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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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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한 신기루로 남은 ‘정규직 꿈’

비정규직 전전하다 정규직 무산되자 목숨 끊은 서울메트로 무기계약직 김민규(가명)의 삶

기존 정규직들의 비정규직 혐오 공격에 분노… ‘구의역 사고’ 이후에도 되풀이되는 비극

박원순 시장, 무기계약직 정규직화 발표에 환호도 잠시, 노사 협상 결렬에 끝내 자살 선택
등록 2017-12-13 01:01 수정 2020-05-02 19:28
지하철 정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이 작업을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한다. 비정규직이라고 단순 업무만하는 것이 아니고, 일의 경중으로 직군을 구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울지하철 노동조합 제공

지하철 정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이 작업을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한다. 비정규직이라고 단순 업무만하는 것이 아니고, 일의 경중으로 직군을 구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울지하철 노동조합 제공

일은 현장에서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무기계약직의 업무가 끝나야 정규직이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고, 정규직이 책임질 일에 무기계약직이 감당할 몫이 섞여 있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감당하는 일은 명료하게 구획되지 않았지만, 그 차이는 사람과 사람을 잔인하게 갈랐다. 채용 방식이 달랐을 뿐인데, 그게 왜 ‘신분’처럼 돼버린 것일까. 무기계약직 노동자 김민규(35·가명)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었다. 무기계약직 노동자의 정규직화 문제를 놓고 서울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 사 쪽과 노조의 정규직 전환 협상이 치열한 공방과 결렬을 거듭할수록 김씨의 마음은 공허해졌다.

2016년 서울도시철도 공사 입사, 계속 비정규직 전전

김씨는 고향인 울산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한 귀퉁이에 붙어살며 이런저런 회사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했다. 울산도 큰 도시지만, 서울은 더 컸다. 큰 도시의 살림을 감당하기에 비정규직 월급은 너무 적었다. 그는 2016년부터 서울 지하철 5~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도시철도공사(도철)의 전동차 정비 자회사 서울도시철도엔지니어링(도철 이엔지)에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도철 이엔지에 들어와서는 그러려니 했다. 전동차 정비는 중요한 ‘기술’이었다. 배워두기만 하면 이 큰 도시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일이었다. 회사 간부들은 “열심히 하다보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김씨는 말을 되도록 줄이고, 손발을 부지런히 놀렸다. “형은 왜 이렇게 의젓해요?” 같이 일하는 동생의 칭찬이 몇 번이나 마음을 찍었지만 김씨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6년 5월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구의역 사고가 일어났다. 사실 일상과 죽음은 늘 붙어 있다. 2013년 1월19일 성수역, 2015년 8월29일 강남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던 노동자가 죽었다. 2016년 5월28일 구의역에서 익숙한 비극이 반복됐을 뿐이다. 그 죽음은 복합적 원인을 가진 ‘사건’이었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김씨는 고덕차량기지 벽면과 회사 로비에 걸려 있던 “외주화가 죽음을 불렀다”는 선언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김씨는 떨리는 감정을 몇 번이나 속으로 삼켰다. 동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한탄을 남발했지만, 끼어들진 앉았다. 말을 뱉어낸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김씨는 쉬는 시간마다 구석에 웅크려 조용히 담배만 태웠다.

구의역 사고 이후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김씨는 틈만 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거란 말을 뱉던 간부들, 도철에서 넘어온 그 퇴직자들이 하는 일도 없이 그렇게 많은 돈을 받는다는 사실을 그해 가을 국정감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때 처음 조금씩 끓어오르던 마음의 동요가 분노가 아닐까 생각했다. 비정규직은 한국 사회의 새로운 ‘신분’이라는 생각을 그때 굳혔다. ‘이 사회는 누가 어떤 일을 하는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기준으로 영원히 맞닿지 않을 평행선을 그리게 한다.’ 가난했지만 초라할 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혼란스러웠다. 곧 정규직이 되리란 희망으로 3년을 일했지만, 다니던 회사의 용역 계약이 해지되며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또 다른 지하철 노동자들의 얘기도 그 무렵에 들었다. 그들도 김씨처럼 자회사 계약직이었다. 이렇게 계속 살 순 없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잘하면 정규직이 될 거란 희망은 허망한 신기루였다.

2016년 6월 무기계약직-3300만원 현혹

그래도 살아야 했다. 삶은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내는 것이니까. 서울에서 태어나 부모님과 같이 생활하는 동료들과는 조건부터 달랐다. 친한 동료 몇몇에게 “비정규직도 서울 출신이냐 아니냐로 갈린다”며 마음속 진담을 서걱거리며 농처럼 흘렸다. 울산에 사는 부모님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는 부모님의 소중한 장남이었다.

