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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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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단’ 취재 실패기

정윤회, 우병우 등 쫓았으나 실패 또 실패… 촛불은 이기는데 난 지는 기분이었다
등록 2017-10-31 06:05 수정 2020-05-02 19:28
국회 입법조사관이 2016년 12월6일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출석요구서를 전달하려 했지만 그를 만나지 못했다. 우 수석은 ‘최순실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 출석요구서를 받지 않기 위해 장모 김장자 삼남개발 회장 집에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용일 기자

국회 입법조사관이 2016년 12월6일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출석요구서를 전달하려 했지만 그를 만나지 못했다. 우 수석은 ‘최순실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 출석요구서를 받지 않기 위해 장모 김장자 삼남개발 회장 집에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용일 기자

1년 전 이맘때,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던 바로 그때.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아는 게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다.

가 9월20일치 1면 머리기사로 ‘최순실’이란 이름을 꺼내들었을 때, ‘7시간’에 대한 대통령의 그것처럼 ‘순수한 궁금증’을 품(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당시 편집장이던 안아무개 선배는 “이 사건이 얼마나 가겠느냐”고 말했다. ‘비선 실세의 마사지사’란 자극은 너무나 강렬했지만 지속가능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나는 그를 (아니 내 안의 ‘설마하니’를 혹은 아둔함을) 믿었다. 상대는 무려 ‘콘크리트 박근혜’였다.

정윤회 찾으러 양산 통도사 달려갔으나…

물론 ‘미르TF’에는 김의겸 선배를 비롯해 내가 존경하는 쟁쟁한 선배들이 있었다. 능히 무엇이라도 알아낼 용사들이었지만, 그게 날고 기는 재주도 아니고 ‘설마하니 하늘을 나는 새를 떨굴까?’ 의구심을 지우기 힘들었(다기보다 그때 우리도 바빴)다. 그때 은 슬픔 반 분노 반으로 ‘고 백남기 사건’을 붙잡고 있었다. 진아무개 선배를 중심으로 사망진단서 외압 정황 같은 걸 발굴해 단독으로 썼다. ‘시민 주도형 입법 플랫폼’ 장기 연재를 하며 쌍끌이로 ‘기본소득’ 캠페인도 꾸리고 있었다. JTBC가 ‘태블릿PC’ 보도를 해 박 대통령의 하야 논의가 시작되던 주, 은 ‘낙태 금지를 금지하라’를 표지이야기로 썼다(2016년 10월31일 발행).

늦었다고 생각될 때는 정말 늦은 때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별판’ 통권 기획이 부랴부랴 시작됐다(이후 8번 통권을 썼다). 쥔 게 없으니 당연히 쓸 게 없었다. 첫 통권 기획은 마감을 이틀 앞둔 수요일 오전에 전격 이뤄졌다. 마감까지 벼락같았던 48시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첫 통권인 제1135호에서 우린 그때까지 나온 거의 모든 것을 썼다. 우린 스스로 “‘최순실 게이트’의 전말을 탈탈 털어 담았다”고 썼지만 100쪽에 이르는 ‘라운드업 기사’(다른 신문사 기사를 대충 조합하거나 바꾼 기사)에 모든 구성원의 영혼이 탈탈 털렸다. 남이 쓴 기사 속에 있는 이름들과의 싸움 같았던 통권 1호를 마치고 안아무개 선배는 맥주에 번데기를 앞에 두고 영혼 없이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이 승부는 ‘세월호 7시간’에서 난다.”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하나씩 품고 그렇게 ‘세월호 7시간팀’이 꾸려졌다. 홍아무개 선배가 그림을 그렸고, ‘편집국의 지니어스’라고 하는 김아무개 기자가(나 아니다) 취재해야 할 사람을 추렸다. 정윤회, 우병우, ‘문고리 3인방’ 그리고 이영선, 윤전추를 쫓기로 했다. 그렇게 하기로만 했다. 뭔가 제대로 되진 않았다. 주초엔 취재가 안 돼 괴롭고, 주중엔 뭘 써야 하나 괴로웠다. 주간지 마감 스케줄상 수요일까지 되든 안 되든 취재를 해보고, 수요일 밤 소주 한잔 털고, 취재도 털고, 목·금요일 이틀간은 다른 것들을 또 바꿔치기 하는 시간이 2주간 이어졌다.

