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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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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갈등’ 30년사 끊으려면

노·사·공익 위원 26명 임기 만료 다가와…

국회 ‘법 개정안 통과’가 관건
등록 2017-07-26 05:44 수정 2020-05-02 19:28

1987년 8월1일, 역사적 회의가 열렸다. 한국의 첫 최저임금을 정하는 최저임금심의위원회의 상견례 자리였다. 이후 24차례 회의에서 노동자위원과 사용자위원은 격렬하게 맞섰다. 이에 정부가 추천한 공익위원이 조정안을 내놓았다. 462.5원(저임금 직종), 487.5원(고임금 직종). 노동자위원이 요구한 620.8원, 662.5원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법정 시한을 열흘 넘긴 12월24일, 노동자위원이 사퇴한 가운데 사용자·공익위원은 조정안을 1988년 최저임금안으로 통과시켰다. 근로기준법 제정(1953년) 34년 만에 어렵게 세상에 나온 최저임금제가 빛을 잃는 순간이었다.
노사 모두 과도한 정부 개입 비판

웬만한 최저임금 제도 개선 방안은 모두 국회에 법안으로 제출돼 있다. 국회 본회의장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웬만한 최저임금 제도 개선 방안은 모두 국회에 법안으로 제출돼 있다. 국회 본회의장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30년 동안 최저임금이 순탄하게 결정된 적은 거의 없었다. 최저임금이 노동계와 경영계는 물론 경제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최저임금위원회(최저임금위) 내부에서 발생하는 파행과 대립은 불가피한 과정일 수도 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원래 임금은 노동자가 덜 가져가면 (사용자가) 이윤으로 더 갖게 되는 ‘제로섬게임’”이라며 “이해나 견해가 다를 수밖에 없는 노사가 갈등을 조정해나가는 과정은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최저임금제를 운영하는 다른 국가들과 달리, 한국의 최저임금위가 매년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최저임금 결정 구조에도 원인이 있다. 노동계와 경영계는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한다고 한목소리로 지적한다. 정권마다 제 입맛대로 최저임금을 좌지우지하려 들면서 최저임금위의 독립성이 훼손되고 노·사 위원은 ‘들러리’로 전락한다는 비판이다.

지난 7월15일 결정된 2018년 최저임금(7530원·인상률 16.4%)을 두고서도 ‘문재인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강하게 작동했다는 노사의 볼멘소리가 나왔다.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선언으로 인해, 노동자위원 요구안(당장 1만원으로 인상)과 사용자위원 요구안(동결)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까. 현행법상 최저임금위는 독립적인 심의·의결 기구다. 임기가 3년인 노·사·공익 위원 9명씩 총 27명으로 구성된다. 이때 노·사 위원은 전국 단위의 노동조합이나 사용자단체의 추천을 받아 고용노동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제청하지만, 공익위원은 별도의 추천 절차가 없다. 노동부 장관이 노동문제에 학식이나 경험이 풍부한 사람 등을 제청하면 그만이다. 공익위원이 정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근본적 한계다.

정부가 선임한 공익위원의 힘은 막강하다. 노·사 위원이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공익위원이 제시한 조정안(공익위원안)이 표결에 부쳐진다. 2008~2017년(의결 연도 기준) 10년간 7차례나 조정안 또는 조정안 범위에서 사용자가 제시한 최종안대로 최저임금이 결정됐다. 만약 노·사 위원안이 함께 표결에 넘겨지면 공익위원이 캐스팅보트를 쥔다. 올해도 공익위원들이 노동자위원안(7530원·15명 선택)으로 기운 결과 사용자위원안(7300원·12명)이 밀렸다.

정부의 입김을 줄이고 노사 합의 정신을 살리는 다양한 방안이 오래전부터 제시돼왔다. 노동계와 시민단체들은 노·사·공익 위원의 3자 구도는 유지하되 공익위원의 중립성·책임성은 높이는 대안을 요구한다. 노·사·정 3자의 참여는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이기 때문이다. 공익위원의 최소 절반을 국회가, 나머지는 노사 또는 노·사·정이 추천하는 방식과 노사가 서로 제출한 후보자 명부를 두고 상호 동의하는 후보자를 공익위원으로 선출하는 ‘노사 동의 방식’ 등이다.

