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9일 6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김이수 헌법재판관도 ‘위대한 반대자’라고 한다. 그는 2014년 12월 정당해산심판 사건에서 홀로 통합진보당 해산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그의 소수의견은 ‘정치사상과 국제관계를 망라한 역작’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한 마리의 제비로서는 능히 당장에 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그가 전한 봄, 젊은 봄은 오고야 마는 법. 소수의견을 감히 지키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 민문기 대법관은 1977년 소액사건의 상고 범위를 다투는 사건에서 홀로(15 대 1) 소수의견을 내면서 이렇게 썼다. ‘김이수’가 전한 봄소식이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는 시대는 과연 올 것인가.</font>
2018년 8월30일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30년 역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날이었다. 헌재는 이날 ‘양승태 대법원’의 ‘과거사 역주행 판결’을 바로잡았다. 201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정부 보상금을 받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는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나더라도 국가에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다’고 한 판결과, 2013년 대법원1부가 과거사 사건의 국가배상청구권 소멸시효를 6개월로 제한한 판결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두 대법 판결은 법조계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위한 판결’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과거사 사건이 대부분 그의 아버지인 박정희 정권 때 벌어졌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최고 권력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라는 사법부의 소명을 외면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런 맥락에서 헌재 결정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위한 대체복무제 도입 결정과 함께 사법부의 소명에 충실한 결정으로 기록될 만했다. 이를 의식한 듯 이날 헌법재판관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하지만 김이수 헌법재판관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양승태 대법원의 과거사 역주행의 하이라이트인 긴급조치 관련 판결을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마지막 소수의견 </font></font>대법원은 2015년 3월 “긴급조치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 행위로서 국민 개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로,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헌재는 이 판결의 위헌 여부를 가려달라는 재판에서 ‘재판소원’(헌재에서 대법 판결을 취소하는 것)을 금지한 헌법재판소법을 근거로 재판관 7 대 2로 기각 결정을 내렸다.
김 재판관은 ‘미스터 소수의견’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소수의견(반대의견)을 냈다. 그는 “(대법 판결은) 2010년 헌재가 긴급조치 위헌 결정을 내린 취지를 어기고 국민 기본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취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의견에 안창호 재판관이 가담했다. 김 재판관은 ‘대법원이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헌재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다른 재판관들을 설득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의견은 9월 중순에 퇴임하는 김 재판관의 마지막 소수의견으로 남게 됐다. 그는 헌재 5기 재판부에서 주목받는 소수의견을 가장 많이 낸 재판관으로 꼽힌다. 혼자서 낸 소수의견만 8건에 이른다. 탄탄한 법리로 구성된 그의 소수의견은 다수의견 못지않게 설득력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4년 12월19일 헌재가 재판관 8 대 1로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한 정당해산심판 사건이 대표적이다. 김 재판관은 8명의 재판관에 맞서 단독으로 통진당 해산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그는 “강제적 정당해산은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당의 자유 및 정치적 결사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제약이다. 사상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소수자들의 정치적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킬 수 있다. 사회의 진정한 통합과 안정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준다”고 밝혔다.
그는 박근혜 정부의 정당해산심판 청구를 기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오랜 세월 피땀 흘려 어렵게 성취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성과를 훼손하지 않고, 헌정질서에 대한 의연한 신뢰를 천명하고, 헌법 정신의 본질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총 350여 쪽에 이르는 결정문 중 그가 낸 반대의견은 무려 180쪽이나 됐다. 그는 논리적 정합성을 높이기 위해 통진당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자세히 썼다. 진보정당의 역사가 담겼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내용이었다. 그의 소수의견에 “논리와 소신과 용기가 빛나는 작품, 위대한 반대자의 탄생”(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의 평가가 학계와 법조계에서 쏟아졌다.
