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뭐 괜찮은 편이네요. 그 정도는 버텨야죠.”
김정원 하사는 2010년 천안함 폭침을 겪고 몇 달 뒤 군 병원을 들렀다 군의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폭침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생겨 자살 충동까지 느끼는데, 군의관은 그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군 내부에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치료를 제대로 받기 힘들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언이다. 다른 군의관에게서는 심지어 “(겉보기에) 아픈 데도 없는데 왜 왔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뿐이 아니다. 군의 인사장교는 폭침 뒤 불과 6개월 만에 김정원 하사를 다시 배에 태우려 했다. 이미 전역할 작정이었기에 싸우고 버텼다. 또 군에서 교육받던 중 교육사령관에게 “나약하고 방심한 정신 상태로는 천안함처럼 당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현재는 민간인인 김정원(29)씨가 겪은 일들은 군이 천안함 생존 장병을 어떻게 대했는지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군 내부는 밖보다 더 지옥이었다.
천안함 출신이란 이유로 따돌림과 ,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 교수팀(김승섭·윤재홍)이 최근 진행한 ‘천안함 생존자의 사회적 경험과 건강 실태 조사’(천안함 조사, 전역자 24명 응답)에서 나온 결과도 이와 비슷했다. 천안함 생존자 대부분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고생했고, 이들은 군 내부에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패잔병이라는 말을 들었다. 천안함 출신이란 이유로 따돌림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2010년 3월26일 밤. 정원씨는 당직근무를 마치고 함수(배 앞쪽)에 있는 침실에서 책을 읽다가 배가 출출해 컵라면을 먹으려고 꺼내들었다. 문을 나서 함미(배 뒤쪽)에 있는 식당으로 향하는 복도에 섰는데, 그날따라 길이 몹시 어두웠다. 귀찮아서 컵라면을 도로 들고 들어와 침실에서 육포를 뜯었다. 하나를 입에 물었는데 ‘쾅’ 소리가 났다. “육포 대신 컵라면을 택했으면 여기 없었겠죠.” 상대적으로 무거운 함미는 두 동강 난 뒤 곧바로 가라앉았다.
‘깔깔이’(군용 방한복)와 체육복 차림으로 바깥에 나왔다. 그날따라 날씨가 몹시 추웠다. “정신이 멍한 상태라 추위가 느껴지진 않았는데 몸이 덜덜 떨렸어요. 주변에 기다리고 있던 북한군이 나타나 총을 쏠까봐 걱정되더라고요. 저 바다에 빠지면 춥고 고통스럽게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국군수도병원에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 판정을 받았다. 생존 장병 대부분은 보름간 입원하고 퇴원했는데, 정원씨는 보름을 더 있었다. 군의관은 그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중에서도 고위험군이라고 했다.
지속적인 치료와 관찰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사실상 방치됐다. 2010년 6월, 생존자들이 새로 발령받아 각자 부대로 뿔뿔이 흩어지자 정원씨의 상태가 급속히 악화됐다. 대인기피증이 왔다. “제가 웃으면 ‘저 새끼는 살아남아서 웃는구나’, 제가 우울하거나 울면 ‘저 새끼 슬픈 척하는 거 봐’,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사람을 못 만났어요. 친구조차도.”
그때부터 2011년까지 내내 힘들었다. 특히 악몽이 괴로웠다. “배에서 통로를 걸어가는데 종이가방에 옷걸이가 엉켜 있어요. 하나 딱 들었는데 이름표가 달려 있는 거야. 근데 엉켜서 몇 개가 안 나와. 그러다 깼어요. 깨고 든 생각이, 꺼낸 애들은 살아 있는 애들, 못 꺼낸 애들은 죽은 애들. 거기서 되게 울었어요. 내가 어떻게든 잡아 꺼냈어야 하는데….”
악몽 꾸면 그냥 약 먹자는 군의관그는 중학교 친구이자 후임인 박성균 중사(당시 하사)를 잡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았다. 폭침 20분 전 이야기를 나누다 박 중사가 순찰당직을 떠났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내가 10분, 20분만 더 잡았어도 걔를 살릴 수 있었는데, 그때 왜 그랬을까. 그때 잡았어야 하는데. 저는 살아남은 죄책감이 큽니다.”
삶을 마칠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 “방에서 문 잠그고 혼자 술 마시고 울다가 딱 든 생각이,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가야겠다. 칼 들고 와서 손목에 대고 그으려고 했는데, 죽으려고 했는데, 먼저 간 대원들께 미안하고 저희 함장님께 죄송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버틴 거죠.”
군에서 정신과 진료를 받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우선 거리가 멀었다. 정신과 전문의를 만나려면 국군수도병원(경기도 성남 소재) 등 다른 도시로 가야 했다. 정원씨가 근무하던 경남 진해에서 아침에 출발해 버스와 택시를 몇 차례 갈아타고 다녀오면 밤이었다. 한번 가보곤 포기했다. ‘천안함 조사’ 결과에서도 “폭침 뒤 군에서 정신과 진료나 검사를 받아볼 필요가 있었는데 받지 못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고 답한 사람이 24명 중 19명(79.1%)에 이르렀다.
