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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귀환 어민 문제는 남북한의 합작품”

9년간 반공법 위반 조작 사건 피해자들 사연 알려온 아와쿠라 요시카츠 일본 <교도통신> 서울지국장 인터뷰
등록 2017-02-14 20:12 수정 2020-05-03 04:28

아와쿠라 요시카츠(45·사진) 서울지국장에게 납북 귀환 어민 사건은 ‘기묘한 일’이었다. 1960년대 이후 북한에 납치된 남쪽 어민 대부분이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남한 정부는 이들을 위로하는 대신 모질게 고문했다. 스스로 북으로 넘어갔다는 거짓 자백을 받았고, ‘빨갱이’란 주홍글씨를 새겼다. 피랍 어민이 3천 명을 넘고, 이 가운데 범죄 혐의로 기소된 이들만 1200여 명에 이른다.
원고지 70장에 담긴 피해자들 질곡의 삶

아와쿠라 지국장은 2008년 이 사건을 접한 뒤, 9년여에 걸쳐 피해자들의 아픈 사연을 알리려 애썼다. 지난해 3월 납북 피해 어민 김성덕(66)씨의 재심 결정이 난 뒤 의 ‘(남쪽으로) 귀환해도 고문·처벌’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피랍 어민 문제를 다시 한번 다뤘다. 그러나 일본에서 반향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세기 넘게 해결되지 않은 이 사건에 어쩐 일인지 한국 언론들마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와쿠라 지국장은 ‘고문 날조에 의한 피랍 어민 월선 조작 사건’의 실상을 에 알려왔다. 원고지 70장 분량의 긴 글에서 그는 피해자들이 겪은 질곡의 삶을 담았다. 2월8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납북 귀환 어민 문제는 남북한의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북쪽이 어민들을 납치해 씻을 수 없는 ‘낙인’을 찍었고, 힘겹게 다시 남쪽으로 돌아온 어민들에게 남한 정부는 불법 구금, 고문 끝에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딱지’를 씌웠다. 분단된 남북이 역할을 나눠 잘못 없는 어민들의 삶 자체를 무너지게 한 것이다.”

일본 교토 출신 아와쿠라 지국장은 1994년 일본의 대표적 통신사인 에 입사했다. 나고야에서 근무하던 1998년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문제를 취재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2006년부터 한국 특파원으로 일했고, 2009년 3월 말 일본에 돌아갔다가 2011년 한국에 다시 왔다. 이듬해 4월부터 지금까지 서울지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피해자가 최대 1천 명에 이르는 반공법 위반 조작 사건이다. 한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일이다.

2006년 4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씨가 북한에서 이미 결혼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떠들썩했다. 한국 특파원에 갓 부임했을 때다. 요코다 사건을 취재하다가 한국 납북 피해자 가족들을 만났다. 이들은 정부에서 피해자 지원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감시 대상이 됐다. 일본이 납치 피해자를 대하는 것과 견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피랍 당사자를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고 이후에도 본인과 가족의 취직, 결혼 등 정상적인 사회생활 수단을 완전히 막았다.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걸 일본에 전하는 게 한반도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피해 가족들의 사연이 너무나 아프다.

피랍 어민 피해자 가운데 간첩 날조 사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서창석씨를 전북 군산에서 만났을 때 일이다. 그가 “나는 북에서 돌아온 뒤에도 무지하게 맞았다. 그것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고, 후유증을 못 이겨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비슷한 피해자가 동네에 있다고 해서 찾아간 게 승룡호 사건 이후 숨진 유재권씨의 아내 정은순씨였다. ‘일본 기자가 왔다’는 말에 정씨는 “내 남편은 맞아 죽었다. 고문 뒤 딴사람이 됐다. 그렇게 사랑했던 딸들도 멍하니 쳐다만 봤다. 정신이 나가고, 감정도 없어진 사람이 됐다. 항상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어느 날 죽었다. 이게 맞아 죽은 게 아니고 뭐냐”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어민들 “거의 남쪽에서 강제 납치된 것” 어떤 성격의 사건으로 파악했나.

