고요.” 주씨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방학 한두 달 동안 밖에 나가지 않는 일이 있었다. 밖에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 아니었다. ‘그냥’ 집에 있었다. 그래도 학교를 빠지는 일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주씨는 점점 바깥세상과 담을 쌓았다. 대학 생활은 ‘잠수’의 연속이었다. 주씨는 반수를 해서 2002년 소위 SKY라고 불리는 한 대학에 합격해 입학했다. 혼자 공부하면서 좋은 결과를 낸 뒤 ‘혼자=성공’이라는 공식이 주씨 안에 내재화했다.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리더십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실제 인간관계든 생활에서든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끊어내는 게 편했어요.”

‘반수’까지 해서 입학한 명문대였지만, 주씨에겐 자신감을 주지 못했다. 외국어 전공인 그의 학과 성적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았다. 제2외국어를 배워본 적 없는 주씨가 외국어고등학교 출신에, 현지에서 살다 온 동기들을 따라가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나는 인문계고 출신이었어요. 노력했지만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또 나랑 같은 조건에서도 성적이 좋은 애들도 있었어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죠.”

대학을 10년 다니는 동안 휴학을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더는 휴학할 수 없을 때까지 했어요.” 남들은 토익에, 각종 대회에, 국외 연수에, 취업을 위해 갖가지 스펙을 쌓는 데 집중했지만 주씨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취업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학벌이 좋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죠. 잘하고 싶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잘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잘하지 못할 바엔 하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주씨는 졸업할 때까지 취업원서를 단 한 번도 내지 못했다.

방 밖에 나가는 건 화장실 갈 때

그래도 일해보려고 시도는 했다. 주로 2~3개월짜리 단기 일자리였다. 감정 기복이 있어 장기간 일하기는 어려웠다. 어린이 놀이학교와 보험회사 등이 그를 거쳐갔다. 졸업 뒤 8년 동안 가장 오래 일한 기간이 8개월이다. “주변 사람들의 소개로 보험회사에서 영업한 적이 있어요. 사람들은 보험회사 직원에 대한 편견이 있잖아요. 괜찮은 상품이라서 소개하면 사람들이 귀찮아해요. 그러든지 말든지 내가 아는 걸 잘 설명하면 되는데, 그 반응 때문에 이야기를 못하는 거예요. 그럼 자괴감이 들어요. 이 일을 해내지 못했구나, 나는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이구나.” 주씨는 집 안으로 숨었다.

2014년부터 약 3년 동안 집에만 있었다. 배터리가 빠진 것처럼 못 일어났다. 방문을 닫고 10시간 넘게 계속 잠을 잤다. 잠자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깨어서는 ‘킬링 타임’이었다. 주로 인터넷이 대상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클릭, 클릭, 클릭’. 온라인 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무의미했지만, 방 안에서 시간을 탁월하게 빠르게 보낼 수 있어 유의미하기도 했다. 이젠 집 밖이 아닌 방 밖으로도 안 나가게 됐다. 씻는 것도 귀찮았다. 텔레비전이 있는 거실에 나가기 싫어서 인터넷으로 방송 프로그램을 봤다.

밤낮이 바뀐 날들이 계속됐다. 식사는 가족이 집에 없을 때 했다. 가족이 밖에 있으면 먹지 않았다. 그가 방 밖에 나가는 건 화장실 갈 때가 거의 유일했다. 밥을 먹으면 화장실에 가게 되니까, 하루 한 끼도 먹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 꼴을 보고 부모님이 걱정하고 더 신경 쓰실 테니까 방 밖에 나가기 싫었어요. 누구와도 접촉하기 싫었고요.”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내가 쓸모없는 인간 같았어요”

엄마 아빠도 지쳤는지 더 이상 잔소리하지 않았다. 간혹 너무 힘들다고 하면 “나가서 운동하라”는 말이 돌아왔다. “부모님이 보시기엔 갑자기 왜 저렇게 됐나 싶었을 거예요. 아마도 제가 부모님 인생에서 가장 큰 물음표였겠죠. 제가 너무 걱정됐는지 독립한 동생이 어느 날 방을 같이 쓰자고 하더라고요. 당시 동생에게 걱정거리가 있어 조언했는데 동생이 제게 ‘언니 걱정이나 하라’고 했어요.” 주씨는 인터넷에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를 검색했다.

