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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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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생각하지 마

1987년 헌법이 태어날 때 생략된 권리들… 서른 살, 새 헌법을 갖고 싶다
등록 2017-07-11 06:42 수정 2020-05-02 19:28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개헌 국민투표를 2018년 6월 치러지는 지방선거와 함께 실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공약대로라면 개헌까지는 이제 꼭 1년이 남았다.
국회는 바쁘다. 내년 2월 개헌안 마련을 목표로 하는 헌법개정특별위원회는 ‘대통령 4년 중임제’냐, ‘의원내각제’냐 하는 ‘권력구조 개편’을 놓고 논쟁 중이다. 국민 기본권을 보장하는 ‘권리구조 개편’은 후순위다. 이유는 간단하다. 개헌 논의 과정에 국민은 배제돼 있기 때문이다.
개헌특위는 제헌절인 7월17일에 맞춰 누리집을 열고 8월부터는 지역별 국민대토론회·국민여론조사 등을 할 계획이다. 그러나 여전히 국민은 개헌의 주체가 아니라 여론 수렴 대상에 불과하다. 30년 전인 1987년에도 정치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에 매몰됐다. 그로 인해 시민사회는 헌법에서 정작 중요한 국민의 권리를 확장해내지 못한 뼈아픈 경험이 있다.
다른 국가는 어떨까. 아일랜드는 2012년 개헌 논의를 하는 ‘헌법회의’에 정치인 33명 외에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 66명을 참여시켰다. 1년간 논의 끝에 헌법회의는 신성모욕죄를 삭제하고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개헌안을 만들었다. 이 가운데 국회의 동의를 얻은 동성결혼 합법화가 국민투표를 거쳐 최종 결정됐다. 이를 두고서도 아일랜드 국민은 “의회가 헌법회의 의견을 많이 수용하지 않았다”며 분노했다. 결국 2016년에 정치인 없이 국민 100명으로 구성된 ‘시민의회’가 탄생했고, 이곳에서 낙태 합법화와 기후변화 대책 등의 개헌안이 마련되고 있다.
‘국민 개헌’은 대통령과 국회의 의지만 있다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 먼저 실험을 해봤다. 현행 헌법으로 30년을 살아왔고, 새 헌법으로 30년을 살아갈 1987년생과 함께 개정안을 만들었다. 취업준비생, 성소수자 활동가, 변호사, 비정규직 노동자, 작가, 국회의원 비서관, 청년정당인, 대학원생, 방송국 자회사 디자이너 등 9명이 한 달 동안 현행 헌법과 이를 뛰어넘는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공부하고 토론한 결과물이다.
먼저 1987년생의 삶에서 헌법에 새로 담아야 할 우리의 권리를 찾았다. 이를 토대로 헌법 조문도 직접 썼다. ‘서른 살의 헌법’이다.
취재 서보미·정환봉 기자, 편집 진명선 기자, 디자인 장광석

세상에 생산직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김진우(30)

‘타스, 토스, 마스.’ 보통 사람들에겐 생소한 이름이지만 나에겐 익숙하다. 자동차 조향장치나 브레이크 등에 들어가는 부품이다. 불량이 나면 사고로 이어진다. 하나도 빠짐없이 품질 검사를 해야 한다. 이런 부품이 하루에 2천 개씩 내 손과 눈을 거쳐 기아·현대자동차로 납품됐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만도헬라일렉트로닉스’(만도헬라)에서 4년 전부터 내가 해온 일이다. 만도헬라 직원은 아니다. 도급업체 소속이다. 만도헬라 공장에서 일하는 350명 남짓의 노동자가 다 그렇다. 현장 감독을 하는 주임 등 몇 명을 빼면 생산직 모두가 도급업체 소속 비정규직이다.

공장에서의 하루는 길다. 12시간 맞교대로 일한다. 1년에 쉬는 날은 보름 남짓. 주말도 명절도 없다. 밤 9시 일을 마친 뒤 집에 가면 5살, 3살 두 아들이 기다린다. 아빠랑 놀고 싶다고, 아이들은 퇴근 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하는 유일한 한두 시간이 흐르면 지친 아빠도, 아빠가 그리웠을 아이들도 까무룩 잠이 든다. 다음날도 아침 8시30분까지 출근해야 한다. 요즘 부쩍 흰머리가 늘었다. 기본급은 140만원밖에 되지 않는다. 남들 쉴 때 일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키우며 살 수 없다. 야근, 잔업 수당을 다 받아야 손에 쥐는 돈은 200만원이 조금 넘는다.

