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규석이의 어떤 자립

반세기 넘은 법에 의해 ‘만 18세’면 억지로 해야 하는 자립

“한 끼도 먹기 힘들어… 자립이 아니라 나라로부터 버려지는 것”
등록 2019-03-23 05:53 수정 2020-05-02 19:29
지난 2월 아동양육시설에서 퇴소한 김규석(가명)군이 3월19일 오전 지하철역 출구 앞에 서 있다. 류우종 기자

지난 2월 아동양육시설에서 퇴소한 김규석(가명)군이 3월19일 오전 지하철역 출구 앞에 서 있다. 류우종 기자

3월16일 만난 김규석(가명)군은 “부모님을 (태어나서 한 번도) 못 뵀다”고 했다. 돌아가신 건지, 버려진 건지를 더 캐묻지는 않았다. 김군처럼 보호자가 없거나 학대·빈곤·미혼부모 등의 문제로 보호자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는 아이들(요보호아동)은 나라가 맡는다. 아동양육시설, 공동생활가정(그룹홈) 등 아동복지시설에 배치하거나 가정위탁으로 기른다.

2017년 보건복지부 ‘보호대상아동 현황 보고’를 보면, 2017년 한 해 새로 생긴 보호대상아동은 4121명이었다. 발생 원인별로 보면 학대·빈곤·실직 등이 2769명(부모 사망도 포함되지만 비율 미미)으로 가장 많고, 미혼부모·혼외자 850명, 비행·가출·부랑 229명, 유기 261명, 미아 12명 순이다. 복지부 통계를 보면, 2017년 12월 기준 전체 요보호아동 수는 아동양육시설 280개소 1만2789명, 그룹홈 533개소 2811명, 가정위탁 9575가정 1만1983명 등 총 2만7583명이다.

민법으로는 ‘만 19세’가 성인이지만

김군은 유년기를 오롯이 아동양육시설에서 보냈다. 고교 졸업 직후인 지난 2월23일 말 그대로 ‘자립’했다. 서울에 있는 한 시설에서 퇴소해 1인가구 세대주가 됐다. 대학은 일찌감치 포기했고 일자리는 아직 못 구했다. 그래도 나가야 한다니 나갈 수밖에 없었다. 시설에서 함께 살던 또래들은 1월부터 하나둘 짐을 챙겨 떠났다. 김군도 그제야 자립이란 말이 실감났지만 모든 게 막막했다. 결국 제일 마지막으로 시설을 나왔다.

자립 3주차, 김군은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기자와 만났다. “(아동양육)시설이 좋았다는 걸” 새삼 느낀다고 했다. “의식주가 해결된다는 게 정말 좋은 거였습니다. 나오니까 밥값도 제가 내야 해서 하루 한 끼 먹을까 말까입니다. 집에서 먹으면 주로 라면… 퇴소할 때 고추참치(캔)랑 김치를 가지고 나와서 (반찬 삼아) 먹고 있습니다. 일을 안 하니까 애들 만나서 밤에 게임하고 낮에 자고… 생활 패턴이 망가져서 힘듭니다.”

보호 종료 청소년 중 대학이나 직장에 ‘적’이 없고 주거·생활비·채무·대인관계의 어려움으로 곤란을 겪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이런 청소년일수록 시설이나 지원 단체와 연락을 끊은 채 이른바 ‘잠수를 타는’ 일이 흔하다. 수도권의 한 보호 종료 청소년 지원 단체 관계자는 “구치소나 성매매 업소에 가면 그런 아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며 안타까운 현주소를 설명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종종 ‘알맹이 빠진 통계 자료’를 보며 ‘보호 종료 청소년이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자위하는 배경도 비슷하다. 만 18세 보호 종료의 심각성을 알려줘야 할 ‘정말 힘든 아이’ 상당수는 연락이 닿지 않거나 연락이 닿아도 설문조사 따위에 응하지 않는다. 보호 종료 관련 통계를 볼 때, 응답자 수와 응답률을 꼼꼼히 살펴야 하는 이유다.

아동양육시설에서 생활하다가 만 18세가 되면 자립해야 한다는 기준은 1961년 이름도 낯선 아동복리법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2019년 현재, 법명은 아동복지법으로 바뀌었으나 시설 퇴소 연령 기준은 변함이 없다. 제16조 1항에서는 “보호조치 중인 보호대상아동의 연령이 18세에 달하였거나 보호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인정하면 (중략) 퇴소시켜야 한다”고 규정한다. 대학을 가거나 직업훈련을 받는 등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18세가 넘으면 시설을 나가야 한다.

법이 제정된 1960년대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6%였다. 58년 전 그땐 고교를 졸업하고 18세에 취업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당연히 자립도 가능했다. 2018년 기준으로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69.7%이며, 대학에 가지 않고 자립이 가능한 수준의 일자리를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회 평균 자립 연령은 높아졌는데, 시설양육 청소년의 자립 연령만 생애주기와 무관하게 반세기 넘게 그대로 ‘만 18세’인 셈이다.

우리 민법은 ‘만 19세 이상’을 성인으로 본다. 민법상 미성년자인 만 18세 소년 소녀를 보호자도 없이 “다 컸다”며 퇴소시키는 셈이다. 수도권의 한 아동양육시설에서 자라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딴 김수지(24·가명)씨는 이런 상황을 “자립이라기보다는 나라로부터 버려지는 것”으로 정리했다. 김씨는 “퇴소했을 때 나는 아직 민법상 성인이 아니었다. 나를 딸처럼 여긴 시설 선생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휴대전화 하나도 개통 못하고 부동산 계약도 못할 뻔했다”며 모순된 법 체계를 꼬집었다.

자립생 4분의 1이 빈곤층으로 내몰려

매년 4천여 명의 보호 종료 청소년이 이렇게 시설 밖으로 나온다. 사회보장정보원의 ‘시설퇴소아동의 기초수급 및 차상위계층 수급 현황’을 보면, 2014년부터 5년간 아동양육시설 퇴소자는 2만695명이었다. 이 가운데 기초생활수급자 또는 차상위계층이 된 사람은 24.4%인 5052명이었다. 보호가 종료된 자립생의 4분의 1이 빈곤층으로 내몰렸다는 뜻이다. 이용교 광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동 1명을 10년간 시설에서 키우려면 보육교사 임금 등 직접 지원 예산만 연간 2500만원, 총 2억5천만원이 든다.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키운 아이들이 보호 종료 후 다시 수급자가 됐다는 건 정책이 실패했다는 뜻”이라고 꼬집었다.

뜨거운 심장이 아닌 차가운 머리로 계산기를 두드려도, 보호 종료 청소년의 초기 자립 지원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면 ‘사회적 비용’ 면에서도 이득이다. “나라가 최소 2억5천만원을 투자한 보호 종료 청소년을 조금만 더 지원해 ‘납세자’로 키워내는 건, 평생 ‘수급자’ 또는 ‘수용자’로 만드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드는 사회 투자다.” 이 교수의 말이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1천원이라도 좋습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후원계좌 하나은행 555-810000-12504 한겨레신문 *성함을 남겨주세요
후원방법 ① 일시후원: 일정 금액을 일회적으로 후원 ② 정기후원: 일정 금액을 매달 후원 *정기후원은 후원계좌로 후원자가 자동이체 신청
후원절차 ① 후원 계좌로 송금 ② 독자전용폰(010-7510-2154)으로 문자메시지 또는 유선전화(02-710-0543)로 후원 사실 알림
문의 한겨레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