성오현(29)씨는 2017년 말 직장에서 해고된 뒤 1년 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다닌 회사는 경기도에 있는 페인트 공장이었다. 원료를 섞어서 페인트를 만들어 파는 일이었다. 회사 상사인 대리와 마찰이 잦았다. 대리는 한 살 많은 성씨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인지 사사건건 성씨의 일처리를 지적했다. “대리가 알바 노동자와 함께 페인트를 포장해놓으라고 지시했는데, 그것이 맘에 안 들었는지 꼬투리를 잡아 말다툼이 있었어요. 사장이 ‘아무래도 공장과 안 맞는 것 같다’며 저한테 그만 나오라고 했어요.” 성씨의 첫 직장은 26살 때 LED(발광다이오드) 전구회사였다. 도면 설계를 보조하는 일이었다. 회사에서 원하는 만큼 따라가기 힘들었다. 일을 가르쳐주는 사수도 없었다. 일처리가 느린 그를 회사는 봐주지 않았다. ‘느리다’ ‘보고 제대로 하라’는 질책이 매일같이 따라왔다. 보고하면 ‘적당히 보고해라’, 보고를 줄이면 ‘보고를 안 해서 왜 일을 키우냐’는 소리를 들었다. “적당선을 찾기 힘들었어요. 일을 잘 못해서 창고 관리하는 부서로 바뀌었는데,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그만뒀어요.” 10개월 만에 첫 회사를 그만두고 성씨는 3개월 동안 머리카락도 자르지 않고 방에 박혔다. “내가 쓸모없는 인간 같았어요.”

성씨는 일하다 그만두면 6개월씩, 1년씩 집 안에 갇혔다. 그리고 게임만 했다. 게임은 가장 쉽고 싼 도피처였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한 게임을 실제 한 시간을 계산하니 2년 가까이 됐다. 에너지가 ‘0’일 땐 게임도 할 수 없었다. 게임에 접속해서 성씨 아이디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하면 그것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다. 방 안엔 혼자 있었지만, 사이버 세계에서는 누군가랑 같은 공간에 있다는 느낌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럴 때는 게임보다 인터넷방송을 보거나 웹서핑을 했다.

성씨가 게임에 빠진 건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다. 중2 때 친구가 있는 옆반에 갔는데 이른바 ‘일진’이라는 친구가 성씨를 다짜고짜 때렸다. “제가 부딪혔나봐요. 그 친구가 화를 내길래 무심결에 친구 팔을 잡았는데 ‘왜 팔을 잡냐’며 나를 많이 때렸어요.”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뒤 반으로 돌아왔는데 다른 친구가 와서 뺨을 때렸다. “손을 씻다가 실수로 물이 튀었어요. 사과를 했는데, 맞았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아요. 학교는 약육강식이잖아요.” 학교 생활은 힘들었고, 적응하기 어려웠다.

성씨가 부모님한테 가장 죄송한 기억은 대입 시험을 다시 준비할 때다. 오르지 않는 성적 때문에 방문을 잠그고 책상까지 밀어 붙여 방문이 열리지 않게 했다. 가족이 방 밖에서 문을 두드렸지만, 성씨는 문을 열지 않았다. 실랑이가 계속되고 부모님이 열쇠로 방문을 열려고 하자, 성씨는 “죽고 싶은데 못 죽게 한다”고 경찰에 전화했다. “내 공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게 싫었는데 가족이 힘으로 열려고 하니까 너무 괴로웠어요.” 성씨보다 8살 어린 동생은 일기에 “오빠가 밉다”고 썼다. “부모님은 저를 기다려주셨는데 죄송했어요. 어린 동생한테도 오빠 노릇을 못한 것 같아 미안하고요.”

친구들은 날 “벌레 보듯”이 했다

부산 영도에서 자란 안지호(35·가명)씨는 ‘준은둔형 외톨이’였다. 일본 내각부가 정의한 준은둔형 외톨이는 취미와 관련된 용무를 볼 때만 외출한다. 안씨가 은둔을 시작한 이유는 학교 내 괴롭힘이었다. 체구가 작은 안씨는 친구들의 집중 괴롭힘 대상이 되었다. “못생겼네, ××” “키가 작다” 등 주로 외모를 비하하는 말이 안씨를 아프게 했다. 친구들은 안씨를 “벌레 보듯”이 했다

안씨는 내내 혼자였다. 6~7살 때부터 하루 12시간씩 집에 혼자 있었다. 부모님은 가구·신발 등의 장사를 했는데 아침에 나가 밤늦게 들어왔다. “형제도 없어서 누군가랑 친해지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도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이랑 집 앞에서 공도 찼는데 전학을 가면서 왕따를 당했어요. 동네 텃세가 있더라고요.” 왕따 경험은 중학교로 이어졌다.

안씨는 ‘시선 공포’를 앓게 됐다. 누군가 쳐다보면 심장이 떨리고 땀이 났다. 자기 편이 없는 상황에서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타인의 시선을 더 두렵게 만들었다. 더구나 부모님은 안씨를 이해하지 못하고 윽박질렀다. 안씨가 기댈 곳은 없었다.