부당한 일을 부당하다고 말이라도 후련하게 하고 싶었다. 올해 2월 설립된 노조에 가입했다. 하지만 도급업체와 교섭하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주요 노조 간부들의 부서를 바꾸고 교대 근무 방식을 변경했다. 노조의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5월30일부터 파업을 시작했다. 회사는 바로 ‘알바’ 노동자들을 공장에 투입했다. 파업 기간에 대체근로는 불법이지만, 우리는 도급업체 소속이라 원청 만도헬라가 대체근로를 하는 건 문제없다는 것이 회사의 주장이다. 억울해도 이야기를 들어줄 곳이 없다. 고용노동청에도 민원을 넣어봤다. 하지만 두세 달이 지나도 답이 없다. 회사 편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부터 공장에서 일했다. 공장이 굴러가는 흐름에는 빠삭하다. 처음 일한 곳은 인천 남동공단이었다. 일하다 손이 잘리거나 다치고 스스로 목숨 끊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1년에 350일씩 일하면 그렇게 된다. 피곤이 몸을 이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야기를 들어줄 곳은 없다. 이 세상에는 전문직이나 사무직만 있지 않다. 다수가 생산직으로 일한다. 우리가 일하는 환경이 나쁘다는 것은 결국 우리나라의 커다란 한 조각이 나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20~30대 청년 노동자에게 희망이 없다면, 그들이 이끌어갈 우리나라의 미래도 없다고 생각한다. 일할 때는 개돼지처럼 부리고, 버릴 때는 한순간에 내팽개치는 일이 반복되면 안 된다. 노동을 존중해야 한다는 우리의 말이 국회나 언론, 노동부에 가닿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의 바람이 헌법에도 담기길 바란다.

한없이 미운 회사지만 일손 놓고 있는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맨날 하던 일을 남한테 맡긴 꼴이니까. ‘중요한 부품인데 잘못 작동되면 어쩌지’ ‘부품 검사시 포인트를 잘 알아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파업 중에도 머릿속을 맴돈다. 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잘하는 일을 마음 놓고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존중받는 세상이 오길 빌어본다.

여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상상 성소수자 활동가 이호림(30)

꿈결 같은 8년이었다. 23살에 만난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새롭게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했지만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같이 사는 게 좋구나. 이렇게 살아야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일상을 보내는 지금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연애 1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2009년 마지막 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부모님에게 고백했다. 레즈비언인 딸의 삶을 부모님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네 인생인데,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복하게 살면 되지 않겠니.” 많이 기뻤고, 홀가분했다. 성적 지향(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이나 성별 정체성(트랜스젠더, 인터섹슈얼 등)으로 인해 가족에게 내쳐질까 두려워하고, 결국 연이 끊기는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커밍아웃 이후에도 부모님·동생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새해를 맞을 수 있는 나는 행운아였다.

또래 친구와 직장 동료들도 특별한 연애에 덤덤하다. “그래? 내 친구 중에도 게이, 레즈비언이 있어.” 가끔 기성세대에게서 느껴지는 싸늘한 시선과 확실히 다르다.

때로 가까이가 아닌, 먼 곳의 한마디에 더 상처받는다. ‘정치의 언어’가 그렇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저는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는다. 합법화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충격적이었다. 주변 성소수자들도 일상에서 부딪히는 차별에 고통받지만, 종종 정치인이 내뱉는 ‘배제의 말’이나 그들이 만드는 ‘배제의 제도’에도 절망한다.

가장 견고한 제도적 차별은 ‘결혼 금지’다. 이따금 결혼하는 상상을 한다. 연인이 이성이었다면 진작 결혼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비슷한 시기에 연애해 결혼한 다른 친구를 보면 약간은 박탈감도 느낀다. ‘평생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지금 같이 지내는데도, 결혼을 못한다는 자체가 가장 큰 차별이다.

자연스럽게 성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생겼다. 5년 전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에서 활동을 시작해 2년 전부터는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성소수자 노동권,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 HIV/AIDS 인권, 동성결혼 법제화 등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고려대 보건과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성소수자의 ‘건강권’ 연구도 하고 있다. 경험적으로 아는 성소수자의 심각한 건강 문제, 이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요인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만들고 싶어서다. 최근 참여한 ‘레인보우 커넥션프로젝트 연구팀’이 연구하는 주제는 ‘트랜스젠더의 건강’이다.

헌법이 성소수자 차별 금지를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편견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각 정부 부처가 성소수자의 권리 보장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연인과 결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개헌이 이뤄질 거란 기대는 크지 않지만. 우리는 개헌에 대해 더 이야기해야 한다.

예술적 개헌이 필요하다 작가 정지우(30)

마냥 소설이 좋았다. 15살에는 시리즈를 끼고 살았다.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재미에 빠져 지냈다.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새벽까지 글을 썼다. 장래희망엔 ‘소설가’를 적었다. 좋아하는 글만 써도 먹고살 수 있는 미래가 그려졌다. 이영도의 , 이우혁의 처럼 판타지와 무협소설 등 장르소설이 각광받던 시절이었다.

대학 전공으로 국문학을 선택했다. 본격문학(순수문학)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다양한 글이 쓰고 싶어졌다. 학교와 철학아카데미에서 철학·사회학 등 인문학을 파고들었다. 맘껏 책을 읽고 싶었다. 휴학·방학 기간을 활용해 1∼2년은 도서관에 틀어박혀 매년 100∼200권의 책을 봤다. 15년을 매일 글을 읽고 쓰며 지냈다.

