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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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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은 링 밖의 싸움이 더 두렵다

최근 슈퍼웰터급 한국챔피언 된 카메룬 출신 난민 복서 이흑산

2015년 세계군인대회에서 탈출… “내 목숨이 한국 정부에 달려”
등록 2017-06-06 10:23 수정 2020-05-02 19:28
이흑산은 한국 프로복싱 슈퍼웰터급 챔피언이다. 5월27일 챔피언 벨트를 따냈다. 그가 오직 두려워 하는 건 ‘추방’이다.
그는 카메룬 군대를 이탈한 한국 난민인정 신청자다. 한 차례 탈락했고,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고국에 강제 송환되면, 군은 그를 감옥에 넣을 것이다. 과거 군 감옥 생활을 떠올리면 치가 떨린다. 그에게 복싱은 희망이다. ‘챔피언 벨트라도 있으면 그리 쉽게 추방하진 않겠지’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오늘도 샌드백을 두드린다.
구룽, 차우다리, 마이따띠왓, 슝덴쥔은 지난 5월 한국 돼지농장에서 똥물을 치우다 질식사했다. 네팔(2명), 타이, 중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집안이 어려워 돈 벌러 한국까지 온 마당에 피하거나 가릴 일은 없었다. 그들에게 아무도 돼지똥이 만들어내는 유독가스에 생명과 신체가 위협당할 수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고 안전장비도 주지 않았다.
항상 강제 송환을 걱정하는 챔피언과 영혼마저 떠난 이주노동자들이 묻는다. 한국의 200만 이주민들 앞에 놓인 진입과 생존 장벽에 대해.
취재 김선식 기자·김현대 선임기자·정환봉 기자, 사진 류우종 기자, 편집 황예랑 기자, 디자인 장광석

‘내보낼까. 아니, 조금만 더 데리고 있어볼까.’

코치는 고민이 깊어졌다. 선수와는 2016년 가을 처음 만났다. 경기도 가평에서 다른 복싱체육관과 스파링 시합이 있었다. 충남 천안에서 운동하는 선수들과의 시합이었다. 그쪽에 흑인 선수 2명이 있었다. 아프리카 카메룬에서 온 국가대표 군인선수들이었다. 한 명은 실력이 수준급이었지만, 나머지 한 명은 국가대표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해 보였다. 그 ‘국가대표 같지 않은’ 선수가 2016년 말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왔다. 복싱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오고 싶으면 오라고 했는데 진짜 올 줄은 몰랐다.”

키 180cm, 팔 길이 187cm

강원도 춘천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코치는 2017년 2월11일 춘천 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체육관 소속 정주현 선수의 WBC 유라시아 플라이급 챔피언전이었다. 새로 온 카메룬 선수에게도 출전 기회를 주기로 했다. 68kg급 6라운드 오프닝 매치를 만들었다. 그 선수를 따로 가르치진 않았다. 체력 훈련만 같이 하도록 했다. “우리 애들 가르치기도 바빴고,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애”였기 때문이다. 오프닝 매치는 무승부로 끝났다. 시합 내용도 썩 좋진 않았다. 다시 고민에 빠졌다. ‘쟤를 내보낼 것인가.’

국가대표급 수준이 아니었다. 신체적 조건(피지컬)만큼은 ‘어마어마’했다. 키 180cm, 리치(팔 길이) 187cm, 몸무게 67kg의 체격에 뛰어난 동체시력과 동물적인 반사신경을 갖췄다. 발목도 얇았다.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이 그렇듯, 복싱선수에게 얇은 발목은 유연성과 힘의 원천이었다. 체력도 월등했다.

“우리 체육관 소속 챔피언들(유라시아챔피언 1명, 한국챔피언 2명)도 나름 ‘체력’ 하면 한가락 하는 선수들인데 걔를 못 당한다. 8km 달리기(road work)를 하면, 챔피언들이 ‘많이’ 처져서 들어온다. 많이.” 지난 5월30일 밤 9시30분, 춘천 아트복싱체육관에서 만난 이경훈 코치(전 한국 미들급 챔피언)는 ‘많이’를 힘주어 말했다.

