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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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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만날 가장 뜨거운 공간이 열렸다

365일 24시간 접촉의 거점, 공동연락사무소
등록 2018-09-22 17:27 수정 2020-05-03 04:29
‘24시간, 365일 소통 시대가 열렸다.’ 지난 9월14일 북녘땅 개성에서 열린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식에서 참석자들이 제막식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4시간, 365일 소통 시대가 열렸다.’ 지난 9월14일 북녘땅 개성에서 열린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식에서 참석자들이 제막식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며칠 전인 9월14일, 개성공단에 갔다. 이날 문을 연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개성공단 한가운데에 있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공단 입구로 들어서자, 낯익은 간판들이 들어온다. 의류봉제 업체인 신원과 만선, 그리고 멀리 보이는 익숙한 간판들. 기업인들이 겪은 눈물의 세월이 떠올랐다.

개성공단의 문을 닫은 지 2년7개월이 지났지만, 겉모습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다만 길가의 축구장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수줍게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잡초 속 꽃처럼, 공동연락사무소는 시간이 정지된 공단에서 살아 움직인다. 작은 점이 움직여서 얼음 속에 갇힌 공단을 녹였으면 좋겠다. 평양에서 열린 정상회담은 그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정부와 정부, 민간과 민간의 교류가 이어지리라. 그러면 공동연락사무소는 어쩌면 한반도에서 가장 뜨거운 공간이 되리라.

<font size="4"><font color="#008ABD">공동연락사무소의 의미</font></font>
‘조건이 마련되는 데 따라 우선 정상화한다.’ 남과 북은 평양 정상회담을 통해 2016년 2월 박근혜 정부가 전격 폐쇄한 개성공단 재가동의 신호탄을 쐈다. 사진공동취재단

‘조건이 마련되는 데 따라 우선 정상화한다.’ 남과 북은 평양 정상회담을 통해 2016년 2월 박근혜 정부가 전격 폐쇄한 개성공단 재가동의 신호탄을 쐈다. 사진공동취재단

공동연락사무소는 365일 24시간 상시적 대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남과 북의 공무원들이 같은 공간에서 일한다. 2005년 개성공단의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를 가본 적이 있다. 층을 달리해서 남과 북의 공무원들이 근무했지만 계단에서 만나고, 인쇄용지를 빌리러 가고, 차를 함께 마시며 그야말로 일상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2008년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남북 공무원의 동거는 이어지지 못했다.

공동연락사무소의 업무는 경제협력협의사무소와 비슷할 수 있다. 그러나 제도의 의미는 훨씬 다르다. 연락사무소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적대적 관계의 국가가 정상적 외교관계를 맺기 전의 잠정적 조처일 수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혹은 미국과 베트남 사이에 정식 수교를 맺기 전에 연락사무소를 교환했다. 분단국 사이에는 상대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에 대사관이 아니라 대표부를 둔다. 서독과 동독은 1972년 기본 조약을 체결하고 상주 대표부를 각각 동베를린과 본에 설치했다.

남북관계에서 연락사무소는 상주 대표부로 가는 과도기적 형태다. 동·서독처럼 상대의 수도에 상주 대표부를 교환하자는 제안은 오래되었다. 물론 공동연락사무소를 장기적으로 운영하자는 의견도 있다. 서울과 평양에 상주 대표부를 두면, 역할의 불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독의 경우도 본의 동독 대표부는 거의 역할을 못했고, 동베를린의 서독 대표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락사무소 앞에 붙은 ‘공동’이라는 말의 의미가 중요하다. 공동연락사무소는 초보적이지만 공동체의 제도적 형태다. 정치·경제·문화라는 말을 공동체 앞에 붙일 수 있지만, 이제 남북관계는 공동체의 제도화 단계로 진입했다. 정상회담이 정례화되고 군사공동위원회를 비롯한 분야별 공동위원회가 상설화되면, 남과 북은 남북연합 시대를 열 수 있다. 그래서 공동연락사무소는 남북연합으로 가는 중요한 출발이다.

평양 정상회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합의는 교류와 협력이다. 정상회담 이후 지방정부의 도시 교류와 각계의 분야별 교류가 활성화될 것이다. 공동연락사무소의 중계 역할이 중요해졌다. 과거에는 교류를 하고 싶어도 누구를 만날지 알 수 없었고 연결 자체가 어려웠다. 중국에서 실무 협의를 하면 비용도 적지 않게 들어갔다.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공동연락사무소가 지방정부와 민간의 교류를 이어줄 것이다. 공동연락사무소는 일단 남과 북, 각 30여 명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관계가 진전되면 더욱 확대될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제재 상황에서도 교류 가능</font></font>