나쁜 기억을 안긴 ‘부산 영도’에서 벗어나려고 고등학교는 시내로 나갔지만, 여성을 대해본 적 없는 안씨에게 남녀공학은 더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옆에 누가 앉으면 신경 쓰여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났다.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을 갔지만, 1학년 때 수업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종일 피시(PC)방에 있었다. 사람을 피해 맨 구석 자리를 찾았다. 게임에 몰두하면 옆 사람이 신경 쓰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안씨는 현재 울산에서 시설관리직으로 일한다.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적다. 사무직으로 가고 싶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이길 자신이 없다. 그래도 일하게 된 것은 군대 덕분이다. “군대 가서 많은 걸 배웠다. 공동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을 기분 나쁘게, 좋게 하는지 알게 됐다. 군대에서 좋은 선임을 많이 만나면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김은지(33·가명)씨는 8년째 꿈이 없었다. 꿈을 잃은 뒤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 살기가 전부였다. 그것은, 대기업에 다니지도 않았고 연봉도 낮은 그가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김씨가 꿈을 잃은 때는 2011년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제과제빵 기술을 배우려고 일본 도쿄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꿈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4개월 만에 깨졌다. 동일본 대지진이 터진데다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집에서 귀국하길 원해서 할 수 없이 한국에 돌아왔죠. 그 뒤로 뭘 하고 싶은 게 없었어요.” ‘역시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과제빵 자격증을 따기 위해 1차 시험까지 합격한 상태였지만 2차는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김씨는 사무직을 전전했지만 몇 개월 가지 못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회사를 네 군데 다녔다. 한 과자점에서 재고 관리를 했지만, 제과제빵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의문이에요, 왜 다시 제과 기술을 배우지 않았는지.” 또다시 회사를 그만두고 새벽 3~4시에 자고 오후 1~2시에 일어나는 생활이 반복됐다

김씨에게 대구는 나쁜 기억만 남아 있는 곳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꿈을 잃은 도시다. 벗어나고 싶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다 오빠가 사는 충남 천안으로 가족 모두 이사했다. 오빠는 뭐든 스스로 하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돈을 벌었고, 연고가 없는 천안에서 자리를 잡고, 부모 도움 없이 결혼도 했다. 그런 오빠는 일을 진득하게 못하는 김씨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집에만 있냐’고, ‘돈이 필요하면 나가서 벌면 되고, 마음이 아프면 진료받으면 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여유가 없는 사람이에요. 오빠는 ‘어리광 부리지 마. 부모가 지원해주니까 편하게 사는 거’라고 말했어요. 저는 어리광이 아니거든요.”

엄마는 김씨가 중학교 때부터 ‘오빠를 더 사랑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해왔다. “미숙아로 태어나 어떻게 살린 자식인데”라는 말이 뒤따라왔다. 김씨는 그 말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가족은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끈이 없다

김씨는 자신의 상태를 ‘무중력’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끈이 없다는 뜻이었다. “집에만 있으면 연결을 놓는 편이에요. 다른 사람들과 연락하고 싶지만 할 수 없어요.” 김씨가 자기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건 지난해 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방에서 웹툰을 보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그러다 책상 위 과자봉지 쓰레기가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치우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옆에 쓰레기통이 있었는데도 과자봉지에 손이 닿지 않았다. 김씨는 그길로 정신과를 찾았다.

삶의 닻을 못 내리고 허공에 떠 있는 이들은 발을 땅에 딛게 하는 ‘적당한 중력’이 필요했다. 이 중력은 가족이 될 수도 있지만, 제3자가 될 수도 있다. 김씨는 “나를 비난하지 않고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중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방 안으로 숨은 이들이 방 밖으로 나오고 싶다는 마음을 먹고 문 손잡이를 돌릴 때, 함께 문을 밀어줄 누군가 말이다.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 거의 3년 동안 방에만 있었던 주씨는 현재 매일 새벽 4시30분에 일어난다. 뒷산에 올라 운동하면서 매일 아침 해를 사진으로 찍는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 올 초부터 이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또다시 침잠할 것 같은 불안함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다시 일자리를 구한 지 4개월째다. 그를 방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이끈 은둔형 외톨이 지원단체가 그에겐 중력이었다. “몇 년 동안 은둔을 경험해보니, 제가 다시 은둔할 것 같은 느낌이 올 때가 있어요. 그래서 습관적으로 계획을 지키려고 해요. 지금은 괜찮지만 언제 또 가라앉을 수도 있겠죠.”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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