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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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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당한 원전 지역 주민 건강

“갑상선암 발생 위험 2.5배 높지만

인과관계 입증 못한다”는 형식논리 안주
등록 2018-11-24 05:52 수정 2020-05-02 19:29
경북 경주 월성 원전 인접 지역 주민들이 11월19일 청와대 앞에서 이주대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경북 경주 월성 원전 인접 지역 주민들이 11월19일 청와대 앞에서 이주대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나는 (월성 원전) 914m 울타리에서 불과 300m 떨어진 곳에 살면서 갑상선암 환자가 됐고, 초등학교 다니는 손자는 몸속에서 삼중수소(인공 방사성 원소)가 검출됐다. 발전소 인접 지역이라는 이유로 매매가 이뤄지지 않아 이사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경북 경주 양남면에 있는 월성 원전 인접 지역 이주대책위원회 황분희 부위원장은 지난 1월 청와대에 청원글을 올려 이주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깨끗한 곳으로 이주시켜주세요”

지역사회는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논리로 원자력발전소(원전) 건설을 받아들였지만 주민들 삶의 만족도는 올라가지 않았다. 보상은커녕 갑상선암 같은 질병으로 수술받고, 삼중수소 등 각종 위험물질에 대한 불안을 견디지 못해 이주를 결심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다.

5년 전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최근에는 남편도 갑상선암 진단을 받은 황 부위원장도 이주를 원한다. 하지만 원전 주변이라는 이유로 집이 팔리지 않아 원전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사를 원하는 주민들은 정부가 원전 인근 주택을 사주길 원하지만, 정부는 “기준치 이하로 관리하기 때문에 이주 보상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설명만 되풀이한다.

황 부위원장은 과 한 통화에서 “월성 원전 1호기를 재가동하면서 나온 지원금은 지역사업으로 가고, 주민들에게 오지 않았다. 원전 인근 주민들을 깨끗한 곳으로 이주시켜주면 좋겠다”고 했다. 황 부위원장이 속한 이주대책위와 탈핵경주시민공동행동은 11월19일부터 청와대 앞 1인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우리 마을 사람들 소변에서 삼중수소가 검출되고, 갑상선암 소송이 진행되는 것을 보며 원전 주변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 40년 동안 핵발전 진흥을 위해 일방적으로 인근 주민이 희생됐다. 더 이상 주민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말라”고 외쳤다.

깨끗하고 값싼 전기 홍보에만 급급
월성 원전 인근 나아리 주민 김진선(72)씨가 이날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월성 원전 인근 나아리 주민 김진선(72)씨가 이날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값싸고 안정적인 전기 생산이라는 목표를 고수하는 정부에 원전의 안전을 묻는 것은 금기였다. 1978년 고리 원전을 가동한 뒤 정부는 원전 지역에 여러 지원금을 주면서도 주민의 건강 관리에는 소홀했다. 원전 지역 주민의 건강 지원을 언급하면 원전의 안전성 신화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2012년 7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을 상대로 가족의 암 발병과 장애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지금까지 2심 선고를 앞두고 있는 이진섭(55)씨는 “원전 홍보팀은 깨끗하고 값싼 전기를 홍보하는 데 급급했다. 지역주민의 건강은 아예 관심이 없었다. 1989년 뇌 없는 아기가 태어나고, 주변에서 암 환자가 속출하는데 정부는 계속 아무 문제가 없다고만 했다. 주민 건강과 원전 안전이 완벽하게 보장되지 않으면 원전을 운영해서는 안 되었다”고 말했다.

원전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건강에 대한 우려가 터져나온 것은,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터진 뒤였다. 정부도 주민의 합리적인 의심을 신화에 대한 불경죄로만 치부할 수 없었다.

서울대 의학연구원 안윤옥 교수팀이 정부 용역을 받아 1991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한 ‘원전 종사자 및 주변지역 주민 역학조사 연구’ 결과가 이때쯤 발표됐다. 연구 결과는 “원전 주변 지역 주민의 갑상선암 발생의 상대위험도가 원전과 거리가 먼 대조지역 주민의 2.5배로 나타났다”면서도 결론에서는 “원전과 암 발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없다”고 했다. 원전 주변 지역의 갑상선암 발병률이 높은 것은 맞지만 이것이 원전 때문인지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원전 안전성의 신화를 공고히 하는 순간이었다. 정부는 이 연구 결과를 끝으로 원전 주민의 건강 조사를 중단했다. 이후 원전 지역 주민의 건강 피해를 입증하는 책임은 오롯이 주민 개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주민 개인에게 미뤄진 입증 책임

한수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이씨가 6년 넘도록 법원을 드나들며 분투하고 있는 이유다. 2014년 10월 부산지법은 “박씨는 원전 6기가 있는 부산 기장군의 고리 원전에서부터 7.6㎞가량 떨어진 곳에서 20년가량 살면서 고리 원전에서 나오는 방사선에 장기간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 한수원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며 한수원에 “위자료 1500만원을 지급하라”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고리 원전에서 나오는 방사선량이 원자력안전법에 규정한 연간 유효선량한도(0.25mSv~1mSv·밀리시버트)에 미치지 못하지만 방사선 연간 유효선량은 국민 건강의 최소한도 기준이다. 국민의 건강은 재산상 이익보다 중요하고 공공의 필요에 의해 희생되면 안 된다”며 이씨의 아내 박금선(52)씨가 앓은 갑상선암에 원전의 책임을 일부 인정했다. 이는 원전 지역 주민의 건강에 대한 책임을 처음 인정한 재판으로 주목받았다.

한수원은 갑상선암과 원전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고 했던 기존 연구 결과를 언급하며 즉각 항소했다. 이씨도 “갑상선암과 원전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입증하겠다”며 잇따라 항소장을 냈다. 2015년 서울대 보건대학원의 백도명 교수는 앞서 진행된 역학조사 결과를 다시 분석해 “인과관계가 없다”는 기존 결과를 뒤집었다. 백 교수는 원전 노출 외에는 박씨의 갑상선암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과거 연구에선 기존 암 환자가 연구 대상에서 빠지는 등의 문제점도 발견됐다. 이는 박씨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는 데 힘이 됐다.

12월12일 항소심 선고를 앞둔 이씨는 “원전(유치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사회간접자본(SOC)이 아닌 지역주민의 건강과 안전에 가장 많은 돈을 써야 했다. 갑상선암과 원전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되면 정부가 수술비와 피해보상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한발 늦은 ‘전수조사’ 만시지탄

이렇게 연구 결과가 엇갈리고, 민사소송이 잇따르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자 정부는 원전 인근 주민 전부를 대상으로 ‘방사선 건강영향평가’를 하기로 했다.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지난 3월 발표한 계획을 보면 2020년부터 원전 주변 5㎞ 이내에 사는 주민 11만 명을 전수조사하기로 했다.

“정부가 (전수 건강영향평가를) 일찍 했어야 했다. 평가를 통해 문제가 드러나면 원전 반대 여론이 커질 것을 우려한 게 아닌지 의심하는 이유다. 조사에서 인과관계가 드러나면 원전 주변 갑상선암 환자의 치료는 정부가 책임을 지거나 제대로 보상하는 등 조처를 해야 한다.”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의 말이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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