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되었네 우리 꿈들은 유예되었네 우리 꿈들은 연체되었네 우리 마음은” (9와 숫자들 )
노랫말은 시대의 거울이다. 청춘을 다룬 노래는 불안한 이들의 마음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높아만 가는 취업 문턱과 무한 경쟁의 시대, ‘헬조선’에서 아파하던 청춘들은 “더 열심히 한다”고 마음을 다잡을수록 ‘다람쥐 쳇바퀴’를 돌며 ‘유예’되는 자신의 꿈을 발견한다. 김상희(37)씨는 “사회적으로 한 사람한테 요구하는 게 많다. 이것도 저것도 잘해라… 너무 많으니 지친다”며 “이대로 괜찮아”라는 말이 위로가 된다고 했다.
청춘은 비록 ‘진통제’일지라도 위로와 응원을 갈구한다. “저도 정말 잘하고 싶어 조바심이 나는데 안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땐 선배들에게 ‘망해도 괜찮아’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김조은·26) “열심히는 하는데 뭔가 잡히는 것은 없고… 지금 가는 방향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우린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어요.”(이동수·30)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옥상달빛 )
“멈춰서도 괜찮아 아무 이유도 모르는 채 달릴 필요 없어 꿈이 없어도 괜찮아”(방탄소년단 )
“힘들 땐 ‘힘들다’ 무서울 땐 ‘무서워’ 말해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우리 자연사하자 오래 살고 볼 일이야”(미미시스터즈 )
청춘들의 마음과 함께 노랫말도 자연스레 바뀐다. “지금 그대로도 괜찮아”라는 응원은 이제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조바심 내지 말고 “자연사하자”는 ‘자조 섞인’ 꿈으로 진화한다. 청춘의 마음에 스미는 노랫말처럼 도 이들의 마음을 조심스레 따라가봤다. 그리고 도 여러분에게 위로를 건넨다. “지금 그대로도 괜찮아요.”
글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국도 1번이 시작되는 길, 전라남도 목포 영산로. 야트막한 유달산 아래 일본식 가옥과 상가들이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가장 번성했던 이곳은 이제 쇠락한 구도심이다. 이곳에 낡은 나무 간판에 ‘로라’라고 쓰인 3층 건물이 있다. 1970년대 목포 청춘들의 메카였던 경양식집이다. 수년간 빈집으로 방치된 이곳에 청년들이 모이고 있다.
지난 8월 말 39살 이하 청년들 첫 입주11월7일 로라 건물에 터 잡은 ‘쉬어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은, 괜찮아 마을’(괜찮아 마을)을 찾았다. 이곳은 문화기획사 ‘공장공장’(空場共場)이 청년들에게 휴식과 인생을 재설계할 기회를 주려고 만든 대안 공간이다. 6주 동안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셰어하우스를 마련하고, 지역살이 강연 프로그램, 집단 상담, 동네 축제 열기, 섬 여행 프로그램 등을 진행한다. 올해 행정안전부의 공간 활성화 지원 사업에도 선정됐다. 공장공장의 홍동우(33) 대표는 또래 청년들의 고민과 아픔을 듣고 이 마을을 기획했다.
전국일주 여행사를 운영했던 홍 대표는 여행하며 1300여 명의 2030세대 청년들을 만났다. 매주 새로운 여행객을 만나지만 그들은 모두 여행지에서 팍팍한 삶을 이야기했다. 다들 행복하지 않은 ‘삼포(연애·결혼·출산 포기) 세대’였다. “박봉에 힘들어하는 사람, 상사의 폭언과 성희롱에 시달리는 사람, 평가받는 삶에 지쳐 자존감이 떨어졌다는 이들도 있고요. 어디에서도 가장 깊은 아픔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끙끙 앓으며 다들 힘겹게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행에서 잠시 만난 그들에게 그 순간 위로의 말을 해주지만 완전한 치유는 될 수 없었어요.”
홍 대표 역시 쉬어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아라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경쟁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한국 공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다. “20살이 되어 사회에 나가면 자유롭게 살 줄 알았죠. 그것을 위해 공부만 했는데 대학에 가니 낭만은 없고 취업 준비에 다들 바빴어요. 고등학교의 연장선이었어요. 그 속에서 같은 길을 가다보면 대기업에 취업해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아등바등 살 것 같았어요. 그건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었어요.” 그는 20살 여름방학 때 오토바이 타고 전국 일주를 했다. 여행하는 삶을 살고 싶었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가의 삶을 살던 홍 대표는 이제 목포에 뿌리내리며 청년들을 위한 ‘괜찮아 마을’을 만들었다.