막상 만나더라도 군의관들은 그의 상태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일반 외상 있는 병처럼 대하더라고요. ‘잘 자냐? 왜 못 자냐?’ 꿈에 나온다고 하면 ‘약 먹자’고 해요. 왜 힘든지, 왜 죄책감이 드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그냥 무조건 약 먹자고. 그래서 병원도 안 가고 혼자 참았어요. 정 힘들면 술로 해결하고.” ‘천안함 조사’에선 “군 복무 중 군의관(정신과 전문의)의 진료가 효과 없었다”고 답한 사람이 24명 중 20명(83.3%)이었다. “군의관으로부터 본인의 고통을 무시하는 발언을 들은 적 있다”고 답한 사람도 13명(54.1%)이나 됐다.
군 내부에 외상후스트레스장애 개념이 없는 건 이뿐이 아니다. 폭침 뒤 정원씨가 육상 근무를 자원해 군종실 행정장으로 근무한 지 3개월 만인 2010년 추석, 인사담당 장교에게 연락이 왔다. “김정원 하사, 배 탈 생각 없나.” “없습니다. 저 여기서 전역할 겁니다.” 하사가 당돌하게 중위의 지시를 거절했다. 그렇게 버틴 끝에 2년6개월을 그 자리에 있었다. “저야 전역할 놈이라 막 나갔던 거고, 계속 군 생활 하는 분들은 그렇게 못해요. 군에서는 배를 타야 진급점수를 채울 수 있어요.” 정원씨는 지금도 두려움 때문에 배를 타지 못한다.
힘들어해봤자 돌아오는 건 손가락질뿐제대를 결심한 데는 박경수 중사의 영향이 컸다. 박 중사는 제2연평해전을 겪은 뒤 다시 천안함을 탔다. 정원씨는 천안함을 타던 때 그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박 중사(당시 선임하사)가 물었다.
“꿈이 뭐냐.” “준위(부사관의 한 계급) 다는 겁니다.” “너는 군 생활이 꿈이냐.” “그건 아니고 원래 수의사가 꿈이었습니다.” “근데 왜 왔냐.” “먹고살 게 없을 거 같아 왔습니다. 선임하사님은 꿈이 뭡니까.” “군인은 아니었는데, 근데 살다보니까…, 군인이 되게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산다. 너는 해보고 안 되면 꼭 하고 싶은 거 해라.”
짧은 대화였다. 박 중사는 천안함 폭침 뒤 실종돼 주검도 수습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도 배 타기 싫었겠죠. 연평해전 경험이 있으니. 근데 가족도 있고 하니 배를 탔겠죠. 하고 싶은 거 하라는 그분 이야기가 생각나서…, 군 생활 계속하면 후회할 거 같더라고요.”
정원씨는 2012년 12월, 4년 만기로 제대했다. 직업군인을 포기하고 연장복무를 신청하지 않았다. 인생 계획이 많이 틀어져 25살에 대학교 1학년으로 입학했다. 2016년 취업해 경북 김천의 한 식육가공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사라지지 않았다. 힘들어지는 주기가 길어진 대신, 한번 찾아올 때 그 강도가 커졌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요, 저희는 괜찮아진 게 아닙니다. 괜찮은 척을 잘하게 된 거예요. 남들 앞에서 힘들어해봤자 어차피 손가락질밖에 안 하니까, 먹고살라니까.”
2017년 8월 국가유공자를 신청했다. 다른 천안함 생존자들이 줄줄이 탈락하는 걸 봐온 터라 큰 기대는 없다. 사고 직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 고위험군 진단을 받은 바 있지만, 추가로 꾸준히 진료기록을 축적했다면 도움이 됐을 터다. 하지만 군의관한테 실망해서 진료를 거의 받지 않았다. 제대한 뒤에는 정신과 진료기록이 있으면 취업이 어려워질까봐 안 다녔다. 최근에야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료를 다시 시작했다. 대구에 있는 병원을 한 달에 한 번 다녀온다. 국가보훈처는 신청한 지 1년이 되도록 심사 중이다.
“아들 낳으면 군대 안 보냅니다”정원씨는 군에 할 말이 많았다. “군 윗분들이 책임져야죠. 어뢰 탐지도 안 되는 배를 백령도 근해에 출동하라고 명령했잖아요. 우리가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어뢰를 맞아서 46명이 돌아가시고 58명이 힘들게 살아가는데 비난하면 안 되죠. 자기들이 보냈다면 자기네가 책임을 져야지 왜 자기 살려고 함장님한테 뒤집어씌웁니까.”
그는 “우리나라 군대는 망한 것 같다”고 했다. “제가 아들 낳으면 군대 안 보냅니다. 필요할 때만 우리 아들이고, 다치면 너네 아들인데, 이딴 군대라면 안 보냅니다. 정부에서 저희한테 영웅이라고 했잖아요. 그에 맞는 대접을 해줬으면 좋겠네요.”
※편집자 주: 한국 사회에서 천안함 사건의 원인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단어 하나도 민감하다. 은 그동안 천안함 ‘침몰’이라는 용어를 써왔다. 이번 기사에선 생존자들의 요구를 반영해, 이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한 부분에선 ‘폭침’이라고 썼다. 그렇지 않은 경우엔 천안함 ‘사건’ 등으로 표현했다.
글 변지민 기자 dr@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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