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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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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천사 난민을 한국은 안아줄 수 있을까

2018년 1월 왕실모독죄로 기소 위기 처하자 타이 탈출해 한국 온 차노끄난

“난민 인정돼도 타이 민주화 위해 살 것”
등록 2018-05-29 17:18 수정 2020-05-03 04:28

2018년 1월17일 오전 6시30분 인천공항. 타이 방콕발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차노끄난 루암삽(25·사진)은 창문 너머로 태어나 처음 가는 도시를 응시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희뿌연 입김이 나왔다. 낯설고 추웠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여행가방을 끌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급하게 꾸린 가방에는 티셔츠 몇 장과 청바지 두 벌, 노트북과 책 두권, 대학졸업증명서와 신분증뿐이었다. 한국 여행정보 인쇄물도 있었다. 방콕에서 떠나기 직전 서둘러 출력한 것이었다.

처음 한국을 공부한 시간, 15분

화장실 문을 잠그고 인쇄물을 꺼내들었다. 서울의 유명한 카페와 맛집, 한류 스타와 케이팝에 대한 정보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외국 이름을 모국어로 되뇌었다. 닥치는 대로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했다. 마음은 복잡했지만, 지금 이것들을 외우지 못하면 한국에서 당장 쫓겨날 판이었다.

차노끄난은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공항 탑승동에 체류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마치 죄수 같았다. 만에 하나 고국으로 돌려보내진다면 갈 곳은 감옥뿐이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지그시 눌러 참았다. 눈이 부어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눈치채면 쫓겨날 수도 있다. 절대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 인쇄물 내용을 다 외우면 좋았겠지만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너무 오래 지체하면 의심받을 수 있었다.

15분. 차노끄난이 태어나 처음 한국을 공부한 시간이었다. 화장실을 나와 마음 졸이며 출입국관리사무소 심사 대기줄에 섰다. 순서를 기다리면서도 읽은 내용을 계속 곱씹었다. 직원과 눈이 마주치면 움찔했지만 자연스러워 보이려 노력했다.

한국의 출입국관리사무소는 타이 사람들에게 엄격하기로 악명 높다. 여행객으로 위장해 몰래 일하러 오는 타이 노동자가 많기 때문이다. 직원은 차노끄난의 여권과 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여권 페이지를 몇 번 넘기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통과시켰다. 머릿속에 집어넣어 단단히 뭉쳐놓은 한국 정보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며 흩어졌다.

하지만 완전히 그곳을 빠져나올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태연하게 걸어나오면서 ‘왜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아마 여권에 찍힌 도장들 때문이리라. 차노끄난은 학업을 위해 미국과 일본에 오래 머무른 적이 있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가 그녀를 몰래 한국에 들어오는 타이 사람들과 다르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공항 출구로 나오자 메신저로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1시간 정도 늦는다고 했다. 전날 오후 처음 연락해 알게 된 남자다. 한국에서 차노끄난이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믿을 수 있는 친구의 친구였다.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모든 풍경이 생경했다. 두려웠다. 방콕에서 입고 온 빨간 드레스는 무채색의 이곳 겨울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추위에 살짝 몸을 움츠렸다가 검은색 재킷을 꺼내 입었다. 방콕의 밤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줬던 검은 재킷은 한국의 겨울바람을 막기엔 충분치 않았다. 온도를 보니 0도에 가까웠다. 그녀가 5시간30분의 어둠을 지나 이곳 아침으로 오는 동안 기온이 30도 떨어졌다.

“반가워, 괜찮니?” 1시간 늦게 도착한 그가 물었다. 괜찮을 리 없었다. 안도 섞인 울음이 나오려 했지만 다시 한번 꾸욱 참았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그를 따라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는 차노끄난을 광주 시내 한 지하철역 인근 게스트하우스로 안내했다. 충분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아늑했다. 그제야 꾹꾹 참은 울음이 일시에 터져나왔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목놓아 울었다.

형법 제112조 위반, 비극의 시작
한국으로 ‘정치 망명’을 선택한 차노끄난 루암삽이 2016년 5월22일 쿠데타 2주기를 맞아 탐마삿대학에서 열린 집회에 참가한 모습. 차노끄난 루암삽 제공

한국으로 ‘정치 망명’을 선택한 차노끄난 루암삽이 2016년 5월22일 쿠데타 2주기를 맞아 탐마삿대학에서 열린 집회에 참가한 모습. 차노끄난 루암삽 제공

2018년 1월16일 오후 2시, 방콕 시내 한 우체국.

‘112’. 차노끄난은 우체국에서 받은 소장에서 이 숫자를 발견하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한국에서 ‘112’는 폭행을 당하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 경찰을 부르는 번호지만, 타이에선 시민을 탄압하는 숫자다.

타이에선 왕이나 왕비를 비롯한 왕실을 욕하거나 모독하면 불경죄로 간주한다. 왕실모독죄다. 사법부는 왕실모독죄를 지으면 형법 제112조에 따라 최대 15년까지 징역을 살게 한다.