피랍 어민들은 어디서, 어떻게 잡혀갔는지 증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본인도 모르고, 당국도 모른다. 당국은 “월북을 경고하고, 어로저지선 가까이 가지 말라고 교육·경고를 했기 때문에 피랍이 아니라 월북한 뒤 간첩 활동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제껏 만난 피랍 어민들은 대개 “반공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서 (남쪽 해역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거의 남쪽에서 강제 납치된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북한의 납치를 막지 못한 당국이 책임을 회피하고, 오히려 죄 없는 어민들에게 끔찍한 처벌을 가한 것이다.

2008년부터 이 문제에 천착해왔다.

첫 기사를 쓴 게 그즈음이다.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기획 기사를 썼다. 당시만 해도 노무현 정부가 만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를 통해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길이 열릴 것 같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진실화해위가 폐쇄됐다. 정부가 이들을 구제할 생각도 없었다. 더 도움을 주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와 큰 후회가 됐다. 이후 인권단체 ‘지금 여기에’ 변상철씨 등이 나서서 피해자들의 재심을 신청했다. 그게 2013년이다.


<i>“남북이 합작해서 어민들에게 가해한 것이다. 북한이 납치하고, 이후 남한이 고문하고 처벌하는 방식으로 가세했다.”</i>
승룡호 사건 피해자 서창덕씨의 경우, 40년이 지나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간첩 사건으로 조작하기 가장 좋은 표적이 바다를 오가는 어민들이었을 것이다. 1960년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서씨를 반공법 위반자로 조작했고, 이후 경찰들의 진급이나 성과를 올리는 수단이 됐을 것이다. 경찰은 승룡호 사건 이후 15년간 서씨를 관찰했지만, 간첩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 서씨가 간첩이 아니란 것은 경찰이 가장 잘 안다. 공안 당국은 열심히 일했다고 주장하겠지만, 그들이 간첩 조작 사건을 만든 것 자체가 직무유기다. 진짜 간첩을 잡아야지, 선량한 어민들을 수십 년간 감시하는 게 공안 당국이 할 일인가.

북쪽이 피랍 어민들에게 1차 피해를 줬고, 남쪽은 더 큰 충격의 2차 피해를 가했다.

남북이 합작해서 어민들에게 가해한 것이다. 북한이 납치하고, 이후 남한이 고문하고 처벌하는 방식으로 가세했다. 분단된 나라 어느 쪽에서도 자기 살길이 없게 된 것이다. 가족들 먹여살리려고 위험한 바다에 나간 것뿐이다. 시국사범들을 만나보면 ‘가장 불쌍한 사람이 피랍 어민’이라고 입을 모은다. 시국사범은 정치적 반대편에서 누군가 물질적·정신적 지원을 해주는데, 납북 어민들은 가족, 친구, 이웃마저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간첩이 아니다” 한국 언론에선 판결 기사 외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부끄럽다.

한국의 많은 언론매체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 문제를 알리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문제가 묘하게 사각지대에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언론인보다 조금 일찍 알게 된 내가 더 여론을 환기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아쉬움과 책임감을 느낀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위협을 조작해 무고한 어민들을 간첩으로 만든 사건이다. 벌써 50년이 넘었다. 피해 당사자는 대부분 돌아가셨지만, 자식들은 여전히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보고 있다.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당장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 법적 부분과 별개로 사회적 인식이라도 ‘그들은 간첩이 아니다’로 바뀌어야 한다. 피해자들이 재심을 받는 일조차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차례 재심이 기각되면 재판부가 ‘같은 사안으로는 재심 신청을 못 낸다’는 식이다. 그러나 과거사 사건에 여러 차례 재심을 신청해 구제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글·사진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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