지난 8월 말 괜찮아 마을에 전국 각지에서 “인생을 다시 설계하고 싶은 39살 이하 청년들”이 왔다. 괜찮아 마을 입주 모집에 응모해 뽑힌 1기 입주민이다. 그들은 창업을 준비하는 청년, 새로운 도전을 원하는 청년, 실패했지만 다시 한번 도약하고 싶은 청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등 떠밀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이들이다.
괜찮아 마을의 1기 주민인 김한나(27)씨는 “혼자 절벽에 서 있는 듯한” 서울에서 벗어나 “쉬고 싶고 숨고 싶었던” 순간에 이곳에 왔다. 바다와 산이 있고 옛 모습을 간직한 이곳에 오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바쁜 걸음을 멈추니 자세하게, 천천히 내 주변을 보게 됐어요. 내가 걷는 길, 내 옆에서 웃는 사람. 조금씩 작고 따뜻한 것들이 보였어요.”
사진 찍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김씨는 이곳에서 본 그 작고 따뜻한 삶을 기록하고 싶었다. 단골 가게와 목포에서 만난 분들의 모습을 담은 ‘멋쟁이 대잔치in목포’라는 기록 작업을 했다. 괜찮아 마을 1기 주민인 황일화(28)씨와 그 작업을 함께 했다. “그분들을 찾아가면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줘 고맙다’고 해요. 따뜻하게 맞아주는 그분들 덕에 제 마음도 따뜻해졌어요.”
“내 재능이 쓸모 없다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응원해줘요”괜찮아 마을 청년들은 함께 생활하며 공동체적 삶을 알아간다. 같이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하고 밥을 먹는다. 일과를 이야기한다. “밥 먹었어요?” “오늘 어땠어요?” 날마다 작은 안부 인사도 잊지 않는다. ‘○○씨’ ‘○○님’이라 부르며 존댓말을 쓴다. 퇴사한 뒤 불안하고 막막한 시간을 보냈던 소연진(29)씨는 “여기 와서 다시 움직이고 싶어졌다” 한다. “‘밥 먹었니?’ ‘오늘 저녁에 뭐 할 거야?’ ‘어떤 고민이 있어?’라고 물어주는 친구들이 있어요. 이곳에는 일상의 사소함을 나누는 문화가 있어요. 그게 날 움직이게 한 것 같아요.”
이곳에서는 자유롭게 다양한 프로젝트를 벌이고 도와준다. 작은 성공에도 박수를 쳐주고 응원한다. 실패하면 안 되는 냉혹한 사회에서 상처를 받았던 소씨는 그 응원 덕분에 힘이 났다. “회사에서는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니까. 그렇다고 성과가 좋아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그다음에는 더 잘해야 하니 부담이 됐어요.” 소씨는 이곳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했다. “내 재능을 쓸모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여기 친구들은 날 응원해줘요. 나를 귀하게 여겨줘요. ‘연진 일 잘해’ ‘오, 해봐’라고 말해줘요.”
항상 평가받는 삶을 산 소씨는 자신을 향한 잣대에도 엄격했다. 매순간 고되고 힘들었다. “여기 와서 2주간 그냥 쉬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불안하고 도태되는 기분이었어요. 쉬는 걸 잘 못했어요. 그럴 때 이곳 마을의 다큐를 찍은 감독님이 제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괜찮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랬대요.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결과물을 내야 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거예요. 나란 사람으로, 그 존재만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아니니 그런 거죠.”
김종혁(31)씨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이곳에 왔다고 한다. “지난해 이맘때쯤 사기를 당하고, 작업실에서 쫓겨나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버틸 수 없는 마음 상태였어요. 삶이 산산조각 난 느낌이었죠.” 그런데다 김씨는 자신을 “총알받이 노릇 하는 군대 경비초소의 모래주머니”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시선이나 상처, 스트레스를 털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다 안고 있는 성격이에요.” 이곳에서 진행한 집단 상담프로그램에 참여해 동시대에 사는 또래 청춘들 모두 “힘들구나!”라고 느꼈단다. 사람에 상처를 받거나 취업 문제로 힘들어하고 회사에서 갑질에 시달린 이들이 있었다. 속은 곪았지만 다들 괜찮은 척 살아왔던 것이다.
