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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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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처럼 일해 갯벌을 둑과 논으로

서산개척단 정영철… 1771명 집단생활,

“땅 주고 집 준다”더니 논에서 쌀 나자 임대료 요구
등록 2019-01-05 05:49 수정 2020-05-02 19:29
지난해 12월26일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에서 정영철 서산개척단 진상규명대책위원장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지난해 12월26일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에서 정영철 서산개척단 진상규명대책위원장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제 이름은 정영철, 1942년 10월11일생입니다. 여기(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3길)가 예전엔 다 갯벌이었습니다. 우리가 짐승만도 못하게 살면서 맨손으로 저 둑이며 논이며 다 만든 겁니다. 한이 맺혀 그런지 서산개척단 일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요.

전 전쟁고아예요. 고향은 황해도라는데 기억이 없어요. 9살 때 엄마가 동생을 업고, 고모가 끈으로 제 허리를 묶고 피란을 갔어요. 한강철교가 폭파되면서 엄마가 그 파편에 맞아 돌아가셨어요. 엄마를 묻고 노량진역에서 가족들이 열차 지붕 위에 올라탔어요. 열차가 철커덕 출발하는 바람에 제가 지붕에서 떨어졌습니다. 깨어나보니 혼자예요. 피란민에 섞여 남쪽으로 걸었어요.

군인들 닥치더니 “혁대 풀고 뒤통수에 손 올려”

하루도 못 가 또 폭격이 떨어져요. 기절했다 깨보니 여기저기 사람들이 죽어 있는데 다리가 잘린 한 아저씨가 신발을 가리키며 물 좀 떠달라고 해요. 물을 떠다 입에 대주니까 그냥 죽어요. 얼마나 무서운지 막 뛰었습니다. 큰길만 따라가는데 미군 지프가 서요. 어려서 그 사람들이 오랑캐인 줄 알았습니다. 무서워 죽겠더라고요. 뒷덜미를 덥석 잡더니 차에 태워요. 내 또래 둘이 타고 있었어요. 우리를 제주도 고아원에 데려다놨는데 아버지 찾으려고 도망 나왔어요. 차동원이란 친구하고요. 그 친구는 나중에 저랑 서산까지 같이 왔습니다.

동원이랑 부산으로 가는 큰 배에 몰래 탔어요. 고구마를 훔쳐 먹다 뱃사람들한테 들켰어요. 밥 얻어먹고 청소하다 몇 달 만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부산역에 큰 식당이 있었는데 후문 연탄 때는 데 앉아 있으면 아주머니들이 손님들 먹다 남긴 찌끄레기를 버리면서 먹을 만한 거 골라줬어요. 그거 얻어먹는 재미에 거기 붙어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20대 30대 형님들이 “너 고아원에서 튀었지?” 그래요. 그 왕초들한테 돈 바치며 4·19 때까지 살다 차츰 간덩이가 부어 ‘나바리’(구역) 하나 받았어요. 황금마차, 다방, 술집이 몰려 있는 곳이었어요.

1961년, 5·16 쿠데타 터지고 얼마 안 됐는데 이상한 거예요. 왕초들이 저한테 구역세를 받지도 않고 다 튀어버렸어요. 목재 단칸방에서 여섯 명이 자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난리가 났어요. 군인들이 들이닥치더니 “혁대 풀고 뒤통수에 손 올리고 땅만 쳐다봐” 그러면서 트럭에 막 실어요. 부산 시내 똥물은 다 모인다는 금정다리 밑으로 튀려고 하는데 ‘다다다’ 총을 쏴대니 발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거기서부터 얻어터지기 시작했어요. 용두산 공원으로 끌고 갔는데 애, 어른 안 가리고 얼마나 많이 때리던지. 거기 없었던 사람들은 ‘저 새끼 말이 맞나’ 하실 겁니다. 사람들을 A, B, C로 분류하더니 아동보호소, 갱생원으로 끌고 가요. 저는 부산시청 차에 실려 갱생원으로 갔어요. 거기서 장흥개척단을 거쳐 서산개척단으로 보냈어요. 갱생원에 있을 때 시청 직원들, 높은 사람들이 이야기했어요. “개척하면 땅도 주고, 집도 준다”고요.