김씨는 2천원이면 한 끼가 해결되는 회사 구내식당에서 세끼를 모두 해결했다. 하루에 6천원, 한 달이면 식비로만 18만원이 들었다. 회사에서 지원되는 식대는 9만원이었다. 서른다섯 살 노동자는 늘 허기졌다. 매월 20일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면 공과금과 생활비와 밥값으로 쓴 신용카드 대금이 자동이체돼 나갔다. 월급은 잠시 숫자로 통장에 기록됐다가 사라지는 무엇이었다. 인생은 일하지 않으면 멈추는, 그러나 멈춰 설 수 없는 회로와 같았다.

김씨는 그럴수록 조용히 일만 했다. 어떤 날은 온종일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자회사 계약직 노동자로 더 이상 삶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 명료해질 무렵, 결국 사표를 썼다. 최소한의 안전판이 있는 직장으로 옮기고 싶었다. 때마침 서울 지하철 1~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메트로)에서 ‘무기계약직’을 뽑는다는 공고가 나왔다. 구의역 사고 뒤 “외주화가 죽음을 불렀다”는 시민들의 외침에 못 이겨 서울시가 내놓은 대책이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직접 나서 “지하철 5개 분야 안전 업무직을 정규직 수준의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고 연봉은 3300만원 수준으로 설계하겠다”고 약속했다. 2016년 6월16일이었다. 다른 건 볼 필요도 없었다. ‘무기계약직-3300만원’이라는 말만 눈에 들어왔다. ‘그거면 됐다. 세금을 제외하더라도 꾸준히 한 달에 250만원 이상은 통장에 꼽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돈을 벌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해봤다.

2016년 8월 메트로 무기계약직 합격
서울메트로 무기계약직 노동자 김민규(가명)는 울산하늘공원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가 살던 자취방의 이름은 ‘하늘채’였다. 서울지하철 노동조합 제공

서울메트로 무기계약직 노동자 김민규(가명)는 울산하늘공원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가 살던 자취방의 이름은 ‘하늘채’였다. 서울지하철 노동조합 제공

합격자 발표는 2016년 8월23일이었다. 그 날짜를 정확히 기억한다. 회사는 경쟁률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높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메트로와 도철 자회사에 다니던 이들이 대거 지원했다. 인천지하철 용역 직원도 여럿 있었다. 합격한 뒤 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교육 수료까지 200시간은 최저임금 기준의 월급을 감내해야 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다. 무기계약직으로 입사한 이들은 이전 직장의 경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정규직으로 입사하면 경력 환산표를 기준으로 지난 직장의 경력이 인정되지만, 신설된 안전 업무직은 그런 규정 자체가 없었다. 서울시가 말한 ‘정규직 수준’이 무슨 뜻인지 그때 이해했다. 여하간 정규직은 아닌 것. 인사 규정, 취업 규칙 등이 모두 정규직과 달랐다. 그 내용은 입사하고 한참 교육이 이뤄진 뒤 고지됐다. 직장을 관두고 온 이들은 돌아갈 방법도, 부당함을 정정할 여력도 없었다.

김씨는 2016년 10월1일 안전 업무직에 임용됐다. 군자차량기지 업무지원반에 배치됐다. 무기계약직 30명이 한꺼번에 배치돼 4개조로 나뉘어 바로 투입됐다. A조는 실내, B조는 대차, C조는 필터, D조는 부정기 업무를 맡았다. 조는 2~3개월 단위로 순환됐다. 무기계약직 30명을 관리하는 차장이 업무지원반의 유일한 정규직이었다. 일과는 단순했다. 오전 9시 차장 주관 조회에서 하루치 업무를 전달받는다. 조별로 가장 연장자가 조장을 맡았다. 무기계약직은 직급이 없으니, 조장은 다달이 3만원의 수당을 받는다는 것 외에 직책이라 할 수도 없었다.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 선배나 기수 같은 게 없으니 대체로 나이순이었다. 조회가 끝나면 당일 업무에 대해 조별로 짧게 회의를 한 뒤, 오전 10시 전에 전동차를 정비하러 검수장에 들어서야 했다. 오전 11시40분까지 작업을 하고, 점심을 먹는다. 오후 작업을 3시40분까지 끝내고, 4시부터 정비 내역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기동검사를 했다. 군자차량기지는 하루에 무조건 한 대의 차량 정비를 마무리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서울을 달리는 지하철 가운데 가장 낡은 차량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2016년 10월 쪼그라든 첫 월급