글에 대한 열정이 커져갈수록 문학계의 열악한 현실이 눈에 밟혔다. 장르소설계도 위축된 상태였다. 글쟁이로 먹고살 길이 보이지 않았다. 문예지 등단이 이른바 ‘제도권’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라 생각했다. ‘등단 맞춤용’ 글을 쓰려고 무척 노력했다. 어느 날 ‘이상한 글’이 보였다. 내가 원하는 글도, 남이 원하는 글도 아니었다. 주변 소설가나 문인들의 이야기도 귀에 박혔다. “문단에 들어간다고 인생이 크게 바뀔 거라는 기대는 버려.” “설령 등단하더라도 극소수를 제외하고 자생적으로 먹고사는 건 불가능해.”

새로운 길을 내기로 했다. 무작정 출판시장으로 뛰어들었다. 25살이던 2012년 봄, 첫 책 을 썼다. 김난도의 , 엄기호의 등의 책이 쏟아져나올 때였다. 청춘 담론이 정작 청춘이던 내 삶을 겉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청춘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뒤이어 (2014), (2015) 등 5권을 냈다.

5쇄를 찍은 책의 인세 수입은 형편없었다. 대학 시절에는 과외해서, 대학원 때는 조교 근무와 교정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혼자라서 버틸 수 있었다. 결혼이야 마음 맞는 두 사람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해도, 출산과 육아를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름 있는 작가들도 대학 교직으로 몰리는 게 현실이다.

글쓰기를 멈출 생각은 없다. 지금 운영 중인 팟캐스트 에 소개한 고전을 엮어 ‘문학에 기대어 청춘을 견디는 방법’을 주제로 조만간 책도 낼 생각이다. 그래도 요즘엔 강연, 문화센터 수업, 방송 출연으로 부수입이 생겨 예전보다 걱정을 덜었다. ‘정부 선정 도서’로 뽑힌 세 권의 책에 나온 보조금도 도움이 됐다.

창작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책 한 권을 쓰는 6개월, 1년 동안 수입 없이 견뎌야 할 때도 있다. 현대미술, 국악, 희곡, 소설, 영화 등 다양한 문화·예술은 지금도 정부 지원 없이 시장논리에 맡겨두면 다 말라버릴 지경이다. 문화 다양성이 사라지면 개인의 취향과 가치관도 건조해질 수밖에 없다. 창작에 대한 정부·재단의 보조금이나 투자가 늘어나야 한다.

문화를 창작하고 향유할 권리만큼 충분히 쉬고 여가를 즐길 권리도 중요하다. 한때 취업 준비를 했다. 낮엔 기사, 밤엔 글을 쓰려 했다. 그러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16시간을 직장에 매달려야 하는 노동조건이 걸려 취업 생각을 접었다. 하루 8시간 자고, 8시간 일하고, 8시간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조화로운 생활이 아닐까. 새로운 세대는 ‘나만의 8시간’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헌법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 청년정당 ‘우리미래’ 당직자 박세미(30)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난겨울은 그럴 수 없었다. 혼자 가기 머쓱해 페이스북에서 만난 이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서울 광화문으로 향했다. 일행 중 청년정당을 준비하는 분이 있었다. 함께해보자고 했다. 그 선한 의지를 돕고 싶었다. 직장을 다니던 터라 처음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관리 정도만 하려 했다. 지난해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창당 준비가 시작됐다. 이직을 고민하던 때였다. 일단 회사를 그만두고 3월 목표인 창당까지 내 에너지를 모두 쏟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창당을 마치고 보니 대선 때까지 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청년정당 ‘우리미래’의 홍보국장까지 맡게 됐다. 대학 졸업 뒤 6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모아온 적금을 깨면서 이젠 ‘정치’를 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겨울 촛불시위는 시민인 내가 청와대와 정부, 국회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겠다는 의무감을 주었다. 그리고 TV에 나오는 정치인의 정치가 아니라 시민의 정치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고, 그 일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당에서 일하며 안 보이던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정치 과목을 배웠지만 정치가 내 삶과 가깝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지금은 정치가 내 삶과 밀접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가 내 삶과 무관하다고 느꼈던 것은 그만큼 우리 스스로 정치를 소외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당원들과 모이면 정치 이야기를 주로 한다. 다들 스스럼없이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좋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젊은 사람이 정치 이야기를 하면 “네가 뭘 아냐”며 면박을 주는 분위기다. 그래서 청년들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았나 한다. 정치 이야기를 하고 다양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사회에 반하는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우리 삶과 정치가 변화하려면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헌법도 마찬가지다. 우선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권한이 집중돼 있다. 권력이 나뉘고 더 다양한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지방자치도 활성화해야 한다. ‘민의의 전당’이라 불리는 국회도 바뀌어야 한다. 진정한 민의를 반영하도록 청년 등 여러 목소리를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이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직선거법이 바뀌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던 대통령이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것은 너무 많다. 헌법이 그 변화의 버팀목이 되면 좋겠다. 어렵고 아무도 안 보는 헌법이 아니라, 편하게 읽고 우리 삶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헌법이 필요하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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