그러나 소수의견을 쓴다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다. 역경을 헤쳐나가고 고독과 싸워야 한다. 그는 정당해산재판이 진행된 2014년 한 해 동안 외롭고 쓸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무엇보다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동료 재판관이 없다는 게 힘들었다. 마치 고립된 섬에서 지내는 것 같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소수의견은 고독과의 싸움 </font></font>헌재 관계자들에 따르면 재판 초기만 해도 통진당 해산이 압도적으로 결정될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국회의원 5명과 당원 5만여 명을 보유한 공당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것은 민주정부에서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법조계 일각에선 박근혜 정부가 통진당 해산심판을 청구한 것은 박 대통령과 이정희 통진당 대표의 악연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었다. 이 대표는 2012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까지 거론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2014년 6월부터 시작된 증인신문이 헌재의 분위기를 바꿨다. 누구보다 옛 주사파 운동권의 핵심 인물이던 김영환씨의 증언은 보수 성향 재판관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주요 증인신문이 마무리된 10월부터는 재판관들의 구도가 8 대 1로 굳어졌다고 한다.
김 재판관은 극도의 고립감에 시달렸다. 혼자서 8명의 ‘집단지성’을 상대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부담이 컸다. 하루 3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피로가 쌓이면서 신경도 날카로워졌다. 조용한 성품으로 알려진 그가 평의 때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았다. 헌재 안에서 ‘버럭 김이수’라는 우스갯말이 돌기 시작했다.
동료 재판관이 그를 노골적으로 비하한 일도 있었다. 10월 말께 작성된 통진당 해산청구 인용 결정문 초안에 “레닌이 말하는 ‘쓸모 있는 바보들’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쓸모 있는 바보들’은 러시아혁명 때 볼셰비키(레닌을 지지한 급진파)에 협조한 러시아의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 등을 조롱한 말이다. 통진당 해산에 반대하는 쪽을 “통진당의 실체를 간파하지 못하고 번드르르한 말에 속아 정당해산에 반대하는 어리석은 집단”으로 묘사한 구절이었다. 김 재판관은 어느 날 새벽 인용문 초안을 읽다가 문득 이 구절이 자신을 지칭한다는 의심이 들었다. 초안을 집필한 재판관에게 넌지시 물었으나 그 재판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 구절은 결정문이 몇 차례 수정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아 보충의견에 그대로 담겼다.
반대의견 집필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작업이었다. 당시 이석기 의원 관련 사건으로 통진당에 대한 여론은 악화될 대로 악화돼 있었다. 통진당 해산 반대의견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있으면 보수언론들이 가만있지 않을 게 불 보듯 뻔했다. 자칫 그동안 쌓아왔던 그의 평판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문구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다수의견 집필은 주심인 이정미 재판관 말고도 2명의 재판관이 가세했다. 법원에서 파견된 부장판사도 다수의견 집필 작업을 지원했다. 하지만 김 재판관은 동료 재판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상대적으로 재판 경험이 적은 젊은 재판연구관들의 도움을 받아 반대의견 집필을 해나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헌재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다</font></font>박한철 헌재소장은 그해 국회 국정감사 때 의원들에게 말한 ‘연내(2014년) 선고 방침’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박 소장은 재판관들의 사무실에 침대까지 들여놓았다. 선고일이 다가올수록 재판관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결정문은 수정 작업을 반복했는데도 투박하고 거친 표현이 남아 있었다. 그때 한 재판관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인용의견은 진보 진영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고, 기각의견은 보수 진영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에 재판관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선고 이후 다수의견은 진보 진영의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김 재판관의 소수의견은 보수 진영으로부터 별다른 공격을 받지 않았다. 정당해산에 찬성하는 쪽에서도 ‘김 재판관의 반대의견 덕분에 정당해산 결정문이 완결성을 갖추게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선고가 끝난 뒤 몇몇 재판연구관은 김 재판관의 방을 찾아와 “재판관님 덕분에 헌재가 살게 됐다”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그의 “1년 동안 마음고생이 한순간에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정당해산 사건은 그를 ‘위대한 반대자’ 반열에 오르게 했지만, 그에게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헌재소장으로 지명됐지만 야 3당의 강한 반대로 국회 임명 동의를 받지 못한 것이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보수 성향의 야당 의원들은 “통진당 해산을 반대한 재판관은 대한민국의 헌재소장이 될 자격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고법원의 소수의견은 단순히 ‘소수의 의견’에 그치지 않는다. 해당 재판 결과에는 당장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하급심 판사들에게 폭넓은 법리 해석의 기반을 제공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일선 법원의 판사들이 최고법원의 판례(다수의견)에서 벗어나 새로운 법리 해석을 하도록 유인한다. 하급심 판사들이 판례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판례 변경을 시도해야 사법부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헌법기관이 될 수 있다.
