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시민들이 추운 겨울 내내 광장에서 외친 “이게 나라냐”는 침통한 분노는 시간이 흘러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는 간절한 기대로 변했다. 새 대통령에게는 촛불 시민들이 바라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할 엄중한 소명이 있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촛불은 꺼졌지만, 그곳엔 아직 사람이 있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사드 반대’를 외치며 무기한 단식농성을 벌이는 종교인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하며 20일 넘게 광고탑 위에서 고공 단식농성 중인 노동자들이 있다. 대통령이 바뀌더라도 우리의 위태로운 삶이 바뀌지 않으면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새 대통령에게 ‘제2의 세월호’인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과 사드 장비가 기습 배치된 경북 성주 소성리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누구보다 먼저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통령이 되기 바란다.
취재 황예랑·진명선 기자, 편집 정환봉 기자, 사진 박승화·정용일 기자, 디자인 장광석
‘배에서 선상 투표할 것 같네요.’
3월31일 밤 10시42분. 아들은 평소처럼 엄마와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모자는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며 잡담을 나눴다. 그리고 몇 분 뒤 아들과 연락이 끊겼다. 3등 항해사인 아들 윤동영(25)씨가 탄 배의 이름은 스텔라데이지호. 2월10일 중국 칭다오에서 출항한 배는 브라질에서 철광석 26만t을 싣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긴급 상황입니다. 본선 2포트 물이. 샙니ㅏ(샙니다). 포트 쪽으로 긴급게 ㄱ울고 ㅣㅆ습니다(긴급하게 기울고 있습니다).’
아들은 투표하지 못했다동영씨와 연락이 끊긴 지 20여 분 뒤인 밤 11시20분. 스텔라데이지호 선장이 선사인 ‘폴라리스쉬핑’ 관계자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전해주듯 오타투성이다.
선박은 브라질 산토스 남동쪽 2500km 인근 해역에서 침몰했다. 사고 직후 필리핀 선원 2명은 구조됐지만, 동영씨 등 한국인 선원 8명과 외국인 선원 14명은 실종됐다. 배에 있던 구명정 2척과 구명벌 3척은 발견됐으나, 16인승 구명벌 1척은 행방이 아직까지 묘연하다.
스텔라데이지호는 2009년 일본에서 건조한 지 16년이 지난 유조선을 들여와 중국에서 화물선으로 개조한 선령 25년의 노후 선박이다. 선령 21년인 세월호보다 늙은 배다. 스텔라데이지호 사고가 일어난 날은 우연히도 세월호가 3년 만에 전남 목포신항에 도착해 뭍으로 올라온 바로 그날이었다.
엄마의 기억 속에 동영씨는 “부모 속 썩이지 않는” 착한 아들이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2014년, 목포해양대 4학년이던 아들은 친구들과 함께 전남 진도 팽목항에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2016년 겨울에는 서울 사는 여자친구와 광화문광장에 촛불을 들고 여러 차례 나갔다고 했다. 엄마는 “배가 크니까 걱정하지 말라”던 아들이 걱정돼 하루에도 몇 번씩 소스라치게 운다.
‘아들~~어쩜 좋냐? 선사에선 호텔도 상황실도 다 빼겠단다. 우린 아들이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아들 없는 돈 타다 무엇에 쓰겠냐?’ 5월4일 아침 7시31분. 허재용(33)씨의 어머니는 ‘울 아들’ 앞으로 장문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남겼다. 지난 4월1일부터 벌써 34일째 이어지는 회신 없는 메시지다. “매일 (메시지를) 보내는데 한 달 넘도록 하나도 안 봐요.” 누나 셋을 둔 막둥이 재용씨는 2등 항해사 자격증을 딴 뒤 4년간 세계를 누비며 배를 탔다.