무기계약직으로 정식 임용이 됐을 때,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노동조합비는 월 1만4천원이었다. 그 돈을 내니 묘한 소속감이 들었다. 정해진 기간을 노동하는 삶에서 벗어났다는 증표와도 같았다. 처음에는 더 묵묵히 일했다. 어차피 손에 익은 일이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물론 달라진 점도 있었다. 지하철 정비는 크게 세 가지, 검수·경정비·중정비로 나뉜다. 검수는 육안으로 문제가 있는 것을 보며 고치는 일이다. 현장 용어로 ‘월상’이라 하는 경정비는 2~3개월마다 중요 부품과 교체 주기가 다가온 부품을 교체하며 정비하는 과정이다. 중정비는 그보다 더 긴 주기로 전동차를 모두 분리해 점검하는 일이다. 도철에서는 중정비 업무를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했는데, 메트로에서는 경정비를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했다. 비정규직이라고 단순 업무만 하는 것도 아니었고, 일의 경중으로 직군을 구별할 수도 없었다.

이곳의 월급일도 매월 20일이었다. 첫 월급날은 10월20일이었다. 통장에 세금을 빼고 160만원 정도가 찍혔다. 속은 기분이었다. ‘월 250만원’을 상상해왔기에 증발된 금액만큼 삶의 의미가 축소됐다. ‘무기계약직-3300만원’ 하나만 보고 온 회사가 아니었나. 어찌된 일인지 알아야 했다. 회사의 설명은 건조하고 간략했다. 3300만원은 모든 수당을 합쳐,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기준이었다. 무기계약직의 기본급은 140여만원에 불과했고, 군 복무 기간 외에 어떤 경력도 호봉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장남이어서 가족수당 2만원, 취업에 도움이 될까 악착같이 땄던 자격증 수당이 1개당 4만~5만원 인정됐을 뿐이다. 월급은 기본급에 약간의 수당, 그리고 상여금 200%를 10개월로 나눈 20% 금액의 합이었다. 11월과 12월에는 그나마 상여금이 없었고, 대신 11월에 월동보조금 40만원이 지급됐다. 쪼가리 금액이 붙지 않는 12월 급여는 140만원대였다. 분명 3300만원이라고 했는데, 사람에 따라 전에 다니던 직장보다 많게는 80만원에서 적게는 40만원 수입이 줄었다.

2017년 7월 정규직 전환의 꿈

“형 노동조합 일단 탈퇴하고, 나중에 월급 오르면 다시 가입할게요.” 김씨는 노조 상근자에게 노조 탈퇴서를 제출했다. 소속감보다 돈이 급했다. 월급명세서에 찍히는 조합비 1만4천원이 너무 간절했다. 되도록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더 많은 월급을 받으려면 자격증을 따는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기사 자격증에 5만원, 산업기사 자격증에 4만원, 기능사 자격증에 2만원의 수당을 쳐줬다. 무선통신기사 자격증, 전기공사기사 자격증이 이미 있었지만 산업안전기사 자격증도 따야 할 것 같았다. 무기계약직만 모아놓은 업무지원반에는 개인용컴퓨터는 없고 책상만 있었다. 다른 이들이 쉴 때,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자격증 공부에 매달렸다.

공정한 대가로 치환되지 않는 노동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천호역 근처 비좁은 자취방에서 튕겨나와 신답역에 도착해 군자차량기지 작업장에 머물다 다시 방에 고립되는 일상이 이어졌다. 영화도 TV도 보지 않았고, 게임도 안 했다. 김씨의 시공간은 고독했다. 가뜩이나 없던 말수가 더 줄었다. 집에 들어와선 줄담배를 피웠다. 같은 빌라 사람들이 그의 흡연을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시간에 맞춰 출근하고 날짜에 맞게 돈을 내고 남는 시간엔 맹렬히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그가 누린 유일한 삶의 ‘사치’는 차량기지 앞 ‘땡큐37’에 가는 것이었다. 모든 안주가 3700원인 술집. 퇴근 방향이 같은 동료와 종종 들러 소시지채소볶음 같은 안주 1개를 시켜놓고 소주 2병을 마셨다. 1만원을 내면 몇백원이 남았다. 술을 즐겼지만 어느 정도 이상은 마시지 않았다. 30대 중반에 번번이 돈 1만원을 누가 내야 할지 눈치 보는 게 겸연쩍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무렵 김씨에게 벼락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2017년 7월17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시 공공부문 무기계약직을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 차원의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이 발표되기 사흘 전이었다. 세상의 호의가 낯설어, 조금 들떴다. 정규직이 된다면, 윗사람도 없고 아랫사람도 없이 홀로 변두리를 도는 이 삶도 끝날까. ‘땡큐37’에서 자주 술잔을 기울였던 동생은 들뜬 목소리로 “형, 정규직 되면 지금 우리가 월 180만원 받는 기준이면 240만원 넘게 받는대요”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올해 안에 협상을 마무리하고 내년 예산을 확보해 시행하겠다고 했다. 정말 250만원을 받는 삶으로 갈 수 있을까.

