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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쟁점 ‘신념에 따른 진료 거부’

“진료 범위 벗어나면 안 볼 수도” vs “임신중지가 건강권에 포함되면 의무적으로 진료해야”
등록 2019-04-25 01:58 수정 2020-05-02 19:29
지난해 7월15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낙태 합법화 반대’ 집회에서 한 의사가 태아 모형을 들고 “나는 의사지 살인자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해 7월15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낙태 합법화 반대’ 집회에서 한 의사가 태아 모형을 들고 “나는 의사지 살인자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양심적 낙태 거부’ ‘낙태 진료 거부’ ‘낙태 시술 거부’ ‘양심적 낙태 거부’ ‘신념에 따른 임신중지 진료 거부’

헌법재판소가 4월12일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한국 사회에선 아직 생경한 키워드가 ‘논쟁 채비’를 갖추고 있다. 명확한 단어로 정립되지 않았지만 핵심은 ‘의료인이 개인적 신념에 따라 임신중지 진료와 시술(이하 임신중지 진료)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에선 아직 산부인과 의사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지만, 먼저 낙태죄를 폐지한 나라들에선 간호사·약사·조산사 등 모든 의료인이 포함된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재단이 운영하는 병원은 아예 병원 전체가 신념에 따라 임신중지 진료를 거부하기도 한다.

허용 국가, ‘낙태 여행’ 떠나는 사람들

‘임신중지 진료를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 하고, 해주겠다는 병원에 가서 진료받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미 확인된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전통이 강하거나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나라들에선 임신중지 진료를 하는 의사보다 안 하는 의사가 더 많다. 결과적으로 임신을 중지하려는 여성의 권리가 제약받거나 시술 지연으로 건강이 위협받는 사례도 있다. 또 낙태죄를 유지하는 나라에서는 임신중지 진료를 하는 의사가 고발 위협 등에 노출되지만, 낙태죄가 폐지된 나라에서는 역으로 임신중지 진료를 거부하는 의사가 취업 제한이나 명단 공개 압박을 받기도 한다.

지난해 발간된 책 을 보면, 이탈리아에서는 전체 산부인과 의사 10명 중 7명이 임신중지 진료를 거부했다. 국제여성건강연합(IWHC)이 지난해 초 발표한 자료를 보면, 전세계적으로 70여 개 나라와 자치주가 개인적 신념에 따른 진료 거부권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은 50개 주 가운데 45개 주에서 신념에 따른 임신중지 진료 거부를 허용한다. 낙태죄가 폐지된 뒤에도 여성들이 임신중지 진료 병원을 찾아 다른 주로, 더러는 다른 나라로 ‘낙태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 이 때문에 노르웨이에선 2011년 좌파 연정이 임신중지 진료 거부권을 폐지했다. 그러나 2014년 우파 연정에 참여한 기독민주당 주도로 임신중지 진료 거부권을 다시 허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여론의 거센 반발로 개정안을 철회하는 등 정치적 쟁점이 되기도 했다.

헌재가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낙태 합법화, 이제 저는 산부인과 의사를 그만둬야 하는 것인지…ㅠ’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자신을 “10년 이상 밤낮으로 임산부를 진료하고 저수가와 사고의 위험에도 출산의 현장을 지켜온 산부인과 의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생명의 신비에 감동해 산부인과를 선택하고 싶은 후배들은 낙태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의 길을 포기해야 할 것이며 독실한 가톨릭이나 개신교 신자의 경우 종교적 양심으로 인해 산부인과 의사의 길을 선택할 수 없게 될 것”이라며 “낙태시술 진료 거부권(을) 반드시 같이 주시기를” 청원했다. 청원 마감일이 5월12일인데, 4월18일 현재 2만7천여 명이 청원에 동의했다.

‘정당한 사유’에 ‘개인적 신념’ 포함할지 관건

의료법 제15조 1항은 “의료인 또는 의료기관 개설자는 진료나 조산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한다”며 진료 거부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유권해석을 통해 진료 거부의 정당한 사유로 의사가 부재중이거나 신병으로 인해 진료를 행할 수 없는 상황인 경우, 병상·의료인력·의약품·치료재료 등 시설과 인력이 부족해 새로운 환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 의사가 타 전문과목 영역이나 고난도 진료를 수행할 전문지식 또는 경험이 부족한 경우, 환자가 의료인으로서의 양심과 전문지식에 반하는 치료법을 의료인에게 요구하는 경우 (이하 생략) 등을 꼽았다. 임신중지 진료 거부권 논란에서는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에 의료인의 개인적 신념을 포함할지가 관건이다.

최안나 국립중앙의료원 난임센터장은 전화 인터뷰에서 “전체 산부인과 전공의에게 낙태 시술을 교육하고, 전체 산부인과에서 낙태 시술을 하도록 하는 데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산부인과 의사는 임산부의 건강과 태아의 생명을 최우선 가치로 교육받은 사람들”이라며 “산부인과 의사들한테 (경제적 요인 등) 비의학적 사유로 인한 낙태를 ‘기본 의료서비스’로 강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대안으로는 “별도 (임신중지 진료) 병원을 지정해야 할지는 좀더 논의해볼 문제지만 (임신중지 진료를) 소신으로 가진 의료인들이 하면 되고, 전문적인 사전 상담과 사후 합병증 관리 차원에서도 국가관리시스템으로 지정된 전문 병원에서 진료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제안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김재연 법제이사는 “지금도 의사가 자기 진료 범위를 벗어난 환자는 안 볼 수 있다. 가령 의사가 내시경을 할 줄 모르는데 환자가 내시경을 해달라고 하면 안 해줄 수 있는 것과 같다. ‘진료 거부’라기보다는 의사가 임신중지 진료를 안 하면 그걸로 그만”이라고 지적했다. 김 법제이사는 임신중지 진료와 관련해 일본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일본에선 정부가 임신중지 진료 병원 신청을 받고, 신청 병원을 대상으로 진료 시설과 방법 등을 교육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임신중지 환자의 이름 등 개인정보를 남기지 않고 넘버링(환자번호)으로 관리하고, 의사는 환자의 수술 동기와 수술 시기(법률적 허용 시기) 등 정보를 매년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본, 신청 병원 대상으로 교육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고경심 이사(산부인과 전문의)는 “세계보건기구나 산부인과·공중보건 학회 등 건강 관련 학회들은 임신중지가 건강권에 포함되면 의사가 (의무적으로) 진료해야 한다는 입장에 일관성이 있다”며 “임신중지가 필수 의료서비스라면 경제적 장벽을 낮추고, 정보를 제공하는 등 접근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 이사는 다만 “의사의 양심이나 종교적 신념 때문에, 혹은 훈련을 못 받았거나 적절한 시술 기구가 없어서 임신중지 진료를 못할 수도 있다”며 “진료를 못할 때는 여성이 시간을 지체하지 않도록 72시간 안에 다른 병원으로 옮기도록 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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