1961년 11월쯤 장흥에서 100명 뽑아서 서산으로 보냈어요. 열차에서 튀려고 자원했는데, 열차 한 칸에 광목으로 만든 팬티 한 장 입혀서 태우고 커튼으로 창도 다 가리더라고요. 앞뒤로 군인들이 지키고요. 차에 실려 밤에 서산에 도착했어요. 내리자마자 ‘어머니 사랑 정신 보신탕’ ‘인간 재생창’이라고 쓰여 있는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려요. ‘여기가 어디냐’ 물었다가는 뒈지게 맞는 거예요. 땅굴 파 가마때기 덮어놓은 데서 자래요. 정부에서 막 잡아다 넣으니까 금세 1천 명이 넘어요. 공식적으로 1771명이 동원됐다고 하는데 처음엔 더 많았어요.

도비산 개구리·뱀, 우리가 다 잡아먹었어요

구호반이라고 인간 철조망이 뺑 둘러 있으니 도망 못 가요. 도망갈 것 같은 놈들을 골라 구호반을 시켰어요. 구호반은 10m 간격으로 서 계속 전달을 돌려요. ‘1번 초소 이상 없음’ ‘2번 초소 이상 없음’ 밤새 그래요. 그러다 번호가 딱 끊기면 사이렌이 울리고 난리가 나죠. 밥 먹을 때고 언제고 서로 말하면 안 돼요. 도주 공모했다고 패니까.

영양실조에 안 걸리려야 안 걸릴 수가 없어요. 소금을 도라무깡(드럼통)에다 풀고 물을 쏟아요. 거기에 시커먼 색소를 뿌리면 그게 간장이에요. 거기다 보리밥을 안 죽을 만큼만 줘요. 숟가락으로 떠먹을 새가 없어요. 여기 도비산에 있는 개구리·뱀, 우리가 다 잡아먹었을 거예요. 삶을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냥 먹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간부가 내놓은 개밥을 먹었다가 두들겨 맞았어요.

제가 구호반에 있다 소대장이 됐는데 하루는 태풍이 불었어요. 둑이 터져 밤에 10명을 데리고 나오라는데 전부 비실비실해 뽑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맨 마지막에 도착했더니 감독관 동생이 삽으로 머리를 쳤어요. 깨보니 애들이 떠메다 막사에 데려다놨더라고요. 그때 한쪽 귀가 먹었어요. 거기선 혁명공약을 5절까지 딸딸 외워야 해요. 못 외우면 ‘빠따’예요. 저희 중 한 명이 자기 이름도 잘 모르는 놈이었어요. ‘쟤가 저러다 맞아 죽겠다’ 싶은 거예요. 제가 중대장한테 이름도 모르는 애한테 너무 무리니까 1절만 외우게 하자고 애원했어요. 얼마나 호되게 패던지 걔가 1절을 외우더라고요.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몰라요. 순표 아버지가 맞아 죽는 건 제 눈으로 봤어요. 전 단원 앞에서 곡괭이로 때렸는데 개구리 뻗듯 쭉쭉쭉 뻗었어요. 의무실에 데려다놨는데 죽었어요. 순표 생각만 하면… 저야 이미 낙인찍힌 놈이지만 순표랑 걔 아버지는 선량한 사람들인데, 대전역에서 ‘후리가리’(경찰 일제 단속)당해 왔어요. 그날 건빵이 배급됐는데 어린 순표가 어디 간 사이에 아버지가 너무 배고파 순표 것까지 먹은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순표가 단본부에 가 내 건빵 어딨냐고 했다 아버지가 먹은 게 들통났어요. 그래서 맞은 거예요.