아들을 잃은 엄마들은 제19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가 시작된 5월4일 오전, 서울역 3층 사전투표소에서 ‘눈물’을 찍었다. 투표용지에 아픈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실종자 가족들 아무도 투표 안 하려고 했어요.” 재용씨의 둘째누나 허경주(39)씨의 말이다. 실종자 가족 10여 명은 이날 다 같이 사전투표에 참여했다. 모두 한마음으로 ‘기호 1번’을 찍었다. 경주씨는 “말로만 약속하는 게 아니라 ‘안전’ 공약을 조금이라도 신경 쓸 만한 후보, 우리의 눈물에 유일하게 반응해준 후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영씨의 아버지 윤종렬(54)씨는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세월호 부모들 심정을 알겠다.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흔적이라도 찾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은 지난 30여 일 동안 “이게 나라냐”고 묻고 또 물었다. 3월31일 밤 11시가 넘어 긴급 구조요청을 받은 선사 ‘폴라리스쉬핑’은 12시간이 지난 4월1일 오전 11시께 해양수산부와 해양경찰 쪽에 사고 소식을 보고했다. 실종자 가족들에게 사고 소식이 전해진 시간은 그로부터 다시 4시간이 지난 오후 3시께였다. 그렇게 ‘골든타임’은 허무하게 지나갔다. 정부는 외교부를 컨트롤타워로 하는 비상대책반을 구성했으나 무능했고 무책임했다.
“세월호 부모들 심정을 알겠다”“사건 발생 뒤 일주일 동안 단 한 명의 외교부 직원도 우리에게 직접 수색 상황을 설명해준 적이 없어요.” 구명보트가 몇 개나 남아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가족들이 요청하자 외교부는 그제야 선사에 구명보트 사양을 확인했다. 이어 4월8일 미국 초계기가 구명벌로 추정되는 물체를 발견했다는 사실이 우루과이 해상구조본부(MRCC) 공식 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그러나 정부는 이 문서의 존재 자체를 숨긴 채 ‘기름띠’ 흔적이라고 우기며 추가 수색 요청을 묵살하고 있다. 허경주씨는 “외교부는 해양경비안전서에, 해양경비안전서는 해양수산부에, 해양수산부는 다시 외교부에 서로의 관할이라며 책임을 미루기만 하는 게 대한민국 정부”라고 한탄했다.
눈물의 투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실종자 가족들은 폴라리스쉬핑 사무실이 있는 서울 중구 남대문 와이즈타워 앞에 천막을 쳤다. 선사는 5월5일까지만 상황실을 운영한다고 이들에게 통보했다. 가족들의 숙박비 지원도 5월6일까지만 하겠다고 알려왔다.
경북 영천에서 소를 키우는 동영씨 부모님, 강원도 춘천에서 사는 재용씨 부모님 등 전국에 흩어져 사는 실종자 가족들은 생계를 뒤로한 채 지난 4월 초 서울로 올라왔다. 외교부와 선사에 적극적인 수색 작업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외교부는 4월 중순 이후로는 정례 브리핑도 없이 가족들이 요구하는 자료를 일주일에 한두 번 전달하고만 있다. 선사는 원하면 보상 협의를, 원하지 않으면 법적 절차를 밟겠다며 한발 빼려는 태도다. 폴라리스쉬핑은 1년 매출액이 7800억원에 이르는 중견 해운사다.
가족들은 이제 갈 곳도, 기댈 곳도 없다. 애타는 마음에 손 닿는 모든 곳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군 초계기가 ‘구명벌처럼 보인다’고 했던 특이 물체 사진을 요청한다”는 편지를 썼고, 국무총리 공관 앞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인 황교안 국무총리 면담을 요구하다가 짐짝처럼 끌려나왔다.
대선 후보들이 나타나는 곳에도 피켓을 들고 쫓아다녔다. 5월3일 석가탄신일을 맞아 조계사에 온 대선 후보들에게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의 경과와 요구 사안을 담은 문서도 손에 쥐어줬다. 가장 당선이 유력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나타날 길목에서 기다리다 용산역,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회관, 조계사 등에서 세 차례 만나 눈물로 호소했다. 문재인 후보 캠프는 실종자 가족들의 요구대로 김경협 의원을 전담 소통 창구로 정해 가족들과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장수마을에 켜진 촛불세월호 침몰 뒤 3년이 지났지만 컨트롤타워 없이 무능한 정부, 생명보다 이윤을 먼저 생각하는 기업, ‘이게 나라냐’는 절망은 3년 전 그대로다.