또한 소수의견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수의견만 강요되는 사회는 획일적이고 다양성이 떨어져서 독재와 파시즘이 쉽게 자리잡는다. 결국 소수의견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인 셈이다. 김 재판관은 지난해 헌재소장 인사청문회에서 “민주주의 정신과 헌법 정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서 소수의견을 내왔다”고 말했다.
김 재판관은 소수의견을 내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과거의 소수의견을 다수의견으로 만드는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지난 6월28일 병역거부를 위한 대체복무제 규정이 없는 병역법 조항에 대한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은 그의 끈질긴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은 앞서 2004년과 2011년 헌재에서 잇따라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헌재의 합헌 결정 뒤에도 일선 법원에서 무죄판결이 잇따라 선고되면서 헌재에 다시 위헌 판단을 구하는 사건들이 접수됐다.
김 재판관은 2012년 9월 헌재에 입성하기 전부터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2011년 이강국 당시 헌재소장이 낸 소수의견에 크게 공감했다. 이 전 헌재소장은 “진지한 양심의 결정에 따라 병역의무를 거부한 이들에게 국가의 가장 강력한 제재 수단인 형벌을 가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며 “국가는 모든 기본권의 가치를 존중하고 이를 보장해야 할 헌법적 의무를 지고 있다”고 역설했다. 김 재판관은 이 의견이 다수의견이 되는 것이 사법부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이는 길이라 생각했다. 다행히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이 배당돼 그가 주도적으로 재판 일정을 조정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북한의 잇따른 핵실험으로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사회 전체가 안보 불안감에 시달렸다. 헌재도 이런 분위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김 재판관은 2016년 7월 첫 평의를 해본 뒤 곧바로 재판을 중단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기존 합헌 결정과 똑같은 결론이 내려질 게 뻔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2011년 재판 때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 합헌 의견을 냈던 박한철 헌재소장과 이정미 재판관이 퇴임한 뒤 이선애·유남석 재판관이 합류한 뒤부터다. 두 신임 재판관이 위헌 의견에 가담하면서 위헌 정족수인 6명에 단 한 명이 모자랐다(이진성 헌재소장과 강일원 재판관은 이미 위헌 의견이었다). 김 재판관은 서기석 재판관을 주목했다. 서 재판관은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조항을 위헌으로 판단하지 말고, 대체복무제를 병역의 종류로 규정하지 않은 조항을 헌법불합치로 판단하자고 제안했다. 강일원 재판관도 이 제안에 동의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다수의견이 될 때까지</font></font>서 재판관의 견해를 따르려면 애초 다수의견으로 구성했던 처벌 조항 위헌 의견을 보충의견으로 돌려야 했다. 김 재판관은 서 재판관의 견해에 흔쾌히 따랐다. 결과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 재판관은 사석에서 만난 기자들에게 “김 재판관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구제하기 위해 오랜 기간 애를 썼다”고 말했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은 정당해산 사건과 함께 김 재판관이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사건이다. 김 재판관은 최근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헌법재판관으로서 법복을 벗게 된 것을 감사하게 여긴다”는 말을 자주 한다. 지난해 헌재소장에서 낙마했을 때는 자신을 위로하려는 지인들에게 “재판관 일은 계속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웃어넘겼다.