코치가 또 하나 주목한 건 체중이었다. 카메룬 선수는 더 이상 뺄 살이 없었다. 평소 몸무게대로 시합에 나가도 됐다. 다른 선수들처럼 시합 전 체중 감량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다. 복싱선수에게 체중 감량은 극한의 스트레스로 알려졌다. 시합 전 컨디션 조절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카메룬 선수는 평소 몸무게가 67kg이었다. 한창 훈련을 해도 66kg까지만 빠졌다. 평소 몸무게대로 웰터급(66.68kg 이하) 경기에 나가면 됐다.

카메룬 선수에겐 한국 선수들에게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절박감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는 카메룬 출신 난민인정 신청자였다. 챔피언 타이틀이라도 있어야 쉽게 ‘강제 송환’되지 않을 것이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코치도 그의 사정을 잘 알기에 쉽게 내칠 수 없었다. 코치는 그에게 ‘이흑산’이란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신의 성을 따서 ‘이’, 피부가 까매서 ‘흑’, 최고의 챔피언이 되라는 뜻에서 ‘산’이었다.

이흑산은 까만 얼굴에 금색 ‘레게머리’를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서울 이태원에 가서 머리카락을 여러 갈래로 땋거나 뭉친 ‘드레드(dread) 헤어’를 완성했다. 지난 5월30일 밤 11시, 아트복싱체육관에서 만난 그는, “내 머리는 자유를 뜻한다”고 말했다. 카메룬에서 10여 년 삭발한 머리로 군인 생활을 할 땐 상상할 수 없던 헤어스타일이었다.

21살, 군인 복서가 되다
이흑산 선수(오른쪽)가 지난 5월27일 한국 슈퍼웰터급 챔피언전에서 이규원 전 미들급 챔피언과 경기하는 모습. 아트복싱체육관 제공, 류우종 기자

이흑산 선수(오른쪽)가 지난 5월27일 한국 슈퍼웰터급 챔피언전에서 이규원 전 미들급 챔피언과 경기하는 모습. 아트복싱체육관 제공, 류우종 기자

이흑산(본명 압둘라예 아산·Abdoulaye Assan)은 아프리카 중서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카메룬공화국의 수도 야운데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아프리카 가봉으로 떠났다. 형제들과 만난 기억도 없다. 어릴 적 할머니댁에서 자랐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16살 때부터 킥복싱을 했다. 그저 운동이 좋았다. 이흑산의 인생을 바꾼 건 2002년에 만난 한 군인이었다. 군대에서 복싱선수로 국제대회에 출전하곤 했던 이였다. 그가 ‘넌 킥복싱보다 복싱이 더 잘 맞을 것 같다’며 복싱을 가르쳐줬다.

2004년, 스물한 살 이흑산도 카메룬 군인이 됐다. “카메룬에선 좋은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없다. 군대가 운동선수를 구한다는 걸 알았고, 직업 없이 살 바엔 직업군인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복싱선수로 군인이 되었다.”

그가 상상했던 군대의 모습은 아니었다. 군인 신분증과 군복을 받았지만, 군사훈련은 받지 않았다. 군대는 국제대회에만 관심을 가졌다. 대회를 두 달 정도 앞두고 군인선수들을 불러 훈련을 하거나, 시시때때로 인력이 필요하면 선수들을 불렀다. 그는 평소 집에서 생활했다. 군대는 월급을 주지 않았다. “군 간부들이 짜고 사병들 월급을 자기들이 대신 받아갔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마피아’라고 불렀다.”

월급이 없는 직업군인이던 탓에, 생업은 따로 해야 했다. 시장 옷가게에서 옷을 떼다가 시장을 돌며 팔았다. 월급을 떼먹는 간부들은 대회를 앞두고 훈련을 가혹하게 했다. 코치 역할을 하는 간부는 “57kg급 체급에 맞추라”고 말했다. 평소 몸무게 67kg에서 10kg을 빼라는 얘기였다. 체급으로 따지면 웰터급(66.68kg 이하)에서 네 체급 아래 페더급(57.15kg 이하)으로 맞추란 것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하라니까 할 수밖에 없었다.” 체중이 57kg 넘으면, 음식은 물론 물도 주지 않았다. 저녁밥을 안 주고 다음날 새벽 5시에 7~10km 산악 달리기를 시켰다. 큰 가방에 무엇이든 넣어 25kg 넘을 때까지 채운 뒤, 그 가방을 메고 뛰라고 했다.