김씨는 나도 괜찮아지고 다들 괜찮아질 수 있도록 마음을 치유하는 ‘세심사’(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는 ‘세신사’에서 따온 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목포에 있는 빈집을 빌려 그곳에 마음에 드는 글귀를 적는 필사방,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 그림방, 고민을 이야기하는 대화방으로 이루어진 ‘마음목욕탕’을 만들었다. 괜찮아 마을 청년들뿐 아니라 동네 주민들도 초대했다. “아픈 마음을 씻을 수 있었다” “힘든 나를 토닥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며 반응이 좋았다.
30명 중 21명이 목포에 남아김씨가 이곳에서 즐기는 놀이는 골목 산책이다. 바람을 느끼고 땅의 풀을 보면서 속도를 줄이고 걷는다. “허우적거리지 않고 바다에 내 몸을 맡기자라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있었어요. 힘을 빼고. 그렇게 푹 쉬고 나니 남들처럼 빠르게 헤엄치지 않아도, 빠르게 달리지 않아도 내 목표까지 내 속도로 알아서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좀 더디게 가도 괜찮겠다, 괜찮겠구나.”
김씨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의 추억도 쌓고 있다. 초·중학교 시절 왕따를 당한 김씨는 친구들과 힘을 합치며 어울린 기억이 없다. “야경 보러 가려고 차에 여럿이 낑겨 탄 게 제일 좋았어요. 전 너무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어요.”
10월 말에 6주 생활이 끝났지만 1기 청년 30명 중 21명이 목포에 남았다. 목포시 청년 창업지원 사업을 하거나 채식 식당을 열거나, 공장공장에서 인턴으로 일한다. 그중 노광민(34)씨는 ‘1호 취업생’이다. 섬에 관심이 많아 ‘섬남’이라고 불리던 그는 목포 섬발전지원센터에 취직했다. 연고지가 없는 목포에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됐다. 새로운 일을 배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두근두근”한다. “일도 일이지만 괜찮아 마을 친구들을 얻는 게 가장 좋았어요. 서울에서 마음을 닫고 살았는데 이곳에서는 허물없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노씨가 이곳에 정착하기로 한 건 함께 가는 괜찮아 마을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희영(27)씨는 이곳에서 채식 식당을 준비한다. 내년 봄 문을 열 예정이다. 괜찮아 마을 친구 3명과 동업한다. “목포 청년 창업지원 사업에 선정돼 이곳에 머물게 됐어요. 처음 왔을 때는 여기에 이렇게 오래 머물 줄 몰랐어요. 함께할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에요.”
11월에는 괜찮아 마을 2기 주민 30여 명이 새로 들어왔다. 11월27일 로라 건물에서 2기 주민이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는 ‘누구나 선생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독립작가로 활동하는 20대 ‘가랑비 메이커’(필명)는 ‘치유하는 글쓰기’를 맡았다. 그에게 목포는 우연히 왔지만 살고 싶은 곳이다. “목포 원도심이 쇠락한 죽은 동네라지만 내가 보기에는 골목골목 옛이야기가 많은 곳이에요. 그 역사를 읽어나가는 것이 재미있어요.” 그는 남은 4주 동안 “팍팍한 삶을 살며 경직된 마음을 풀고 모르는 사람들과 낯선 이곳에서 나를 발견하고” 싶단다.
괜찮아 마을 청년들을 영상으로 담는 김송미(30) 감독은 이 마을 청년들에게는 느슨한 허술함에서 풍기는 편안함과 따뜻함이 있단다. “괜찮아 마을 로고를 보면 이 마을의 특징을 알 수 있어요. 글자마다 받침이 하나씩 빠져 있어요. 그건 부족함을 말해요. 이곳에 온 청년들이 이 빈 공간을 채우는 거죠.”
자연 친화적이고 소박한 ‘킨포크 라이프’홍 대표는 “목포는 국도 1호선의 끝이지만 섬으로 향하는 시작점”이라고 했다. 이곳은 청년들에게 도시에서와는 다른 탈자본화된 삶과 새로운 상상을 실현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홍 대표는 이곳에서 자연 친화적이면서 소박한 생활을 하는 ‘킨포크 라이프’의 고장인 미국 포틀랜드 같은 마을을 만들고 싶단다. ‘경쟁에 치이고 친구도 경쟁자가 되는’ 도시의 구조에서 벗어나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잘 사는 그런 마을 말이다. 그렇게 그는 청년들과 괜찮아 마을 만들기 실험을 하고 있다. 그 시작의 길에서 그들은 서로를 토닥인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실패해도 괜찮아.
목포=글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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