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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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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어민 잔혹사

북한은 납치하고 남한은 낙인찍은 납북 귀환 어민 사건

1955~2000년 피해 어민 3729명, 인권침해 접수는 8건뿐
등록 2017-02-14 08:47 수정 2020-05-02 19:28
납북 귀환 피해 어민 서창덕씨(오른쪽 네 번째 꽃다발 든 이)는 1967년 피랍돼 반공법 등으로 처벌받았다. 전력이 문제가 돼 1984년에는 간첩죄로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형을 받았다. 조작된 사실이었다. 서씨는 2008년 10월31일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아와쿠라 요시카츠 제공

납북 귀환 피해 어민 서창덕씨(오른쪽 네 번째 꽃다발 든 이)는 1967년 피랍돼 반공법 등으로 처벌받았다. 전력이 문제가 돼 1984년에는 간첩죄로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형을 받았다. 조작된 사실이었다. 서씨는 2008년 10월31일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아와쿠라 요시카츠 제공

1953년 정전협정 뒤, 북한이 벌인 첫 납치 사건이 ‘대성호 피랍’이다. 1955년 5월28일 해상 조업 중이던 선원 10명을 납치했다. 납북자피해보상및지원심의위원회가 낸 ‘전후 납북 피해자 보상 및 지원백서’를 보면, 대성호 사건 이후 2000년까지 납북 피해자는 3835명에 이른다. 특히 남북 경계를 분명히 새기기 어렵고 치안이 약한 바다에서 납치 사건은 골칫거리였다. 실제 납북 피해자 89%(3729명)가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민이었다.

1968년, 당국이 돌변한 까닭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납북 어민들은 말 그대로 ‘피해자’ 대우를 받았다. 북한에 피랍됐다가 송환되면 수사정보기관에 인계되긴 했지만, 당국은 이들을 상대로 북한 정보를 최대한 끌어낸 뒤 석방했다. 그리고 “납북 어민 문제는 반국가단체인 북괴의 비인도적 도발 행위로 이해하고, 관용하는 입장에서 장기간 북괴 치하에서 억류당한 고초를 위로하는 식의 처우를 해왔다”고 밝혀왔다.

1968년부터 상황이 돌변했다. 그해 1월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부대 무장대원 31명이 청와대를 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 신호탄을 쐈다. 남한 당국은 북한이 소극적 대남공작에서 ‘무장공비의 남침에 의한 적극적 공격 방법’으로 돌변했다고 판단했다. 그해 11월 삼척·울진지구 무장공비 침투, 이듬해 주문진·북평해안 사태가 기름을 부었다. 주로 해안가를 통해 잇단 남침이 벌어지자, 당국은 어민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피랍 어민들이 북한에 남쪽 해안가 지형, 지물, 지세, 주요 시설 정보를 흘렸고, 북한이 이를 바탕으로 강경한 대남 공작을 폈다는 것이다. 피랍 뒤 송환된 어민들이 북한에서 받아온 쌀과 옷감 등이 검찰의 의혹을 부풀렸다.

실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납북 귀환 어민 사건 현황을 보면 “납북 귀환 어부들은 단체로 북한의 우월성 등에 대한 교육과 북한 명소 관광, 공장 등을 견학함. 귀환 무렵에는 북한 지도원으로부터 ‘남한에 귀환하면 북한에서 생활한 것에 대해 남한 사람들에게 선전하라’ 등의 교육을 받고 쌀과 옷감 등을 받아 귀환하였다”고 돼 있다.

북에 납치되면 범죄자 취급

검찰은 납북 어민들을 정조준했다. 대검찰청이 1969년 발행한 기관지 (9월호)을 보면, 납북 어민들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소위 납북 어부라 함은 당국이 국방상 기타 공익적 견지에서 설정하여놓은 양해의 어로작업을 할 수 있는 최북단인 어로저지선 내지는 군사분계선을 월선하여 조업하다가 북괴의 무장선에 의하여 예인 납북, 북괴 지역 내에 장기간 억류되어 북괴의 소위 평화통일 지도원 등으로부터 공산주의의 우월성 등의 학습과 공장 견학 등의 세뇌 공작에 의해 교육받으며, 그 기간 중 자기들이 지득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제반 정보를 수차례 걸쳐 제공하고, 소위 북괴의 평화통일 방안과 대한민국 내에서 지하조직 구축, 반미, 반정부 사상 유포 등의 지령과 함께 다량의 금품을 받고 일정 기간 후 대한민국 지역 내로 귀환한 자를 말한다.”


“경찰 고문으로 눈·코·입 할 것 없이 온몸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죽은 이도 많았다.”

실상은 달랐다. 진실화해위의 ‘납북 귀환 어부 피해 기초사실 조사집’(2009)을 보면, 당시 모든 어선이 나침반에 의존했기 때문에 북방한계선을 넘어갔는지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고 적고 있다. 남한 경비정이 어선들을 지도했지만, 안개가 심한 때는 10m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정신없이 고기떼를 쫓다 무심코 북방한계선을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북한이 북방한계선 아래 남쪽까지 내려와 강제 납치할 때는 손을 쓸 수도 없었다. 1963년 11월3일 동해 어로저지선 근방에서 명태잡이 어선 200여 척에 총격을 가한 뒤, 어선 10척과 어민 30명을 납치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검찰은 북한에 납치됐다 돌아온 것만으로 어민들이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봤다. 이 분위기는 법원에까지 이어졌다. 이전까지 법원은 피랍 어민들이 북한이 강요한 행위를 했다며 무죄를 선고해왔다. 1965년 이후 3년간 14명에 불과하던 피랍 어민 유죄판결은 1968년 381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듬해에도 피랍 귀환 어민 196명이 반공법(현재 국가보안법으로 통합)이나 수산업법 위반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아와쿠라 요시카츠 일본 서울지국장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이런 식으로 검찰이 기소한 이가 1273명(중복기소자 제외시 1251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950명이 최종심에서 유죄로 결론이 났다. 다행히 무죄로 결론이 난 이가 323명이었는데,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2~3심에서 무죄가 된 이들은 6명뿐이었다.

불법 구금·고문 이어 평생 감시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유죄판결을 받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법 절차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피랍 귀환 어민들에 대한 경찰의 불법 구금, 구타, 고문은 일상이었다. 당시 고문 피해를 당한 어민들은 “경찰 고문으로 눈·코·입 할 것 없이 온몸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죽은 이도 많았다”고 증언했다.

어민들은 “(동료들과) 월선 조업을 합의한 뒤 어로저지선과 군사분계선을 월선해 북한 해상에서 조업을 했다”는 식으로 허위 자백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대부분 유죄판결이 났다. 어민뿐 아니라 일가친척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빨갱이 딱지’가 붙었다. 북한에 피랍되는 1차 피해에 이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에 이은 법적 처벌 같은 2차 피해였다. 수사기관은 이들의 죄질을 A~C등급으로 나눈 뒤, 평생 감시했다.

귀환 납북자와 납북자 가족 중에 국가 공권력의 행사로 인해 사망하거나 다친 사람을 돕는 납북피해자보상지원법이란 게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없었다. 이들처럼 특정 국가보안법 조항(제4, 5, 7, 9조)을 어겼다고 법원이 판단하면 보상 지원 대상에서 빠졌다.

2005년 12월 진실화해위가 설치되면서 납북 귀환 어민을 상대로 인권침해 피해 사례를 받았지만 접수는 8건뿐이었다. 현재는 일부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귀환 어민의 피해 사실을 찾고, 당사자들을 만나 재심 청구를 설득하는 방식으로 피해 구제가 진행되고 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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