군인들이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군대는 군인선수들이 민간 경기에 출전하는 걸 금지했다. 이흑산은 2008년 무렵, 카메룬에서 복싱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회에서 눈에 띄면 스폰서도 생기고 세계 무대에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군대는 그의 출전을 허가하지 않았다. 무단 출전한 그가 우승했다. 경기가 끝나고 군인들이 그를 잡아 감옥에 넣었다. 감옥생활 두 달간 무수히 맞았다. “군인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게 한 다음 양팔을 붙들고 벨트로 채찍질을 했다.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면 발로 차고 밟았다.”

이흑산은 월급도 ‘기회’도 없는 군대에서 탈출하는 날을 꿈꿨다. 2010년 무렵부터 기회만 오길 기다렸다. 월급을 빼앗고, 투옥하고, 때린 군 간부들이 역설적으로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정부 돈을 타내려고 국제대회 출전 성사를 위해 열성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코리아’에서 열리는 군인대회에 출전한다고 말했다. 2015년 10월2일부터 열린 경북 문경 세계군인대회였다. 이흑산은 한국에 대해서는 ‘서울’이란 도시가 있다는 것 말곤 아는 게 없었다. 대회 닷새째 드디어 기회가 왔다. 카메룬 선수단이 다른 나라 복싱 경기 관전차 경기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잠시 여유 시간이 있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원하는 건 자유뿐이었다. 한국이든 다른 나라이든 상관없다. 카메룬 군인들 손이 뻗치지 않는 곳, 군인들이 나를 잡을 수 없는 곳이면 됐다.”

4살 아래 동료 선수와 경기장 밖을 천천히 걷다가 무작정 택시에 올라탔다. 고속터미널로 가자고 했다. 서울행 티켓을 끊었다. 서울에 있는 모텔에서 2주를 지냈다. 주머니엔 65만원이 남아 있었다. 유엔난민기구를 통해 난민인정 신청을 할 수 있다는 걸 들었다.

2015년 10월16일 서울 출입국관리사무소를 방문했다. 난민인정 신청서는 영문 서류였다. 해석이 어려웠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통역을 거쳐 프랑스어로 작성했다. 난민인정 신청서를 내자, 6개월짜리 체류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G-1-5 비자였다. 얼마 뒤, 출입국관리사무소 면접조사를 받았다. 예전 페이스북으로 지인의 지인이 운영한다는 복싱체육관이 한국에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 체육관이 있다는 충남 천안으로 지하철을 타고 갔다. 그 체육관에서 다시 복싱을 시작했다. 2~3개월 뒤, 출입국관리사무소 연락을 받았다. 통지서를 받아가라고 했다. 난민불인정결정통지서였다. 영문과 한글로 되어 있었다. 직원의 설명을 듣고, 또 다른 서류를 냈다. “난민에서 탈락했으니 다시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인지 모른 채 ‘이의신청서’로 추정되는 서류를 써 냈다.

난민불인정, 그러나 펀치
카메룬 수도 야운데에 있는 친구 집에 방문한 이흑산 선수. 이흑산 제공

카메룬 수도 야운데에 있는 친구 집에 방문한 이흑산 선수. 이흑산 제공

이흑산은 자신이 제출했거나 받은 어떤 서류도 현재 가지고 있지 않다. 앞으로 진행되는 난민심사와 결정 절차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단지 불안한 마음만 안고 6개월마다 체류 기간을 연장할 뿐이었다. 그 사이 한국의 사계절을 봤다. 2016년 12월, 함께 탈출했던 동료 복싱선수가 비자 갱신 기간을 놓쳤다. 동료는 기간이 만료된 비자를 들고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갔다가 바로 인천공항 출국대기실로 이송됐다. 첫 면회 날, 동료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달라.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너무 두렵다”고 말했다. 이흑산과 그는 함께 울었다. 이흑산도 언제 카메룬으로 추방될지 모를 몸이었다. 문득 경기도 가평에서 스파링 시합 때 본 이경훈 코치가 떠올랐다. 이 코치는 시합 경험이 많고 체육관에서 여러 명의 챔피언을 배출했다고 했다. 그에게 배우고 싶다고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그도 ‘오케이’했다.

