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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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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만 ‘유급병가’ 보장한다

493개 민간기업 취업규칙 분석 결과
등록 2019-05-07 02:54 수정 2020-05-02 19:29

어느 날 아침, 당신은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몸이 덜덜 떨리고 열이 팍팍 치솟는다. 출근은커녕 침대 밖으로 나올 수도 없다. 독감 기운이 느껴진다. 며칠 쉬면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 회사에 전화해 팀장에게 뭐라고 말하겠는가. 아파서 병가(질병휴가)를 내겠다고? 당신은 운이 좋은 편이다. 공무원이거나 상위 57%의 좋은 회사에 다닌다. 아파서 연차를 내겠다고? 운이 나쁜 편이다. 공무원도 아니고 그저 그런 회사에 다닌다.
감기로 며칠 병가를 냈는데 다음달에 월급이 100%, 아니 조금이라도 나왔다면? 당신은 정말 운이 좋다. 공무원이거나 상위 7%의 좋은 회사에 다닌다. 병가를 낸 일수만큼 월급이 깎였다면? 보통의 운이다. 평범한 회사에 다닌다.
한국에서 ‘아파서 쉴 권리’는 복불복이다. 근로기준법 어디에도 ‘병가’라는 두 글자는 나오지 않는다. 회사의 선의(취업규칙)나 노동자들의 투쟁(단체협약)에 따라 병가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러니 ‘무노동 무임금’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회사들이 유급병가를 쉽게 줄 리 없다. 산업재해가 아닌 업무 외 질병과 부상은 개인 사정이라는 공식에 익숙해진 노동자들도 무급병가가 당연하다고 느낀다.
잘못된 생각이다. 아픈 노동자가 제대로 쉴 권리를 누리려면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돼야 한다. ‘휴식’과 ‘소득’. 이미 67년 전에 이룬 국제적 합의다. 출산 전후 휴가급여제도를 떠올리면 쉽다. 임신·출산을 한 여성노동자가 소진된 체력을 회복하는 90일 동안은 기업과 사회(고용보험)가 임금의 100%를 보장하는 제도다. 만약 90일간 휴식은 제공하되 임금은 전혀 주지 않는다면, 만삭이거나 갓 출산한 여성노동자도 돈을 벌려고 노동시장에 나와야 하는 처지에 내몰릴 수 있다. 그런 일은 우리 사회가 막아야 하듯이, 아픈 노동자가 회복도 되기 전에 일터로 복귀하거나, 치료받으려고 일자리를 포기하는 일도 막아야 한다. 더군다나 우리 곁엔 일하다 아픈 노동자가 산업재해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일하다 다쳤든 놀다가 다쳤든, 중병에 걸렸든 감기를 앓든, 대기업 정규직이든 하청업체 비정규직이든, 운이 좋든 나쁘든, 누구나 아프면 제대로 쉬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것이 문제로다. 유급병가냐, 무급병가냐.
서보미·이승준·하어영·장수경 기자 spring@hani.co.kr

“이 법은 헌법에 따라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 향상시키며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근로기준법 제1조다. 116조에 이르는 법은 노동자의 기본적 생활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규정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허점을 보인다. 노동자가 업무와 상관없이 다치거나 업무와 직접적 연관성이 불명확한 질병으로 아프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병가’나 ‘휴직’이다. 하지만 현재 근로기준법에는 병가(질병휴가)와 질병휴직을 규정하는 조항이 없다. 법은 “업무상 얻은 부상·질병을 치료하는 기간 동안 해고를 금지한다”고만 규정한다.

결국 각 기업이 가진 취업규칙에 따라 노동자의 ‘병가’ 사용 가능 여부와 치료 기간 중 임금 지급 여부는 ‘복불복’이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대부분이 노동자가 업무 외의 질병 부상으로 아플 때 유급휴가를 이용하거나 국가가 보장하는 상병수당(치료 기간에 받지 못하는 임금을 현금으로 보전)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대부분의 한국 노동자들은 아플 경우 세 가지 선택지를 받게 된다. 임금은 받지 못하는데 치료비로 경제적 부담을 떠안거나, 아파도 쉬지 않고 출근해야 하거나, 아니면 그만두거나.