저랑 제주도에서부터 같이 있던 친구 동원이는 여기 와서 1년 좀 안 돼 죽었어요. ‘깡다구’가 센 친구였는데 만날 눈탱이 시퍼레가지고 돌아다녔거든요. 어느 날부터 안 보이는 거예요. 제가 그때 소대장이라 좀 자유가 있었어요. 어디 갔냐 물었더니 “야 몰랐냐? 죽어서 묻었다” 그래요. 지금 같으면 제가 무지하게 울었을 거예요. 그때는 악에 받쳐서 그랬는지 눈물도 안 나요. “씨발, 불쌍한 놈 죽었네.” 그러고 말았는데 한 열흘간은 동원이가 꿈에 보였어요.

뻘은 어찌나 잘 무너지던지. “오늘 수로 50m 파라”고 하면 죽어도 파야 해요. 장비가 어디 있어요. 하루는 밤 11시까지 둑막이 공사하고 점호하는데 한 명이 비더라고요. 그다음날 보니 갯벌에 발만 나와 있어요. 낮에 일하다 죽으면 가마때기로 들것 만들어 싣고 그 위에 태극기를 덮어요. 지랄맞게 태극기는 왜 덮어. 맞아 죽으면 지금 서산희망공원이 된 국유지에 그냥 묻어요. 원래 여기가 공동묘지가 아니었는데 저희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1964년 서울시민회관 225쌍 합동결혼식
정화자(76)씨는 1963년 20살 때 대전 미군부 모포공장에서 일하다 임금을 두 배 주는 공장으로 데려가겠다는 민정식 서산개척단 단장 말에 속아 끌려왔다. 감시 탓에 도망을 못 가다 1963년 개척단원과 강제 결혼해 아들 셋을 뒀다. 함께 개간을 이어간 남편은 35년 전 일하다 뒤꿈치를 다쳤는데 치료받지 못해 숨졌다. 화자씨는 이곳에 남아 미용 등을 하며 아들들을 키웠다. 강제 결혼 당시를 “너는 너랑, 이렇게 짐승처럼 감독관이 맘대로 짝지었다”고 기억하는 그는 특히 “합동결혼식 당시 ‘부랑아와 윤락여성의 결혼’으로 정부가 선전해 그 낙인 때문에 평생 가슴앓이를 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당시 개척단원이 지은 집에 홀로 살며 구멍가게를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정화자(76)씨는 1963년 20살 때 대전 미군부 모포공장에서 일하다 임금을 두 배 주는 공장으로 데려가겠다는 민정식 서산개척단 단장 말에 속아 끌려왔다. 감시 탓에 도망을 못 가다 1963년 개척단원과 강제 결혼해 아들 셋을 뒀다. 함께 개간을 이어간 남편은 35년 전 일하다 뒤꿈치를 다쳤는데 치료받지 못해 숨졌다. 화자씨는 이곳에 남아 미용 등을 하며 아들들을 키웠다. 강제 결혼 당시를 “너는 너랑, 이렇게 짐승처럼 감독관이 맘대로 짝지었다”고 기억하는 그는 특히 “합동결혼식 당시 ‘부랑아와 윤락여성의 결혼’으로 정부가 선전해 그 낙인 때문에 평생 가슴앓이를 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당시 개척단원이 지은 집에 홀로 살며 구멍가게를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저기 모월리로 들어오는 길도 우리가 냈어요. 강제 결혼시킬 때 말이에요. 1963년 여기 운동장에서 125쌍, 1964년엔 서울시민회관에서 225쌍을 합동결혼시켰어요. 서울시장이 주례를 보고요. 제가 처음엔 결혼 안 한다고 버티다 두 번째 땐 맞아 죽기 싫어서 했어요. 한 막사에서 여자 나오고 다른 막사에서 남자 나오면 둘이 결혼이야. 생전 처음 보는 거죠. 저랑 결혼한 애가 정말 너무 불쌍한 거예요. 만날 울어요.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캠핑 나왔다 잡혀온 아이였어요. “내가 너 어떻게든 도망 보내줄 테니 조금만 참아라” 했어요. 그러다 1년 뒤에 임신을 한 거예요. 제가 감독관한테 “내 애까지 가졌는데 도망가겠느냐 어린애만 낳고 오게 해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사회 나가 개척단 이야기하지 않는다’ ‘안 돌아오면 정영철이 죽는다’ 이런 각서를 쓰게 했어요. 제가 “나 안 죽으니까 절대 돌아오지 마라. 너 가고 나도 튈게. 만약 날 못 잊으면 1년에 하루 서울역 시계탑 앞에서 한 시간 기다려라, 거기서 만나자”고 했어요. 그 애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이 지옥 같은 데 왜 돌아오겠어요. 저는 도망 못 갔죠. 하루는 일하고 있는데 동네 주민이 편지를 제 주머니에 넣고 가요. “시계탑에 갔는데 없더라”라고 써 있었어요.

