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섭 1981년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AIDS·에이즈)이 미국에서 발견됐을 때는 원인 바이러스를 몰랐고 발병 2년 안에 환자의 40%가 죽는 치명적 질병이었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 동안 항바이러스 치료제가 개발됐다. 미국 기준으로 20살에 HIV에 감염됐을 때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평균 70살까지 산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현재 전문가들은 HIV 감염을 만성병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아직도 이 질병을 치명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돈 오페라리오 HIV 감염은 치명적 질병이 될 수도 있다. 적절한 의료 지원이나 사회적 지지가 없다면 HIV 감염인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많은 HIV 감염인이 의학의 성과를 충분히 누리려면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보건의료 시스템과 HIV 감염인을 존중하며 치료하는 의료진의 태도가 필요하다. 미국 등 서구 국가의 HIV 감염인이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더 오래 사는 것은 그 때문이라 생각한다. 많은 저소득 국가에서 보듯, 이런 사회적 시스템이 없다면 HIV는 여러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 질병이다.
김 한국은 HIV 감염과 에이즈의 낙인이 심각한 나라 중 하나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세계가치조사에서 한국인의 88.1%가 ‘에이즈 환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오른쪽 표 참조) 스웨덴 6.1%, 미국 13.9%에 비하면 놀라운 수치다.
오페라리오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연구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게 있다. 사회적 불평등과 낙인, 제도적 차별로 가장 열악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더 자주 HIV 감염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배제된 집단에서 감염률이 높다. 그것은 이미 감염된 사람은 물론이고 아직 감염되지 않았지만 감염 위험이 높은 경우에도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HIV 감염 원인을 이야기할 때, 구조적·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감염 전에 적절한 예방 조처를 하거나 HIV 감염 검사를 받고, 감염 이후에는 적절한 의료 시스템 아래 치료받고, 감염인이 파트너나 사랑하는 이들과 자신의 질병에 대해 말하고, 또 파트너가 예방 조처를 하도록 하는 모든 과정에서 사회적 결정 요인이 생물학적 요인만큼 중요하다.
차감염인 비난·거부하는 언론과 의료진김 최근 한국 부산에서 한 HIV 감염 여성이 감염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온라인 채팅으로 만난 남성들과 돈을 받고 성관계를 하다 경찰에 체포된 일이 언론에 대거 보도됐다. 대부분의 한국 언론은 그 여성을 구체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라, 질병을 옮기는 ‘매개체’(vector)로 다뤘다. 취약 집단에서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 감염병을 논할 때 사회적 결정 요인과 다층적 맥락이 중요하다는 것을 좀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을까.
오페라리오 한국의 상황은 1980년대 미국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언론 보도는 HIV 감염인을 고통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그들 개인을 비난한다. 또한 잠재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병을 전염시키는 사람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HIV 감염인들과 이야기해보면, 파트너나 사랑하는 사람이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는 감염인 자신이다. 언론에서 HIV 감염인을 그처럼 묘사하는 것은, HIV 감염인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옮기는 일이고 그 자체로 거대한 사회적 해악이 된다. 그런 낙인 때문에 감염인은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은 물론이고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어진다. 더 나아가, 낙인으로 감염 위험에 놓인 사람들이 자신도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하고 그 경험에 대해 침묵하게 만든다.
김 한국에서 HIV 감염인을 괴롭히는 또 다른 문제는 의료 이용의 어려움이다. 치과 진료, 수술 등 피부조직에 이르는 침습적 치료를 제공하는 의료진이 HIV 감염인 진료를 거부하는 일이 해마다 일어나고 있다.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에는 이와 관련한 진정이 여럿 제기됐다.