그때, 전화 한 통이 왔다. 발신자 제한 번호로 온 전화. 취재가 안 되어도 너무 안 되던 형편에서 한 줄기 서광이 서린 음성. 백남기 빈소 취재를 하던 진아무개 기자에게 부산의 한 대학 강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경남 양산 통도사 근처에서 정윤회와 3인방이 만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야 할까요?” 홍 선배는 가타부타 답이 없었다. “차 가지고 왔어요?” 알아차렸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못 들어갈 것 같아. 양산 통도사에 누가 있다고 해서 가봐야 해.” 아내는 한심했는지, 상심했는지 더 묻지 않았다. 홍 선배는 “안 가기도 뭐하고, 가보기도 뭐하고….” 말을 흐렸지만 나는 (그래) 결심했다. “선배, 가시죠. 이래 취재가 안 되나, 저래 안 되나 마찬가지인데.” 누군지 알 수 없는 이의 전화를 오후에 받고, 해 지기 전에 고속도로에 올랐다.

양산까지 4시간여,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될 한 편의 영화같은 그림을 그렸다. 그런 걸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하던가. 제보자에 따르면 정윤회는 통도사 부속 한 암자에 기거한다고 했다. 우리가 도착할 밤 12시쯤, 정윤회는 도사의 풍모를 풍기며 시꺼먼 산사의 작은 방에 홀로 불을 켜고 명상 같은 걸 하고 있지 않을까. 생활한복을 입고 가부좌 자세로 흡사 ‘너희가 오길 기다렸다’고 우릴 맞아주지 않을까. 격정적 토로, 충격적 고백, 빼도 박도 못할 증거… 박근혜-최순실-정유라-정윤회로 이어지는 관계의 진실…. 경부고속도로 가로등이 죄 찬란한 밤이었다.

그는 없었다. 3인방이 흘린 먼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있는 것은 그림 같은 통도사뿐이었다. 암자라고 했지만 큰 절이었다. 서울 봉은사만큼이나 컸다. 그 앞에 잘 개발된 전원주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날 밤, 우린 이름이 환타지아던가 환타지던가 하는 모텔을 잡아두고, 막창을 먹었다. 냉동 막창. 막창은 신문사 앞 ‘껍데기집’이 맛있는데. 비리고 기름졌다.

눈 뜨고 놓친 우병우

그때 마침 심야 뉴스에 ‘문고리 3인방’이 등장했다. “저기, 혹시 저 사람들 여기서 못 보셨어요?” 식당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뉘요?” 그렇죠, 보셨을 리 없죠. “우린 장사만 하는 사람이라. 어서, 왔는교?” “저희 서울에서 왔습니다.” 대화는 끊기고, 우리는 말을 잇지 않고 소주를 털었다. 3병인가 4병을 넘어갈 때, 홍 선배가 말했다. “여기 곱창이 너무 별로네.”

다음날, 우린 통도사 암자 앞에 죽 늘어선 대저택들 등기를 모조리 뗐다. 한 집이 의심스러웠다. 개인 사찰이라고 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집이었고, 요즘 같으면 목줄을 안 해 바로 문제가 될 큰 개 서너 마리가 ‘왕왕’ 짖던 집이었다. “여기, 서울에서 온 손님이 묵고 있지 않나요?” 주인은 이상한 대답을 했다. “차가 없잖아요.” 네, 뭐라고요? ‘사람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왜 ‘차가 없다’인가. 월담의 강렬한 욕구를 참으며 등기부 확인이 스무 채를 넘어갈 때 홍 선배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갑시다, 평택으로.”

내려가는 길이 ‘빅피처’의 드로잉이었다면, 올라가는 동안은 침묵의 나선 주행이었다. 우린 사실 갈 데가 없었다. 경기도 평택엔 당시 청와대 행정관인 이영선과 호형호제하는 전 국가대표 금메달 유도 선수가 있었다. 우리가 아는 건 그가 이영선의 고향 후배이자 중·고등학교 동문으로 함께 운동하며 종종 고민을 나누는 사이란 점뿐이었다. 그를 어렵게 설득해 이영선과 통화하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가 이영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았다. 긴 통화가 이뤄졌다. 거기까지였다. 우린 이영선과 통화하지 못했다.