“배 그기 가라앉았을 때 그때부터 행동하는 ‘가다’(모양새)가 다 글러먹었어. 3년 안 됐나. 그기, 내 자식 거 들어갔다 생각해봐라. 우에 살겠노. 테레비로 보매 얼마 울었는지 모린다. 아이고 혼재 참 마이 울었다. 자식 있으면 다 그렇다. 자식 한번 다쳐봐라. 눈에 암거도 뵈도 않타. 그기 부모 마음이라.”
‘촛불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선거가 열리기 일주일 전인 5월2일. 저녁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서 만난 도금년(84) 할머니는 ‘세월호 참사’를 자기 일로 여기고 있었다. 장수마을로 불리는 소성리, 팔순·구순의 ‘소성리 할매’들은 지금 국가가 초래한 또 다른 ‘참사’의 희생양이 될 위기에 놓였다. 지난 4월26일 새벽 한·미 군 당국이 한국 경찰 병력 8천 명을 동원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장비 일부를 성주 골프장에 반입한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사드 배치 비용 10억달러(약 1조1300억원)를 내라”며 한국 정부의 뒤통수를 쳤다.
서울 광화문에선 4월29일 마지막 촛불집회가 열렸지만, ‘외교 참사’가 진행 중인 소성리는 아직 촛불을 내릴 수 없다. 도금년 할머니는 이날 저녁 마을회관에 딸린 편의점 평상에 앉아 ‘불법 사드 배치 원천무효 소성리 긴급 촛불집회’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촛불 대통령이 뽑히는 5월9일에도 경북 성주군청 앞 평화나비광장에선 301일째 촛불집회가, 경북 김천역 광장에선 263일째 촛불집회가 열린다.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 사드 철회를 요구하는 촛불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대선 일주일 전인 5월2일 소성리에서만큼은 이미 ‘정권 교체’가 이뤄진 듯했다. 기호 1번 문재인 후보나 기호 5번 심상정 정의당 후보를 찍겠다는 주민이 대다수였다. 사드 배치에 찬성하는 기호 2번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나 기호 4번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를 찍겠다는 주민은 찾을 수 없었다.
주민들은 난생처음 ‘나를 위한 투표’를 한다. ㄱ(84) 할아버지는 기자에게 “누구 찍으면 사드 내버리겠소? 여기, 여 있는 거?”라 물으며 마을회관 앞 도로에 서 있던 문재인 후보 선거 트럭을 가리켰다. 옆에 함께 있던 박두환(59)씨가 “간첩 아이가?” 하고 말하자 지팡이로 박씨의 다리를 후려치며 역정을 냈다. ‘사드 배치 결사 반대’라고 쓰인 빨간 띠를 이마에 두른 할아버지는 이날 오후 열린 집회에서 “사드 물러가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아랍권 뉴스 채널 가 인터뷰를 요청하며 마이크를 내밀었다.
지난해 9월30일 국방부가 소성리로부터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주 골프장을 사드 ‘제3부지’로 결정한 이후 소성리 주민들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소성리 주민들의 조상을 모신 묘소가 많아 ‘마을 선산’이나 마찬가지인 달마산의 새 이름은 ‘사드산’이 됐다. 경찰의 제지로 미군 트럭 등 사드 장비 반입 낌새가 있을 때 울리는 마을회관의 사이렌 소리, 하늘을 가르는 미군 헬기 소리 등에 주민들은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라며 진저리를 쳤다.
지난 4월26일 경찰 진압 과정에서 늑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대구 병원에 입원 중인 인동댁(83) 할머니의 동서인 ㄴ 할머니가 파괴된 일상에 대해 말했다. “일해주러 갔다가 사이란 불면 (트럭을 막기 위해 마을회관 앞으로) 올라와야 하거든. 넘의 집 돈 받아먹으면서 올라카면 주인 눈치 보이지. 어제는 머리가 허얘가지고 (염색약을) 처바르는데 사이란 울리가 마음이 조급증이 나서, 그래 막 발라가지고 드라이 말려가지고 아침도 안 먹고 왔지. 배고파 죽겠드라고.”