한국 선수들은 이흑산과 대결을 피했다. ‘너무 세 보인다’는 이유였다. 시합 상대가 마땅치 않은 건 한국챔피언급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수 자체가 적었다. 한국 프로복싱은 1980년대 말 전성기를 누리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국내 유일 세계챔피언이던 지인진 WBC 페더급 챔피언이 2007년 7월25일 챔피언 벨트를 반납한 사건은 그 정점이었다. 지인진은 세계챔피언으로서 1년에 한 차례 경기를 하고 대전료 1천만원을 받으며 생활고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자연스레 프로복싱 선수도 급감했다. 이 코치는 “1980년대 말 전성기 때 한 체급에 선수가 150명은 넘었는데, 지금은 웰터급 기준으로 프로경기에 뛸 수 있는 선수는 고작 20명 정도”라고 말했다.

춘천 생활을 시작한 뒤, 이흑산의 두 번째 경기가 어렵사리 잡혔다. 상대는 직전 판정패를 제외하면 4전 4승(4KO) 전적의 한국 미들급 유망주 양현민 선수였다. 경기는 2017년 4월2일 대전 우리들공원 야외 특설링에서 68kg급 6라운드 경기로 열렸다. 이 코치는 이번엔 이흑산을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이흑산은) 가르치는 대로 쫙쫙 받아먹었다.” 이 코치는 승리를 예감했다. 관전 포인트는 이흑산의 맷집이었다. “펀치가 좋은 선수를 상대로 맷집이 좋은지 안 좋은지 한번 보고 싶었다.”

이날 경기 1라운드 막판에 이흑산이 한 차례 다운을 빼앗았다. 기습적인 왼손 스트레이트 펀치가 상대 얼굴에 적중했다. 2라운드 초반 상대가 거칠게 밀어붙였다. 1분여가 지날 무렵, 이흑산이 상대를 링 사이드로 몰았다. 왼손 스트레이트가 상대 턱에 두 차례 내리꽂혔다. 상대는 주저앉았다. 심판이 카운트하자 상대는 일어서려다 앞으로 한 차례, 뒤로 한 차례 중심을 못 잡고 쓰러졌다. 경기가 중단됐다. 이 코치는 “기본적으로 사우스포(왼손잡이 자세)인데다 어퍼컷이랑 왼손 스트레이트가 참 좋습니다. 펀치가 좋습니다. 진짜 좋아요”라고 말했다.

“훈련보다 정신적으로 힘들어”

이 코치는 바로 한국챔피언전을 구상했다. 마침 슈퍼웰터급(69.85kg 이하) 챔피언이 공석이었다. 5월27일 경기도 안산 상록뷔페 실내 특설링에서 10라운드 경기가 열렸다. 이흑산과 전 한국 미들급 챔피언 이규원 선수의 한국챔피언 타이틀전이었다. 이흑산은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뒀다. 이흑산은 한 달 전 경기와 비교해 몸놀림이 달라졌다. 위빙(상체를 아래위로 움직이며 훅 공격을 피하는 방어 기술)이 좋아졌고 치고 빠지는 움직임이 과감하고 부드러워졌다. 이 코치는 “어퍼컷과 훅 콤비네이션에 역점을 두고 훈련했다. 잽도 한 달 전에 비해 훨씬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흑산은 “상대가 버팅(선수 머리끼리 부딪치는 것)이나 클린치(상대를 끌어안는 것)를 너무 많이 해서 하고 싶었던 기술을 많이 써먹지 못했다”며 아쉬위했다.

그에게 가장 힘든 훈련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몸은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난민인정 신청한 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만일 카메룬으로 추방되면 어떤 일을 당할지 그런 생각이 자꾸 나서 정신적으로 힘들었습니다.”