그러고도 또 실패했다. 계속했다. 윤전추가 데리고 있던 헬스 트레이너를 청와대에 함께 데리고 들어갔다는 제보를 받았지만 그를 찾지 못했다. 서울 강남의 피트니스계는 넓고도 깊었다. 서아무개 기자가 강원도 원주에 간호장교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그의 차 위에 간곡한 쪽지를 올렸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청문회에서 간호장교를 보는데 나도 모르게 반가웠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실패는 모두 더 결정적인 실패를 위한 예비였다. 진짜 실패, 눈 뜨고 코 베인 실패가 찾아왔다.

다 포기하고, 우병우만 찾기로 했다. 여론의 반응도 좋았다. 온 국민이 현상금을 걸고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찾았다. 그때, 정아무개 기자가 첩보를 받아왔다. 우병우 전 수석의 장모 김장자가 내일 어디론가 움직인다는 거였다. 제보자는 우병우 전 수석과 더할 나위 없이 가까운 사이인 사람이었다. 김장자와 우병우가 함께 있다고 했다. 온 국민이 우병우를 찾고 있을 때, 그는 장모인 김장자 소유의 강남 빌라에 머물고 있었다. 조를 나눴다. 한 조가 집 앞을 지키고, 다른 조는 움직이는 김장자를 잡기로 했다. 나는 유비의 아들인 ‘아두’를 찾는 조자룡의 심정으로 그 집 앞에 섰다. 움직일 게 아닌가. 밥이라도 먹으러 나올 게 아닌가.

아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들어가기로 했다. 근데 그 고급스러운 빌라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점심 무렵, 우 전 수석이 머무는 호수의 전용 주차장에 외제차가 한 대 섰다. 청년들이 내렸다. 직감했다. ‘코너링이 좋다던 그 아들이다.’ 대차게 따라붙었다. “저기요, 잠깐 얘기 좀 하시죠.” 청년들은 당황했다. 그렇지, 걸렸구나. “우병우 전 수석 아드님이십니까? 여기 왜 차를 주차했죠?” 청년 둘은 답은 하지 않고 빤히 위아래로 우리를 훑었다. “저희는 ○○○○호 인테리어 공사하러 왔는데, 누구시죠?” 그랬다. 그들은 김장자의 앞집 인테리어 공사를 하러 온 젊은 디자이너들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는데 뜻밖에 “그럼 송채경화 기자 아세요? 팬인데” 하더라. 내 앞자리라고 했더니 해맑게 좋아했다. “올라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그렇게 우 전 수석의 앞집에 입성했다.

김장자 집 대문 밑으로 쪽지를 넣었다. 세 번이나. 간곡하게, 완곡하게, 마지막은 강경하게. 무슨 얘기라도 좋으니 영혼을 털어 써줄 테니 얼굴을 뵙고 싶다는 나의 성의에 그는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1시간여,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간. 낯선 남자가 쓱 들어왔다. 그러곤 돌아갔다. 곧 경비 아저씨가 올라와 “여기, 기자 있어요? 기자가 여기 있으면 어떡해요?” 역정을 내며 우릴 내쫓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훗날 다른 경로로 듣기론, 그 집에 우 전 수석이 있었다고 했다. 우릴 보러 온 낮선 남자의 정체는 청문회를 보고 알았다. 그는 김장자의 집사였다.

오늘도 실패

이후로도 크고 작은, 어쩌면 기억도 나지 않는 실패를 맞았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을 20년 따라다닌 비서 인터뷰에 실패하고, 정유라와 삼성의 관계를 잇던 박원오 전 대한승마협회 전무 취재에 실패했다. 촛불은 이기는데 난 지는 기분이었고, 어떤 기자들의 활약으로 악당들이 한 명씩 제거될 때마다 또 지는 기분이었다. 그 생각들을 하니 눈이 붉어오며 글이 끊긴다. 이제 그만 쓰자. 뭐 잘한 얘기도 아니고 실패한 얘기를 쓰는데 지면을 맞추는 데 실패했다. 단언컨대, 오늘도 실패다. 그리고 또 실패하리라, 한 번도 실패해보지 않은 것처럼.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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