‘사드산’이 된 마을 선산김천농고 시절 학도병으로 모집돼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6·25 국가유공자’ 위희(87) 할아버지에게 북한은 오랜 시간 생명을 위협하는 적이었다. 그는 초전면에서 많은 청년이 참전했지만 살아 돌아온 것은 26명뿐이라고 했다. 7명이 징집됐던 소성리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위 할아버지가 유일했다.
“백마고지 앞에 한탄강이 흐르는데 새벽에 우리 할부지가 꿈에 보여요. 일나라, 여 있으면 죽는다. 요만치 걸어나오니 그 뒤에서 포탄이 떨어졌는 기라. 안 그랬으면 내 죽었단 말이다.” 그에게는 사드가 북한 미사일을 소성리로 몰고 오는 전쟁 무기다. 위 할아버지는 김항곤 성주군수가 “초전 사람”이라 찍어줬다며 “지가 그럴(사드 부지를 소성리로 가져올) 줄은 몰랐다”고 성을 냈다.
연령·직업·성별이 다른 ‘소성리 평화공동체’가 들어올린 촛불엔 ‘사드 반대’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5월1일 저녁 촛불집회에는 김천 엄마들이 모인 율동맘 10여 명의 공연이 집회의 흥을 돋웠다. 5살부터 초등학교 4학년까지 아이 10여 명도 엄마들 앞에 서서 율동을 했다. 250여 일째 지속되는 ‘김천 촛불’에 매일 참여해 집회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이들은 어린이집 교사, 방과후학교 강사 등 워킹맘이다.
“학교 돌봄 선생님, 방과후 선생님, 조리사 선생님에 대해서도 교육부에서 법을 안 지켜요. 퇴직금 안 주려고 10개월만 일 시키고, 4대 보험 안 주려고 주 14시간만 일을 시켜요.” 워킹맘 김미란(41)씨는 아이를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방과후 강사나 학교 비정규직의 ‘쪼개기 계약’, 4대 보험 배제 등의 문제를 알게 됐다. “방과후 돌봄 교실 선생님이 늦게 출근해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4대 보험 때문에 그렇다고 하세요. 1년 일하고 선생님이 그만둔다 해서 물어보면 2년 되면 정규직 전환되는 거 피하려고 그러는 거래요. 우리 엄마들이 학교도 찾아가고 전화도 해서 (계약이 연장돼) 지금까지 계세요.”
4월26일 사드 기습 배치에 동원된 경찰버스가 소성리를 빠져나가려던 것을 막은 조아무개(46)씨는 종갓집 맏며느리다. 그는 대구 시댁에서 밤늦게 제사를 지내고 출근해 다음날 기계 앞에서 졸다가 산업재해를 당할 뻔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인 조씨는 휴가를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 ‘빨간 날’인 석가탄신일(5월3일)에도 회사에 출근했다.
“귀농 15년 됐는데, 그동안 농민 소득은 상당히 줄었죠. 소득을 경작 면적 늘리는 것으로 맞춰요. 예전이면 1천 평만 지어도 애들 교육하고 살림했어. 지금은 2천∼3천 평을 지어도 그래 못 맞춰요. 매년 적자예요, 적자. 촌에서 빚이 평균 1억원이에요. 매년 몇백씩 적자 나는데, 뭐.” 김천시 농민회 회장이면서 사드반대김천시민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박경범(53)씨는 “(현재 쌀에만 적용하는 정부 수매제를) 주요 농산물로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를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을 통해 10년간 주장해왔다. 이제 새 정부가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38살이던 2002년 귀농했다.
부둥켜안고 울었다5월2일 오후 6시께 초등학생 아이들이 마을회관 입구에서 소성리 지킴이들이 쌓고 있는 평화의 돌담 주변에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조잘거리며 제 허벅지만 한 돌을 옮겨 날랐다.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지역아동센터장 ㄷ(51)씨는 “그냥 한번 와봤다”며 자꾸 눈물을 삼켰다. 그는 방과후 부모가 기다리는 집이 아닌 지역아동센터를 찾아올 수밖에 없는 아이 19명을 돌보고 있다. ㄷ씨는 그동안 성주군에 있는 4개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어린이날에 초청해온 롯데의 배려에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 롯데가 운영하던 골프장에 사드가 배치됐다. 지지 후보를 묻자 그는 “당연히 엄지척”이라고 답했다.