차노끄난은 숫자를 확인한 순간 오늘이 타이에서 보내는 마지막 하루가 될지 모른다고 직감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정리되지 않는 감정이 터져나올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시간은 감정에 따라 완급을 달리하며 흘렀다.

우편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와 우체국을 향할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현 군부정권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촉구하는 집회를 계속해왔기에 군사법정에서 보낸 소환장일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민주주의 천사’. 동지들은 차노끄난을 이렇게 불렀다.

차노끄난은 2014년 5월22일 쁘라윳 짠오차 전 육국참모총장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꾸준히 민주화 학생운동을 조직해왔다. 그녀는 더 나은 사회에 살고 싶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었다.

쭐라롱꼰왕립대학을 다닌 차노끄난은 2015년 2월7일 쭐라롱꼰대학과 탐마삿대학의 풋볼 경기가 있던 날 경기장에서 “독재 타도, 민주주의 만세”라고 쓴 팻말을 내걸고 구호를 외쳤다. 같은 해 2월14일 방콕 군사법정 앞에서 시민을 군사법정에 보내지 말라며 집회를 진행했다.

세 번의 시위, 네 번의 체포

차노끄난은 총 세 번 평화시위에 참가했다가 네 번 체포됐다. 군부독재에 반대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캠페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녀는 매번 시민법정이 아닌 군사법정에 섰다.

첫 번째로 체포된 건 2015년 5월22일이었다. 차노끄난은 쿠데타 1주년 행사를 맞아 평화시위를 조직했다. 방콕 예술문화센터 앞에서 아무런 구호도 외치지 않고 말 없이 시계를 보며 침묵을 지켰다. 일종의 플래시몹이었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쁘라윳 총리가 쿠데타를 일으킨 지 1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상기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15분 정도 흘렀다. 경찰이 갑자기 차노끄난 일행을 둘러싸고 경찰서로 연행했다. 경찰은 밤새 차노끄난을 신문했지만 아무 대답을 들을 수 없자 그녀를 이튿날 오전 풀어줬다. 그날 방콕 시내 곳곳에서 집회가 열렸고, 총 38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두 번째는 군인들이 차노끄난을 체포했다. 2015년 12월7일, 라차파크공원 조성 과정에 군부가 개입해 거액을 착복한 비리를 조사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던 길이었다. 군정은 라차파크공원에 심은 수많은 야자나무를 무상 지원받고도 한 그루당 700만원을 받은 것으로 서류를 조작했다. 체포된 차노끄난은 군 캠프로 끌려갔다. 군은 그녀를 신문했으나 기소하지 않고 석방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소환장이 날아왔다.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 차노끄난은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경찰은 10개월 뒤 그녀를 체포해 방콕 중앙 여성감옥에 수감시켰다. 이 사실이 보도로 알려지자, 시민들이 석방을 위한 모금을 진행해 차노끄난은 즉각 석방됐다.

이때부터 군인과 경찰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차노끄난의 집을 찾아왔다. 군경은 수시로 차노끄난과 그녀의 가족을 신문하고 감시했다. 차노끄난은 2016년 쁘라윳 군사정권이 추진한 개헌안 찬반 국민투표에 반대 투표를 하자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2016년 6월24일, 차노끄난은 타이 헌법을 상징하는 ‘락시 동상’을 청소하러 가던 길에 경찰에 체포됐다. 세 번째였다. 경찰은 그녀의 차를 뒤졌고, 현 정부의 부패를 비판하는 전단을 찾았다.

수차례 체포되고도 의연했던 차노끄난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기소 이유는 2016년 12월3일 왕실을 모독하는 영국의 공영언론 《BBC》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했다는 것이다. 기사는 현 국왕인 라마 10세의 여성 편력과 도박, 사치, 각종 불법 사업 의혹을 다뤘다. 차노끄난의 동지이자 오랜 친구인 짜뚜빳 분빳따라락사는 같은 왕실모독 혐의로 지난해 경찰에 체포됐다. 지난해 8월 2심에서 2년6개월형을 선고받고 현재 콘깬 감옥에 복역 중이다. 한국의 5·18기념재단은 지난해 5월18일 짜뚜빳에게 광주인권상을 수여했다.

《BBC》 기사 공유로 왕실모독죄
타이 경찰들이 5월21일 탐마삿대학 입구를 봉쇄하고 드나드는 차량을 검문검색했다. 이재호 기자

타이 경찰들이 5월21일 탐마삿대학 입구를 봉쇄하고 드나드는 차량을 검문검색했다. 이재호 기자

차노끄난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2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당시 해당 기사를 공유한 사람은 2600명이었다. 군사정권은 그중 차노끄난과 짜뚜빳만을 걸고넘어졌다. 이들이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과 만난 차노끄난의 친구들은 그녀가 가장 용감한 ‘민주화 투사’였다고 입을 모았다. “차노끄난은 동지들 사이에서도 자기 확신이 가장 강했다. 그녀는 집회에 참가하기 전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며 동지들을 다독였다.”