‘민주화’(개척단원들 집단 반발)가 일어났어요. 제가 주동잡니다. 둑 작업할 때예요. 제가 소대장급들 모아서 이야기했어요. “이 중에 배신자 생기면 나는 죽게 될 얘길 할게.” 친구들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조회시간에 제가 단본부 앞에서 “우리를 차라리 죽이든지, 아니면 자유를 주든지 하라”고 했더니 끌고 가려는 거예요. 그러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와 일어났죠. 1천 명이 넘으니까 간부들이 겁을 먹고 도망갔어요. 구호대도 없어졌고요.

그런데 왜 떠나지 않았느냐. 개척하면 땅을 준다고 했으니까요. 높은 사람들 올 때마다 그렇게 말했어요. 1정보(3천 평) 땅 준다고. 1971년 서산군 인지면장 도장이 찍혀 있는 ‘가분배증’도 받았어요. 그러니 당연히 내 땅이다 생각하고 개간을 계속했습니다. 동네 처자한테 장가들어 애들이 자잘할 때예요. 애들은 뻘밭에 두고 여자들은 흙짐 지고 일해요. 집에 갈 때 보면 애들이 뻘투성이가 돼 저게 누구 새낀지 분간이 안 돼요. 정부는 삽 한 자루 사준 적이 없다고요. 땅에 간기가 남아 농사가 안되니까 남자들은 노가다 나가 돈을 벌어왔습니다. 저는 남산 1호 터널 뚫는 데서 일하다 돈 모으면 그거 떨어질 때까지 여기서 개간하고 다시 가고 그랬어요. 벼만 심었다 하면 죽더니 1990년쯤에 첫 쌀 수확을 봤어요. 그때 90㎏짜리 8가마가 나왔어요. 촌에서 돈 쓸 일 없으니까 이렇게만 하면 앞으로 저축하면서 살겠다 했어요.

그런데 옥답을 만들어놨더니 느닷없이 나라에서 임대료를 내라는 거예요. 내 땅인데 왜 내가 임대료를 내냐고 버텼어요. 우리가 법을 알아요, 뭘 알아요. 그거 안 내면 땅 뺏길까봐 낸 사람들도 있어요. 못 버티겠더라고요. 결국 5년간 연체 벌금까지 합쳐 임대료 냈어요. 지금도 여기서 농사지으며 1년에 90만원씩 내요.

땅 못 주겠다면, 인건비라도 줘야지
1961년 9월 충남 서산시 인지면에서 열린 서산개척단 합동결혼식에서 125쌍이 강제 결혼하고 있다. 한겨레

1961년 9월 충남 서산시 인지면에서 열린 서산개척단 합동결혼식에서 125쌍이 강제 결혼하고 있다. 한겨레

2년 전에 서산개척단진상규명위원회가 뜨고, 저보고 회장을 하라고 해요. 이런 건 똑똑한 사람, 먹물 좀 든 사람이 하면 좋은데… 저는 자꾸 욕을 하게 돼요. 제가 인터뷰 같은 거 나서면 개척단원들 중에 전화해서 “창피하게 그런 이야기 하고 다니냐” 하는 사람들 있어요. 그런데 이 한을 못 풀면, 저는 억울해서 죽을 수도 없습니다. 좋아요, 정부가 정 땅을 못 주겠다면, 인건비라도 줘야 할 거 아닙니까? 진상 규명해서 죽은 사람들 원혼이라도 달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를 짐승 취급하고 50년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잖습니까?