오페라리오 이 역시 미국의 1980년대 중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 의료인들이 HIV 감염인 치료에 익숙지 않은 것은 심각한 문제다.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HIV 감염을 예방·치료하려면 HIV 치료를 일반 의료서비스 시스템에 통합하는 게 필수적이다. 대부분의 의사가 HIV 전파 경로와 가능성에 충분한 지식이 없는 점도 큰 문제다. 이는 의사들이 감염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진료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의료서비스 과정에서 HIV에 감염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의료인에게 표준화된 교육을 하고, 자원을 투자해서 효과적인 예방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바꿀 수 있는 건 성적 지향 아니라 ‘낙인’김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조차 동성애자 집단에서 HIV 감염 유병률이 높다는 이유로 동성애가 HIV 감염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집단에서 어떤 질병의 유병률이 높다고 그 집단을 병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또한 예방 차원에서 병의 원인은 변경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질병은 나이 들면 발생 위험이 늘어난다. 그러나 나이 듦이 원인이니 연령을 줄이자고 제안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연령은 변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 같은 성적 지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인정해야 할 존재의 일부이지, 바꿀 이유도 없고 바꿀 수도 없다.
오페라리오 동의한다. HIV 감염의 위험 요인 중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성적 지향이 아니라, 사회적 낙인과 배제다. 우리는 성적 지향이 아니라 보건의료 시스템과 사회적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이처럼 더 인도적인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봐야 한다.
한편 미시적 수준에서 HIV 감염의 원인은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다.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에선 성매매 등으로 HIV 감염이 많이 퍼진다. 그렇다면 그 사회에선 이성애가 HIV 감염의 원인이라고 할 건가. 어떤 사회에서는 대다수 여성의 HIV 감염 경로가 부부간 성관계다. 그곳에선 일부일처제가 원인인가. 모든 사회에서 HIV 감염의 원인은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다.
질병의 원인으로 특정 집단을 낙인찍고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인간은 전염병이 있을 때, 그것이 특정 집단에서만 발병한다고 가정해 스스로 안전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런 단순한 분석으로는 질병을 예방·관리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문제 인식에도 이를 수 없다. 더 복잡하게 사고해야 한다. HIV 감염만이 아니라 심장병, 비만, 치매 모두 그렇다. 특정 집단을 지칭해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편리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사고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복잡함을 직시하는 ‘불편함’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핵심 요소다.
모두를 어떻게 보호할지 고민해야김 한국 사회에서 HIV 감염의 낙인 중 하나는 성매매에 대한 것이다. 여성 감염인의 경우 성매매로 감염됐을 것이라는 편견과 낙인이 있다. 또한 HIV 감염인 여성의 성매매로, 감염된 성구매자가 더 있을 거라는 공포를 조장하는 기사는 감염인을 ‘병을 옮기는 매개체’로 보고 비난한다.
오페라리오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든 HIV 감염을 법·종교·도덕의 관점이 아니라 공중보건과 인권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랬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안전한 성관계를 맺고 감염의 위험이 있을 때는 초기에 자주 검진받도록 배려해야 한다. 대다수 성노동자는 경제적 이유로 일을 하는데, 그들에게 다른 형태로 일할 기회가 주어지도록 배려해야 한다. HIV에 감염된 개개인을 비난하는, 간편한 해결책을 찾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그 사회의 HIV 감염 문제를 악화하는 ‘요리법’이다. 어떤 경우에도 개개인을 비난하고 낙인찍는 ‘편리한’ 인식으로는 효과적인 질병 예방과 치료를 할 수 없다. 사회적 낙인은 사람들을 음지로 숨게 하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검사받지 않도록 한다. 개개인을 범죄화하는 것은 보건학적 관점에서 HIV 감염의 예방과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HIV 감염과 관련해서 제공하는 의료서비스나 교육을 특권이라 여기며 성매매 여성이나 동성애자와 같은 감염 취약 집단을 배제하는 공중보건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효과적인 보건학적 개입은 모든 구성원의 삶을 가치 판단하지 않고 그들 모두를 어떻게 보호할지 고민할 때 비로소 이뤄질 수 있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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