그러나 김 재판관에게도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으로 남은, 후회되는 순간이 있었다. 38년 전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 일어난 광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김 재판관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 재판부에 소속된 군판사였다. 그는 1979년 12월 법무관으로 입대한 뒤 이듬해 광주에 주둔한 31사단에 배치됐다. 당시 광주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지휘하는 신군부는 서울 지역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1980년 5월15일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 것을 계기로 민주화 시위의 열기가 한풀 꺾이자,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광주에 공수부대로 구성된 계엄군을 배치했다. 광주만 제압하면 곧바로 정권을 찬탈할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은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렀다. 시민들의 생사를 초월한 저항은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10일 만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김 재판관은 5·18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을 재판하는 제4재판부에 배치됐다. 당시 계엄 재판부는 재야인사를 전담한 1부, 학생지도부를 담당한 2부, 도청 항쟁 관련자를 집중 심리한 3부, 그리고 김 재판관이 소속된 4부를 포함해 모두 4개 재판부가 있었다. 각 재판부는 5명으로 구성됐는데 비법조인인 군 고위직이 재판장을 맡았다. 군판사였던 김 재판관은 법정에서 피고인과 증인 신문을 전담했다. 당시 중위 계급에 불과했던 그가 판결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더욱이 5·18 관련자의 최종 형량은 4개 재판부가 조율해서 결정하는 구조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계엄 법복을 입어야 했던 ‘광주 사람’ </font></font>그럼에도 김 재판관에게 계엄 재판부 경력은 “평생 잊지 못할 괴로움”으로 남았다. 광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로서는(전북 고창 태생인 그는 광주서중과 전남고를 나왔다) 결과적으로 ‘고향 사람들’을 처벌한 셈이 됐기 때문이다. 당시 법정에는 동창을 비롯한 지인들이 적잖게 끌려왔다. 그들로부터 자신을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그는 당시 고향 사람들을 재판해야 하는 상황이 몹시 힘들고 괴로웠다. 누구보다 광주 시민의 정서를 잘 아는 처지라서 더욱 그랬다.
김 재판관은 서울법대 1학년 때인 1972년 중앙정보부 광주지부에 끌려간 적이 있다. 연인 사이인 광주 출신의 이화여대 학생에게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가 계엄 당국의 서신 검열에 걸린 것이다. 다행히 보수 성향의 개신교 목사로 광주 지역사회 유지였던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신원보증을 서서 무사히 훈방됐다(김 재판관은 사업연수원을 수료한 1979년 2월 이 여자친구와 결혼했다). 2년 뒤에는 당시 운동권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감방생활’을 경험했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수배된 모교(광주서중) 선배를 서울 집에서 하룻밤 재워준 것이 문제가 돼 광주 대공분실로 끌려가 60여 일 동안 구금되기도 했다.
이런 ‘배경’을 가진 그가 신군부에 맞선 광주 시민들에게 동병상련을 느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군인 신분인 그가 광주 시민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더구나 계엄이 발령된 엄중한 상황이었다. 그는 군판사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군판사의 본분에 충실한 대가는 컸다. 그는 헌재소장 청문회 때 이때의 행적이 문제가 돼 곤욕을 치렀다. 대표적 사건이 ‘버스 운전기사’ 배용주씨 사건이었다. 배씨는 5·18 초기인 1980년 5월20일 시민들의 도청 진입을 막기 위해 저지선을 구축하던 경찰관 4명을 버스로 치어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배씨는 법정에서 “살인 의도가 없는 우발적 사고”라고 주장했지만, 김 재판관이 소속된 4재판부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다행히 배씨는 1982년 사면돼 풀려났다. 배씨는 1997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재심을 청구했고, 이듬해 특별재심 사유로 인정돼 열린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이 사건은 김 재판관의 헌재소장 청문회에서 큰 이슈가 됐다. 보수 야당으로선 진보 진영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김 재판관이 5·18 당시 계엄 재판부에서 활동했다는 것 자체가 좋은 ‘먹잇감’이었다. 김 재판관은 당시 판결에 대해 사과할 용의가 있는지 질문을 받고 “사과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짐을 지고 있다고 말씀드린다”면서 “그 엄중한 상황에서 그런 판단을 하지 못했던 것은 지금 와서 생각을 하면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5·18, 끝날 수 없는 속죄</font></font>5·18기념재단을 비롯한 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는 이 문제가 논란이 되자 “헌법재판소장직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의 사안으로 판단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양래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김 후보자는 당시 육군 중위로, 계엄하에 군사재판에서 할 수 있는 역할 자체가 너무 제한돼 있었다. 그가 당시 (행사)할 수 있었던 재량권 자체가 크지 않았다는 게 재판을 받았던 사람들의 증언”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김 재판관의 ‘계엄 재판부 행적’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법관이 법에만 매몰돼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면 역사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는 사석에서 만난 기자에게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다른 판단을 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가에 촉촉한 이슬이 맺혔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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