김소민 자유기고가 regardmoi@gmail.com

서산개척단은


민정식 단장은 ‘국무총리 인권상’ 수상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세력은 정권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용도로 ‘부패와 구악의 일소’를 내걸고 고아, 부랑아, 한센병 완치자 등을 간척사업에 투입했다. 대한청소년개척단(서산개척단)은 그 가운데 하나다.
충남 서산군 인지면 모월리 일대는 폐염전으로 방치된 국유지였다. 보건사회부는 자동차 조립공장을 운영하던 민정식에게 대한청소년개척단 운영을 위탁한다. 1963년 5월 재무부 장관 황종률 ‘소원재결서’에서는 “사회 명랑화 일환으로 전국 무의탁 우범자, 윤락여성 등 800명을 정착시켜 국유 폐염전 250정을 농경지화하여 세대당 1정보씩 250세대를 입주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1961년 11월14일 68명을 시작으로 서산개척단원은 1964년 1771명까지 늘어난다. 많은 피해생존자가 ‘후리가리’(경찰, 공무원들이 벌인 일제 단속)로 끌려왔다고 증언한다. 1964년 개척단원 1700여 명 중 남녀 각각 300명의 전직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남자는 노동, 상업, 농업, 연예인, 스포츠인, 공무원 등 직업이 다양했다. 여자도 성매매 종사자뿐 아니라 직공, 가정주부도 있었다(이태암, ‘특수 지역사회인(서산개척단)에 대한 사회의학적 조사 연구’). 개척단원이 대거 이탈한 뒤인 1965년 현황에는 총 726명 가운데 남자는 423명, 여자는 303명으로 기록돼 있다. 전체 인원 중 20대가 326명(44%)으로 가장 많았고, 275명(35%)은 20살 이하 청소년이었다. 학력별로는 국졸 이하가 521명(71%)이다(김아람, ‘1960년대 개척단의 농지 조성과 역동적 정치’).
군대처럼 운영한 서산개척단에서는 감시가 삼엄했다. 간척사업은 장비 없이 맨손으로 이뤄졌다. 구타와 굶주림도 심했다. 이 과정에서 사망 사고가 빈번했지만 정확한 피해 규모는 파악되지 않았다. 1963~64년 강제 결혼을 등에선 “부랑자와 윤락여성의 자립 자활”로 선전했지만 1966년 10월 는 350쌍 가운데 45쌍이 결혼에 실패했고, 130쌍 이상은 부부 생활에 불안이 짙다고 답했다고 보도했다. 민정식 단장은 1964년 국무총리 인권상을 받았다.
가혹 행위에 단원들이 저항하면서 감시 체계가 무너지고 1966년 9월1일 사업장이 서산군으로 이관됐다. 서산군은 1968년부터 1세대당 1정보 가분배증을 준다. 개척단원들은 이를 소유권으로 여겼지만 정부는 1991년 말 유상분배하겠다고 통보했다. 이후 개척단원들은 소유권이전 등기 청구소송을 냈지만 2004년 헌법재판소에서 각하됐다. 2008년 변상금 부과 취소소송도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인권유린 진상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김막동씨가 서산개척단원이던 형 김귀술씨의 죽음을 규명해달라고 2006년 당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워원회’에 신청했을 때 조사한 것이 전부다.
지난해 나온 이조훈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을 보면, 1970년까지 박정희 정부가 미국의 PL-480 지원금을 받아 공식적으로 운영한 간척사업장 수는 140곳이다. 1978년 미국 하원이 발간한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이 지원금이 대통령선거 자금 등에 유용됐다”고 써 있다. 이 감독은 다큐에서 “(지원금은) 그것대로 빼먹고, 땅은 땅대로 몰수해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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