임금 지급 여부는 ‘복불복’

실제 민간기업들은 업무 외 질병·부상을 입은 노동자에게 병가나 휴직을 얼마나 보장하고 있을까? 노동자들의 기본적 생활을 위해 임금을 주며 치료 기간을 보장해주는 회사는 얼마나 될까?

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을 통해 입수한 493개 민간기업(상시 노동자 10명 이상)의 취업규칙(2018년 기준)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분석 결과를 보면 유급병가를 보장하는 기업은 7.3%에 불과했다. 유급이든 무급이든 병가를 취업규칙에 명시한 기업도 57.8%로 절반에 그쳤다. 병가로 해결할 수 없는 장기간(기간은 기업마다 천차만별) 치료나 요양이 필요한 경우 노동자가 쓸 수 있는 질병휴직은 493개 기업 중 91.9%가 취업규칙에 명시하고 있지만 병가와 마찬가지로 유급휴직을 허용하는 비율은 6.1%에 불과했다.

병가나 질병휴직, ‘의무’와 ‘선택’ 사이

이는 김수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이 25개 지방고용노동청이 관할하는 상시 노동자 10명 이상 사업장의 취업규칙을 업종별(제조업·건설업/서비스업), 규모별(10~99명/100~299명/300명 이상) 기준으로 각 노동청당 20여 개씩 뽑아 분석한 결과다. 500개에 이르는 전국 기업의 취업규칙에서 병가와 질병휴직 보장 여부를 분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취업규칙에 보장된 권리가 그대로 행사되기 어려운 현실 등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병가와 질병휴직 사용 권리 등은 훨씬 열악할 것으로 추정된다.

“할 수 있다” “하여야 한다” “허가할 수 있다” “명할 수 있다”….

493개 취업규칙을 살펴보면 병가나 질병휴직을 규정하는 조항의 서술어는 천차만별이었다. 기업마다 취업규칙이 달라서 병가나 질병휴직은 기업의 ‘의무’와 ‘선택’ 사이 어느 곳에 있는 것이다. 업무상 부상·질병으로 아픈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인 나라에서 업무와 연관성이 없거나 불분명한 부상·질병의 치료와 회복을 보장하는 병가·질병휴직은 다양한 ‘서술어’에 따라 노동자가 쓸 수 있거나, 제도가 있어도 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박민정 평택비정규노동센터 노무사는 “병가든 휴직이든 신청하면 ‘허락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경우가 많은데 노조가 없거나 작은 사업장에서 이는 사실상 병가, 휴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지적했다.

기업이 취업규칙을 제대로 지킨다고 했을 때 493개 가운데 7.3%에 속하는 기업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평소 임금을 받거나 임금의 일부를 받고 병가를 쓸 수 있다. 장기간의 치료와 회복이 필요할 때 쓰는 휴직도 6.1% 기업에 다니는 노동자들만이 임금을 받고 쉴 수 있다. 그렇다면 90% 넘는 기업은 아픈 노동자를 어떻게 대우할까?

취업규칙을 살펴보면 병가 제도가 있는 기업들은 대부분 노동자가 보통 3일부터 2주 이상의 질병·부상 치료가 필요할 때 의사의 진단서 제출을 조건으로 ‘무급병가’를 허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병가 기간은 기업마다 2주 이내부터 2~3개월로 각양각색이었다. 병가 제도가 있는 제조·건설업 81개 기업의 취업규칙을 분석해봤더니 병가 가능 기간이 30일을 초과하는 기업이 39.5%로 가장 많았고, 2주~30일(33.3%), 2주 이내(19.8%), 기간 언급 없음(7.4%) 순으로 나타났다. 서비스업 204개 기업의 병가 가능 기간은 30일 초과(55.4%), 2주~30일(25.0%), 2주 이내(10.8%), 기간 언급 없음(8.8%) 순으로 집계된다.