그런 차노끄난도 왕실모독죄는 두려웠다. 군사정권의 탄압과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녀는 왕실모독죄로 100년형까지 선고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감옥에서 죽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비참하게 삶을 마친 이도 있었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우체국에서 집으로 가면서 소속 단체인 ‘빈곤의회’ 의장에게 연락했다. 그는 방콕의 인권변호사를 연결해줬다. 차노끄난의 기소 사실은 순식간에 활동가들 사이에 퍼졌다. 그녀가 공동설립자이자 대변인으로 일하는 ‘새민주주의운동’ 동지들에게서 계속 전화가 왔다.

집에 도착해 부모님에게 사실을 알렸다. 차노끄난을 몹시 아끼는 부모님은 절규했다.

타이 중상층 집안에서 태어난 차노끄난은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녀가 처음 참가했던 집회도 2005년 ‘노란셔츠’ 편에서였다. 노란셔츠는 중산층과 엘리트 등 기득권층이 주로 참여한 조직으로 2006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부패에 맞서 퇴진 운동을 벌였다. 노란색은 왕실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당시 반대편에 있던 ‘빨간셔츠’에는 농민과 도시 빈민이 대다수 참가했다.

하지만 차노끄난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 오하이오주로 교환학생을 다녀오면서 타이의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부모님에 맞서 종교를 갖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기소장 받고 2시간 만에 탈출 결심

영민하고 학업 성적이 우수했던 차노끄난은 타이 최고의 대학인 쭐라롱꼰왕립대학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그녀가 군부독재에 저항하지 않고 착실하게 학업에 매진했다면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결국 왕실모독죄로 기소됐다. 크게 상심한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연거푸 술을 마셨다.

친구들은 차노끄난이 타이를 떠나야 한다고 했다. 오후 4시. 그녀는 소장을 받은 지 2시간 만에 타이를 떠날 것을 결심했다. 여행가방을 꺼내 짐을 꾸렸다. 지방 대학을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생에게는 작별 인사를 할 시간조차 없었다.

한 인권단체가 차노끄난의 탈출을 돕겠다고 했다. 그들은 당장 떠나려면 선택지가 많지 않다고 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있는 한국을 추천했다. 필리핀과 홍콩도 후보지로 이야기했지만 그곳은 무비자 체류 기간이 15일밖에 되지 않았다. 한국에선 비자 없이 90일을 머물 수 있었다. 일단 한국에서 석 달을 머물며 다음 계획을 세우자고 판단했다. 그 뒤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국가로 갈 계획이었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 국가로 가고 싶었다. 그곳에는 이미 정치적 이유로 난민신청을 한 타이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다. 한국은 잠시 거쳐가는 한 곳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차를 몰아 수완나품공항으로 갔다. 친구 3명이 함께였다. 차노끄난은 공항 카메라에 자신과 함께 찍히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판단해 어머니에게 차에서 내리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는 급하게 마련한 5만밧(약 170만원)을 건넸다. 공항 로비로 배웅 나온 친구 셋 중 한 명이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함께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차노끄난은 곧 눈물을 닦고 마음을 추슬렀다. 수완나품공항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선 전자시스템을 이용했다. 최대한 사람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비행기를 탔지만 여전히 울 수 없었다. 누군가 왜 우냐고 물으면 달리 설명할 말이 없었다. 기내식이 나왔지만 먹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지나온 시간을 생각했다. 앞으로 할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매일 차노끄난을 찾아왔고, 광주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인권단체와 사람들을 소개해줬다. 그녀의 난민신청을 도와줄 공익 인권변호사를 소개받았다. 5·18기념재단은 그녀가 난민으로 받아들여질 때까지 체류비를 지원하고 돕겠다고 했다.

3월 말, 차노끄난은 한국에 난민신청을 하기로 마음먹고 서류를 제출했다. 그녀의 난민신청이 대법원까지 가면 최대 5년까지 걸릴 수도 있다. 문제는 그동안 그녀의 사회적 지위다. 난민으로 인정되기 전까지 한국어를 배우러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할 때 제약이 많다. 과 만난 차노끄난은 “나는 난민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고, 타이 관광객도 아니다. 여기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극도의 불안감을 나타냈다.

차노끄난은 지난 4월 광주국제교류센터에서 열린 난민정책 세미나에 참가했다가 한국의 난민 인정률이 낮다는 이야기를 듣고 절망했다.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녀는 한국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국가의 경계선 사이에서 아슬하게 떠도는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

“서울의 노숙인들 만나고 싶다”

물론 차노끄난이 있어야 할 곳은 난민으로 살아갈 한국이 아니라, 조국 타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이른 시일 내 귀국을 기대하기 힘들다. 차노끄난은 “왕권과 군부독재의 결탁이 심각해 금방 해결되기 힘든 문제다. 타이 사람들은 잘못된 시스템을 의심하고 고민하는 문제에 익숙지 않다”고 토로했다.

“현재 타이는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전세계에 흩어진 타이의 정치 난민과 감옥에 갇힌 양심수가 이를 방증한다. 그럼에도 나는 타이 스스로의 힘으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타이 국민을 지지하고 싶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돼도 타이의 민주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겠다는 차노끄난은 6월 서울에 올 계획이다. 서울에서 무엇을 하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서울의 빈민가를 가서 노숙인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광주·방콕(타이)=글·사진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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