공익위원의 대표성을 높이도록 국회가 추천하자는 안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온다. 반면 경영계에선 최저임금위 폐지를 주장한다. 그러면서 노사가 의견을 진술하되 최종적으로 정부가 결정하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

공익위원 독립성 확보 등 논의 반복

최저임금 결정 기준을 현실화해 정부 성향에 따른 최저임금 인상률의 널뛰기를 방지해야 한다는 논의도 반복돼왔다. 현행 최저임금법이 정한 결정 기준은 노동자의 생계비, 유사노동자 임금, 노동생산성, 소득분배율 등이다. 노동계는 ‘비혼 단신 노동자의 생계비’ 대신 ‘가구 생계비’로 생계비를 산출해 저임금 노동자가 2~3인 가구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양가족의 생계비 외에 물가상승률 등 새 지표를 추가해 최저임금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반면 경영계에선 최저임금 부담을 낮추는 방안을 요구해왔다. 영업이익률이 낮은 택시·경비·편의점·음식점업 등 8개 업종에 대해선 최저임금을 낮게 적용하고, 상여금·식대·기숙사 비용을 최저임금 범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에 최저임금위는 하반기에 제도개선특별위원회(가칭)를 구성해 여러 쟁점을 논의한 뒤 결과물을 정부에 건네기로 했다. 최저임금위 관계자는 “(위원장과 노·사·공익 위원 2명씩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일단 8~9월에 만나 특위에서 어떤 내용을 다룰지 논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미 있는 결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최저임금위는 2015년에도 제도개선위원회를 띄워 공익위원의 노사단체 추천, 최저임금 결정 방식 개편, 업종별·지역별 차등화 등을 토론했다. 그래도 노·사 위원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합의된 내용은 위원회의 홍보·교육 활동 강화 등 원론적 수준에 그쳤다.

노사의 시선은 대의기구인 국회로 향한다. 웬만한 제도 개선 방안은 이미 국회에 법안으로 발의된 상태다. 20대 국회에 제출된 최저임금법 개정안만 26건에 이른다. 미국처럼 법 개정으로 국회가 최저임금을 결정해야 한다는 개정안도 나와 있다. 현행 최저임금위 체제를 이어가되 공익위원 추천을 국회 전담, 노·사·정 또는 대통령·국회·대법원장이 나눠 하는 법안도 올라 있다.

아예 법으로 최저임금 하한선을 못박자는 법안도 많다. 그 수준은 전체 노동자의 통상임금, 평균임금, 정액급여의 50~60%로 다양하다. 최저임금을 적용받지 않거나 덜 줘도 되는 사각지대를 없애는 법안도 제출돼 있다. 수습 노동자, 감시·단속 노동자, 장애인 노동자 등이 대상이다. 최저임금 미준수 사업주에게 노동자의 손해를 10배 범위에서 배상토록 하는 법안, 최저임금위 회의를 공개하고 방청을 허용하는 법안 역시 발의돼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언제부터 최저임금법 개정안 심의에 들어갈지는 불투명하다. 5개 원내정당의 합의 없이 안건 상정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간사 한정애 의원은 “8월 결산 국회에서 (논의를) 시작해 (9월) 정기국회에도 이어갈 계획”이라면서도 “(여야 간 쟁점 차이가 커서) 하반기에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26개 최저임금 법안 ‘대기 중’

시간이 많지는 않다. 내년 최저임금 심의는 4월이면 시작된다. 특히 내년 1~4월에는 위원회의 노·사·공익 위원 27명 중 26명의 임기가 만료되는 ‘빅 이벤트’가 있다. 그중 공익위원 9명은 전원 교체된다. 노동부가 본격적으로 위원 선정 작업에 들어가는 1~2월 전에 국회에서 제도 개선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적어도 3년간 최저임금 결정 과정의 공정성·중립성·대표성 시비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국회가 30년 동안 이어진 ‘최저임금 갈등’을 끊을 때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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