이 코치는 자기 선수에게 엄격했다. 그는 이흑산의 세계챔피언 가능성에 대해 “지금 실력으로는 언감생심”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피지컬이 워낙 좋고 자세나 기술이 가르치는 만큼 좋아지고 있어 두세 달 훈련하면 아시아 챔피언은 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코치의 근심은 이흑산의 실력이 아니었다. 대회 자체가 열리기 쉽지 않은 한국 복싱계 조건이 문제였다. “아시아 챔피언 타이틀전만 해도 대전료 1천만~1500만원에 부대 비용까지 5천만~6천만원이 든다. 그런 돈을 복싱대회에 투자할 사람들을 구하기가 힘든 환경이다. 당장은 4~5개로 쪼개진 복싱협회끼리 통합 타이틀전을 성사하거나, 외국 선수를 초청해 대회를 만드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

한국 프로복싱의 열악한 환경만큼 한국챔피언 이흑산의 생활도 팍팍하다. 그는 한국챔피언전 대전료로 100만원을 받았다. 그가 사는 체육관 합숙소의 유지는 후원에 의지하고 있다. 이 코치와 인연 있는 박찬홍 우리엔텍 대표가 체육관 뒤편 원룸 전세를 구해줬다. “세계챔피언 만들 때까진 합숙소로 쓰라”고 했다. 숙소 관리비는 이 코치의 몫이다.

식당 알바·공장 막노동도

수입이 없는 이흑산은 하루 2시간 정도 체육관 회원들을 가르치고 한 달 16만원 정도를 이 코치에게서 받는다. 이 코치가 지인을 통해 소개해준 아르바이트도 가끔 나간다. 한국챔피언전을 앞두곤 춘천 닭갈비 식당에서 접시 닦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조차 이흑산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이틀이나 닷새 만에 그만두게 됐다. 지난 6월1일 그는 새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돌을 만드는 공장에서 흰색 돌을 골라내 나르는 일이다. 작은 돌도 있고 큰 돌은 두 사람이 같이 들어야 한다”고 그가 설명했다. 하루 10시간 일하고 10만원을 받는 일이었다. 근무 첫날 그는 내일부턴 나오지 말고, 다음주부터 다시 나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흑산은 “다음에 또 시합하려면 지금 돈을 조금 모아놔야 한다. 생활비가 부족해서 잘 먹지도 못하고 카메룬에 있는 할머니가 편찮으신데 도울 힘도 없는 현실이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선의로 그럭저럭 한국 생활을 버티고 있지만, 이흑산은 불안하다. 그를 짓누르는 공포는 ‘강제 송환’이다. 그는 “카메룬에 돌아가면 군인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갈 텐데 감옥에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카메룬의 군대 이탈자가 어떤 처벌을 받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현재 35년간 장기 집권 중인 카메룬공화국 폴 비야 대통령의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카메룬 형법을 통해 추정해볼 수 있다. 현행 형법 제151조는 ‘공무원이나 피고용인이 그의 의무 수행을 지속적으로 중단하거나, 지연·연기·혼란을 유발하는 지속적인 근무 소홀과 방해를 하면 3개월~2년의 징역과 함께 벌금형에 처한다’고 돼 있다. 군대를 1년8개월째 무단 이탈해, 타국에 난민인정 신청을 한 이흑산은 최소한 그보다 중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흑산의 공포는 형량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카메룬에서 군인은 58살 퇴직까지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친구 한 명은 2007년 무렵 군대를 탈출해 옆 나라인 나이지리아로 도망간 적이 있다. 군이 친구를 잡아왔다. 그 뒤로 친구는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그는 “카메룬 북쪽에 군인들이 운영하는 감옥이 있는데 거기로 끌려가면 풀려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가족들이 경제력이 있으면 돈을 주고 풀려날 수 있지만 난 그런 가족이 없어 평생을 감옥에서 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보호해달라, 살려달라”

미국 국무부가 2017년 3월3일 발간한 ‘카메룬 인권 보고서’는 그의 말을 뒷받침한다. 보고서를 보면 “카메룬 북부 지역 도시 살라크와 모라에 있는 군대조직(BIR)의 시설을 비롯해 최북단 지역에서 비공식 군사 구금시설이 운영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BIR’는 수형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문으로 악명을 떨치는 군사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감옥 관리인들의 부정부패도 심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뇌물을 줘야 면회가 가능하고, 수형자들도 임시 석방 등을 요구하며 뇌물을 건넨다. 벌금 낼 돈이 없는 수용자는 그들의 형기가 끝나거나 법원의 석방 명령 뒤에도 계속 구금된다.’

한국챔피언 이흑산이 한국 정부에 말한다.

“난 추방되면 고국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 있다. 내 목숨이 한국 정부에 달려 있다. 보호해달라. 살려달라.”

춘천(강원)=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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