3개월 내 회복해 복직 안 하면대 해직

질병휴직의 경우 대부분 무급으로 1~3개월의 기간을 허용하는 기업의 비율(제조업·건설업 32.7%, 서비스업 38.4%)이 가장 높았다. 무급이지만 6개월 이상 휴직을 허용하는 기업의 비율도 제조업·건설업 26.3%, 서비스업 29.2%로 집계됐다.

하지만 이마저도 노동자의 잔여 연차를 다 쓰고 가라고 명시하는 취업규칙 조항이 여러 기업에 존재한다. “연차 일수를 포함하여 최대 30일 이내의 병가를 줄 수 있다”(고용노동부 서울강남지청 관할 기업), “사원의 연차휴가 일수가 남아 있는 경우에는 남은 연차휴가를 모두 사용한 후부터 인정한다”(광주지방고용노동청 관할 기업), “(병가 기간은) 우선적으로 잔여 연차휴가로 갈음할 수 있다”(서울북부지청 관할 기업) 등 병가를 보장하는 많은 기업이 취업규칙에 연차 사용을 ‘전제 조건’으로 명시한다. 사실상 독감처럼 일주일 안팎의 치료나 격리가 필요한 경우 많은 노동자가 자신의 연차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병가 없이 질병휴직(최소 1~2주 이상 아플 경우 가능)만 보장하는 기업에 다니는 노동자는 당연히 연차를 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질병휴직도 기간을 3개월 이내로 제한하는 기업이 많았는데 그 기간 내에 질병·부상이 회복되지 않으면 취업규칙에서 해직 사유로 명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휴직 연장 사유를 회사로부터 승인을 받는다”는 조건을 제시하지만, 많은 취업규칙에서 질병휴직 기간을 넘기고 복직하지 않을 때 다음과 같이 “해직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한다. “직원의 휴직 기간은 3개월 이내로 하고 그 기간 내에 휴직 조건이 해소되지 않으면 자연 해직된 것으로 한다.”(창원지청 관할 기업) “종업원의 휴직 기간은 3개월 이내로 하고, 그 기간 내에 휴직 조건이 해소되지 않으면, 그 사유를 증빙서류를 첨부하여 연장 승인을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아니할 때는 자연 해직된 것으로 본다.”(평택지청 관할 기업)

결국 병가와 질병휴직이 법 조항 대신 기업의 ‘선의’에 좌우되다보니 업종과 기업 규모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전통적인 제조업·건설업의 경우 유급병가를 보장하는 기업이 3.0%에 불과했지만, 서비스업은 9.6%에 이른다. 특히 상시 300명 이상 서비스 기업의 경우 22.2%가 유급병가를 보장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질병휴직도 300명 이상 서비스업은 6개월 이상 기간을 허용하는 기업이 32.5%를 차지했다. 6개월 이상을 허용하는 제조업 300명 이상 기업의 비율(27.3%)을 웃돈다.

업종과 규모별로 각각의 상황이 달라 여러 변수가 작용할 수 있지만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산업구조가 제조업·건설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재편되면서 노동자의 권리 보장이 과거보다 다소 나아진 시대의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산업재해 비율이 높은 제조업·건설업과 근골격계 질환, 감정노동에 노출되는 서비스업의 업종별 특성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서비스업에 대기업이 많고 최근 노조조직률이 높아진 것도 이런 차이의 원인으로 추정된다. 박혜영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노무사)는 “여러 변수가 있어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산업구조 변화와 노조의 위상이 어떠냐에 따라 업종별로 차이가 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민정 노무사는 “서비스업 중 대형 마트 같은 일부 사업장은 노조조직률이 높은 편인데 이 점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다”고 추정했다.

“아플 때 치료받아야 기본 생활 유지”

국제노동기구(ILO)는 1952년부터 ‘사회보장 최저기준에 관한 조약’에서 질병으로 노동하기 어려운 노동자들에게 상병수당을 지급하도록 권고해왔다. 김수진 부연구위원은 “아플 때 제대로 치료받으려면 기본적인 생활이 유지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파도 쉴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유급병가와 유급질병휴직이 노동자에게 보장돼야 하는 이유는 근로기준법 제1조에 이미 명시돼 있다.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 보장”이라고.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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