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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로 시작해 박근혜로 막 내리나

저항의 도시 대구에 어떻게 보수가 뿌리내렸나…
1961년 5·16 쿠데타가 ‘대구 보수’의 기원

제1215호
등록 : 2018-06-0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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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말 경북 구미의 박정희 생가 추모관 모습. 직전 대선에서 승리한 박근혜 당선자를 축하하는 꽃바구니가 놓여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1963년 9월19일 대구 수성천변.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를 민간정부로 이양하는 5대 대통령선거 유세가 열렸다. 대구 출신 이효상 의원이 연단에 올라섰다.

“이곳은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건만 그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하나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이제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만년 임금으로 모시자.”

이효상은 대구 유권자들의 감성을 한껏 자극했다. 뜨거운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그날 이효상이 외친 ‘신라 대통령론’은 지금도 대구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영남 패권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우리 현대사의 사건이다.

그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 후보를 15만 표 차이로 가까스로 눌렀다. 66만 표를 앞선 영남의 몰표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신라 대통령’의 등극이었다. 일등 공신 이효상은 훗날 국회의장에 올랐다. 그는 19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구 사회의 원로 정치인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역감정 이용해 집권 토대 닦아

1960년 2월28일 자유당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나선 대구의 고등학생들을 경찰이 연행하는 모습을 담은 <동아일보> 사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 의거는 대구의 긍지이다.


지금의 대구 보수는 1961년 5·16 쿠데타와 직결돼 있다. 박정희 세력이 지역감정을 이용해 집권의 토대를 닦고, 그것을 기득권으로 여겨 무한정 유지하려고 했다. 박정희가 시작이고 박근혜에서 끝을 보이고 있다.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1971년 대통령선거는 대구 보수 패권의 이미지를 깊게 각인시킨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영호남 갈등’이란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공화당 의장이던 이효상은 유명한 대구 유세 발언으로 또 한 차례 역사에 기록된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서는 “김대중이 정권을 잡으면 경상도 전역에 피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대구 사람들 사이에 “전라도 사람 못 믿는다” “뒤통수 때린다”는 말이 퍼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박정희는 그 선거에서 박빙으로 승리한 뒤 10월 유신을 선포한다.

박정희 시대는 1979년 총성으로 종말을 고했지만, 대구 ‘보수 적통’ 세력은 전두환·노태우의 1993년까지 32년 집권을 이어간다. 박근혜가 등장하면서 박정희의 환생을 잡는 듯한 착시에 잠시 빠져들었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는 “1961년 이후 대구 세력이 집권했다지만 대구의 서민들이 누린 것은 없다”며 “‘우리가 지배세력’이란 허상에 취해 있었다. 중앙 무대에서 출세한 ‘서울 TK(대구·경북)’들이 지역감정을 이용해 수혜를 누렸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대구의 성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박정희 이전 대구’를 그리워한다. 대구 사람의 핏속에 오히려 저항의 디엔에이(DNA)가 강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1961년에서 달력을 뒤로 돌려보자. 5년 전 대통령선거에서 대구는 무소속 진보 후보 조봉암에게 무려 72.3%의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서상일이 사회대중당을 통해 혁신 운동을 전개한 곳도 대구였다. 자유당 시절 대구는 야당 도시라는 명성이 자자했다. 4·19 직후엔 교원노조 설립과 경북사회당 설립 등 진보운동의 근거지였다.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자유당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나섰던 1960년의 2·28 학생의거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지금보다 훨씬 강성인 ‘좌빨’의 온상이 대구였던 것이다.

대구는 원래 ‘좌빨’의 온상

대구가 이처럼 진보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농경지가 협소해 대지주 계층이 형성되지 않았고 △일찌감치 신교육기관이 대구에 생기면서 젊은 지식인 계층이 활동할 수 있었고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점령되지 않아 전쟁 뒤 대대적인 좌익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대구의 저항적 진보 역량은 박정희가 집권한 1960년대 말~1970년 초까지도 위력을 발휘한다.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 간첩조작 사건인 인혁당·남민전 사건에서도 대구 진보세력이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 1975년 4월9일 대법원 선고 18시간 만에 사형당한 8명은 거의 대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경북대 학생회장을 지낸 여정남을 비롯해 도예종, 서동원, 송상진 등 4명은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경북대에서는 2010년 교내에 여정남 공원과 추모비를 세워 해마다 4월9일 추모행사를 연다. 사형수 8명이 묻힌 곳도 대구의 공원묘지이다. 남민전 사건의 ‘주범’으로 옥사한 이재문 또한 경북대를 나와 대구에서 신문기자를 했다.