제재 상황에서 과연 교류가 가능할까? 현재의 제재에서도 할 수 있는 교류가 적지 않다. 우선 ‘인도적 면제’라는 개념이 있다. 국제사회가 제재를 할 때, 인도적 현안은 제재 대상이 아니다. 미국은 앞으로 한국전쟁 때 사망한 미군의 유해 발굴 작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장비가 들어가고 돈이 들어간다. 제재가 면제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남북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핵심적인 인도적 현안은 이산가족 문제다. 남북 정상은 전쟁이 없는, 전쟁이 일어날 수 없는 ‘사실상의 종전’을 추구하기로 합의했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할 때가 왔다. 우선적으로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상봉을 기다리는 이산가족 중에서 80대 이상이 62%다. 끝내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분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산가족 만남은 제재 대상이 아니다. 국제사회의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기 어려운 분단과 전쟁의 상처다.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1세대가 사라지면, 핏줄의 연결도 희미해질 것이다. 그야말로 주어진 시간 내에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상봉을 기다리는 모든 분을 대상으로 생사 확인을 하고, 이산가족 만남의 장소를 확대하고, 만남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65년 전에 끝나야 했던 전쟁을 이제는 끝낼 때가 왔다. 남북 정상은 이번 회담에서 ‘사실상의 종전’을 합의했다. 군사적 신뢰 구축은 제재 대상이 아니다.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해 할 일이 많다. 한국전쟁의 격전지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수습하고, 필요하다면 기억의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 참혹했던 전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강원도 철원의 비무장지대 한가운데 궁예 성터가 있다. 남과 북의 고고학자들이 공동 발굴을 하고 역사문화 공간으로 조성하자. 환경 생태적으로 공동 조사를 해 보존할 지역도 있고, 산림이나 농업 분야에서 협력할 공간도 있다.

체육을 비롯한 사회문화 교류도 제재 대상이 아니다. 남과 북의 공동 개최를 추진하는 국제 체육 행사도 적지 않다. 남북 정상은 2032년 서울과 평양의 공동 올림픽을 준비하고, 2021년 평창과 마식령의 겨울 아시안게임 공동 개최도 추진하기로 했다. 물론 문화교류는 더 많아져야 한다. 특히 지방정부의 교류협력은 민간 교류의 활성화와 연결되어 있다.

경제협력 분야는 제재가 완화돼야 가능하다.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과정이듯, 제재 완화도 과정이다. 이제는 유엔의 제재 결의안 내용 중 하나인 “북한의 행동에 따라 제재를 강화하거나 완화하거나 폐기, 중단할 수 있다”는 조항을 이행할 때가 왔다. 북한은 2018년 들어 상황 악화 조처를 중단했고, 자발적인 비핵화 조처에 착수했으며, 상응 조처에 따라 더욱 과감한 비핵화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제는 제재 완화를 논의할 때다. 미국의 제재도 관계 정상화에 따라 단계적으로 완화해야 한다. 비핵화를 위해서는 관계 정상화에 나서야 하는데, 외교관계와 경제관계를 구분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남북 경제협력은 제재 완화에 따라 단계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양자협력과 더불어 다자협력을 추진하고, 북한 경제의 변화를 고려해 시장친화적 협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교통·물류 등 인프라 개선도 동시에 진행하고, 지금부터라도 경제협력의 제도적 수준을 보완해야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접촉이 통일이다</font></font>

동·서독의 상주 대표부는 접촉의 다리였다. 1987년 550만 명의 서독인이 동독을 방문했고, 500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을 방문했다. 양 독일 간에 약 50건의 도시 간 자매결연이 이루어졌다. 1988년에 8천만 통의 편지와 2400만 개의 소포가 서독에서 동독으로, 그리고 9500만 통의 편지와 900만 개의 소포가 동독에서 서독으로 보내졌다. 그래서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동독인과 서독인은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고 외칠 수 있었다.

분단 70년이 흘렀다. 헤어진 가족들이 오갈 수도 없고, 전화도 편지도 보낼 수 없던 세월이었다. 과연 접촉하지 않고, 통일을 할 수 있을까? 통일은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다. 접촉을 해야 차이를 알 수 있고, 공존하는 법을 체득할 수 있다. 공동연락사무소가 접촉의 다리를 이어주기를 바란다. 헤어진 가족들이 만나고, 지방정부가 도시 교류를 하고, 체육과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고, 통일의 미래 세대인 청년과 학생이 더 많이 더 자주 만나기를 바란다.

일주일 전 개성에서 나오면서 차창 밖의 비무장지대를 보았다.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각각 2㎞, 전체 4㎞의 공간은 결코 좁지 않았다.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처럼 모든 적대 행위가 중단되고, 비무장지대의 비무장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대결의 땅이 평화의 땅으로 바뀌면 분단의 상처도 아물고 북핵 문제도 해결되리라. 접촉의 거점인 공동연락사무소가 새로운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기를 바란다.

김연철 통일연구원 원장 doota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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