주민들은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는 5월9일 선출된 새 대통령에게 거는 기대이기도 하다. 이석주 소성리 이장의 동생 이석훈(51)씨가 말했다. “마음속에 정한 후보가 있어요. 그분 같으면 이렇게 물리력으로 강제로 들어오지는 않겠죠. 여기 와서 지금까지 힘들었던 어머님들, 어르신들 모아놓고 위로부터 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평화를 외치며 군용차량의 마을 통과를 막는 주민들에게 군 당국이 내놓은 카드는 ‘꼼수’였다. 4월30일 사드 시험 가동을 위한 유류를 운반하는 유조차 2대는 소성리 주민들과 지킴이들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그러자 군 당국은 5월4일 오후 기름통을 군 장병 부식으로 위장해 마을을 지나려다 주민들에게 들통나고 말았다. 군용 부식 수송 차량 안에는 음식 대신 200ℓ 드럼통 14개가 실려 있었다. 국방부는 결국 이날 밤 소성리 주민들에게 ‘위장 반입’을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이게 나라냐”“똑같아, 똑같아. 하나도 변한 게 없어. 정부를 믿었데.”
무능한 국가가 초래한 참사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는 건 또 다른 피해자들이었다. 지난 4월29일 밤 마지막 촛불집회가 끝난 광화문광장. 세월호 유가족들과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은 이날 처음 광장으로 나왔다.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는 대한민국 국민 8명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맞습니까?’라고 쓰인 대형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나와 세월호 유가족들 뒷자리에서 촛불을 들었다.
“정부가 열심히 해줄 거로 알고 한 달 동안 믿고만 있었어요. 그런데 세월호 인양 시점에 사고가 나서 다음 정부에 부담될까봐 그런지 덮으려고만 하고 쉬쉬해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허경주씨의 말에 전명선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 “포기하지 말고 같이 한번 해보자”고 어깨를 다독였다. “가족들이 흩어지지 말고 뭉치셔야 해요.” “우리도 3년이 지났지만 아이들 사망신고 아직까지 안 했어요.” “진상 규명이 될 때까지는 못해요. 마음에만 묻지 마세요.”
5월2일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세월호 분향소 앞에서 이들은 두 번째로 만났다. 지난 3월 ‘촛불 시민’으로 광장에 나왔던 허경주씨는 이제 세월호 유가족들과 같은 처지가 되어 다시 광장에 섰다. 이날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와 ‘4월16일의 약속 국민연대’는 시민들이 경기도 안산 합동분향소 노란우편함에 보내온 엽서 1만6천여 장을 정리해 발표했다. 시민들이 원한 ‘내가 바라는 대한민국’은 크게 네 가지였다. 안전한 나라, 정의로운 나라, 진실을 감추지 않는 나라, 이윤보다 생명이 우선인 나라!
동생 재용씨를 잃은 누나 허경주씨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퍼졌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책무를 지고 있는 국가가 자신의 존립 근거인 국민을 부정할 때, 저희는 어디에 가서 호소해야 한단 말입니까? 대통령 당선자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중시하는 나라를 만들어주십시오.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구명벌 1척을 찾고, 사고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주십시오.”
세월호 유가족들은 곁에 선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5월3일 소성리에는 성주가 고향이라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3년 전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을 했던 경북 청도군 삼평리 어르신들이 찾아왔다. 무능하고 부패한 전직 대통령을 끌어내린 것도, ‘이게 나라냐’는 한숨이 터져나오는 참사 앞에서 서로에게 리본을 매주며 연대의 손길을 내민 것도 결국 시민이었다.
가장 낮은 이들의 곁에5월9일, 촛불의 염원을 안은 새로운 대통령의 시대가 열린다. 이번에는 기대하고 싶다. 새 대통령이 먼저 고통받는 이들에게 손 내밀어주기를, 가장 낮은 이들의 곁에 서 있어주기를. 그래서 대한민국이 ‘나라다운 나라’가 되기를. 그래서 더 이상 피해자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기를!
성주(경북)=글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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