그때 경북대에서 여정남과 함께 진보운동을 했다는 배한동 명예교수는 “민청련 사건의 이철, 유인태 등도 그 무렵 서울에서 대구로 와 운동 방향을 논의했다”며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경북대가 대학가 진보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두 사건 이후 대구 진보세력은 송두리째 뿌리가 뽑히고 만다. 긴 암흑기가 이어진다.

그런 중에도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농민운동은 간헐적인 저항을 표출한다. 1979년 5월 농민운동에 앞장섰던 오원춘 농민회 분회장이 납치돼 감금 테러를 당하자, 천주교 안동교구에서 공개적인 저항에 나섰다. ‘오원춘 사건’은 유신헌법 철폐 등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로 이어졌으며, 부마항쟁과 유신독재 종말의 시발탄이 됐다.

해방 공간에서는 대구를 ‘동양의 모스크바’라고 일컬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1946년 대구에서는 미 군정에 저항하는 9월 노동자 파업에 이어, 이른바 ‘10·1 폭동’이 일어났다. 1만 명의 대구 시민이 시위에 나섰으며, 경찰의 발포로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대구의 10월 항쟁은 1947년 시작된 제주 4·3 사건 등 한국전쟁을 전후해 벌어진 좌우익 대립 사건에 영향을 끼쳤다.

일제 땐 항일독립운동의 본산

대구 사람들은 보수와 진보를 떠나, 대구가 국채보상운동의 본거지였음을 자랑스러워한다. 1907년 2월 김광제와 서상돈 등은 대구의 중앙로에서 자발적인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국민의 힘을 모아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은 수년 동안 전국으로 뜨겁게 번져나갔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경제 침탈에 맞서 100년 전에 벌인 ‘금 모으기 운동’이다.

대구와 경북 지역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의 본산이기도 했다. 안동의 이상룡·김동삼이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대구의 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저항시를 썼다. 독립운동으로 저항하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안동의 시인 이육사도 펜으로 일제에 맞섰다.

대구와 경북이 조선시대 오랫동안 중앙 권력에서 소외된 영남 남인의 고장이었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1월 서울대 로스쿨 교수이던 조국은 영남 남인에 뿌리를 둔 소설가 이문열과 류철균(필명 이인화)을 비판했다. 이화여대 교수이던 류철균이 최순실씨 관련 사건으로 구속되자, “이황과 류성룡 등 영남 남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선비들이 이문열과 류철균을 보면 뭐라고 할 것인가. 생각건대 이문열과 류철균은 영남 남인을 팔아 집권 노론이 되길 원하며 살았다”고 페이스북 글로 비난했다. 그는 류철균이 박정희를 현대판 정조로 상정한 소설 <인간의 길>에서 “영남 출신 권력자에 대한 충성의식과 국가주의적 세계관으로 수구 기득권을 옹호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류철균은 1994년 몰락한 영남 남인의 관점에서 개혁 임금인 정조를 추앙한 소설 <영원한 제국>을 썼던 소설가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남인은 1695년 갑술환국 이후 송시열의 노론 세력에 밀려 중앙 무대에서 철저히 소외당했다. 조선 후기 세도를 누린 안동 김씨는 안동에서 ‘장동 김씨’로 불리고, 영남 남인과는 거리가 멀다. 권력에서 멀어진 영남 남인은 만인소의 저항 등 비타협적인 선비의 기개를 떨쳤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활발한 의병운동과 그 뒤 항일독립운동, 진보저항운동에 앞장섰다.

“더 이상 수구 꼴통으로 남지 말아야”

그러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는 “대구·경북은 주자학에 뿌리를 둔 유교 문화의 거점이다. 곧 보수적 사유의 본질이고, 종가와 종파를 중심으로 패거리를 형성하는 배타성이 강하다”고 비판한다. 그는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보수는 지켜야겠지만, 대구도 이제는 저항하고 혁신하는 야생적 사고를 회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배한동 명예교수는 “긍지의 역사가 살아 있는 우리 대구가 더 이상 수구 꼴통의 섬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라며 “꼭 진보여야 한다는 게 아니라 다양성이 살아 있는 대구로 바뀌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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