2017년 9월 정규직들의 혐오 공격
서울교통공사 정규직 직원들 가운데 일부는 무기계약직의 정규직 전환을 맹렬히 공격했다. 김진수 기자

서울교통공사 정규직 직원들 가운데 일부는 무기계약직의 정규직 전환을 맹렬히 공격했다. 김진수 기자

정규직 전환 협상은 2017년 9월15일 시작됐다. 협상은 교통공사 3대 노조에서 5명, 사 쪽에서 5명이 참여했다. 노사 협상은 총 다섯 차례 이어졌다. 애초 사 쪽은 10월 말까지 노사 합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말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기계약직 전원 정규직 연내 전환’이라는 서울시 방침에 어긋나는 안을 가지고 버티기를 이어갔다. 사 쪽에선 직군, 직종, 직급이 모두 문제라고 했다. 새로 뽑은 무기계약직을 기존 정규직 직군에 편입할지, 새 직군을 만들지, 직급은 몇 급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협상은 공전을 거듭했다. 사 쪽에선 “기존 정규직의 이익을 침해하면 안 된다, 정규직만큼 대우는 안 된다”고 버텼다. 노조가 양보하면 사 쪽에서 다른 안을 들고나오고, 다시 3대 노조에 그것의 단일안을 요구하는 흐름이었다. 노조는 별도 직급 신설 등을 양보했다. 공사는 다시 ‘무기계약직 3년 이상 근무자 순차 전환’을 고수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됐다.

정규직 전환 협상이 시작되며 사내 익명 게시판 ‘소통의 창’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협상이 결렬될 때마다 정규직 직원들은 “정의는 살아 있다”며 환호했다. 저들이 말하는 정의는 무엇일까. 김씨는 그저 아득했다. 침해당하는 것이 없는 정규직들이 격정적으로 불만을 쏟아내는 대목에선 피가 몇 번 거꾸로 솟았다 가라앉았다. “형, 자꾸 그거 보지 마요. 어느 조직에나 그런 사람들은 다 있어요. 정규직 된다고 뭐 달라져요. 그냥 월급 좀더 받는 거잖아요.” 그가 사내 게시판에 들락거리는 모습을 본 동료가 말렸다. 정규직들은 무기계약직을 “무임 승차한” “일방적 시혜를 입은” “불공정 덩어리” “낙하산들”이라고 했다. 힘들게 들어온 회사가 “더러운 짬통”이 된다고도 했다. 2015~2016년에 입사한 젊은 사원들의 저항이 거셌다. 업무 현장에서 정규직들을 보기 두려웠다. 누가 두 얼굴을 가졌는지 알기 어려웠다.

협상이 시작된 뒤 내내 혐오 공격에 시달렸다. 안다, 정규직들의 노력을. 그들은 열심히 공부해 회사에 들어왔다. 그 시험을 통과한 것에 대한 그들의 우월감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게 누굴 모욕할 수 있는 이유가 될까. 나와 급이 다른 너는 나보다 열등하며, 너와 내가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주장을 서슴없이 해도 되는 것일까. 그는 의문을 품었다. 사회정의를 위해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한다던 문재인 대통령과 박원순 서울시장은 왜 이런 혐오 표현에 아무런 말이 없는 걸까. 어차피 더불어 사는 세상인데, 내 몫이 더 커진다 해도 네 몫이 줄어드는 것이 아닌데, 저들은 왜 우리를 ‘더러운 돌대가리들’이라고 할까.

2017년 11월 6일 목매 숨진 채 발견

김민규, 1982년생. 서른 중반의 지하철 무기계약직 노동자. 그는 2017년 11월16일 서울 천호동 자취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출근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동료들이 그의 집을 찾았다가 목을 매 싸늘하게 숨져 있는 그의 주검을 찾아냈다. 동료들은 김씨가 평소 정규직 전환이 어려워지는 것에 많이 괴로워했고, 애초 얘기와 다른 월급 체계에 힘겨워했다고 말했다. 숨을 끊기 직전 김씨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오갔을지 우린 이런저런 짐작만 해볼 뿐이다. 서울교통공사는 그가 죽고 ‘조직 구성원 간 갈등이 심화되어 사내 소통 한마당 게시판을 잠정 폐쇄한다’고 공지했다.

숨질 때, 고시원보다 약간 넓었던, 한 평 조금 넘는 김씨의 자취방엔 불이 켜져 있었다. 12월6일 그의 방을 찾아가봤다. 필로티 구조의 빌라 1층에 있던 그의 방은 내부로 외벽 가스관이 지나는 독특한 구조였다. 김씨의 유가족은 교통공사와 합의서를 작성한 탓에 의 취재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 김민규의 명복을 빈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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