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혼’(魂) 깃든 역사 교과서

교과서 국정화는 <환단고기>의 그림자 드리운 ‘상고사 강화’?

11월28일 공개될 교과서 초고에 담긴 고대사 분량·내용 주목돼
등록 2016-11-08 13:47 수정 2020-05-02 19:28
2_ 의혹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파생된 여러 의혹들은 양파처럼 까도 까도 끝이 없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까지 하면서 밀어붙인 역사 교과서 국정화, 최순실에게 ‘줄대기’ 하면서 은밀한 관계를 맺어온 삼성 등 대기업…. 이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걸까.
11월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국정 농단 책임자 처벌, 역사 교과서 국정화 중단’을 요구하는 역사학자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1월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국정 농단 책임자 처벌, 역사 교과서 국정화 중단’을 요구하는 역사학자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순실 교과서’ ‘순실왕조실록’이라는 비판에 직면한 국정 역사 교과서가 11월28일로 예정된 초고 공개에 앞서 폐기될 위기에 놓였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연설비서관이라는 공무 수행 전문가를 두고도 최순실씨의 ‘첨삭’을 받아 국가 문서인 대통령 연설문을 작성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뒤, ‘상고사 강화’라는 국정화의 또 다른 명분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상고사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시대 이전, 즉 고조선 시기를 다룬다.

근현대사 줄이고 전근대사 늘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국 상고사 서술로 알려진 를 인용해 ‘혼’이라는 용어를 써 논란을 부른 바 있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지난해 11월 국정화 고시 이후 열린 국무회의에선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라며 또다시 ‘혼’을 거론했다.

여러 발언을 통해 대통령이 영향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에 대해 주류 역사학계는 ‘위서’로 결론 내린 바 있다. 역사서로서는 진위 여부마저 불투명한 책이라는 것이다. ‘재야 사학자’라고 하는 일부 학자들이 의 사료적 가치를 고증하는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지만 진위 논란을 일단락시키지는 못했다.

역사학계는 ‘상고사 강화’라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명분 이면에 의 그림자가 있음을 우려한다. “국정교과서의 표면화된 문제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건국절 논란이지만, 학계에선 고대사 분량이 늘면서 방향성이나 내용성에 대한 걱정이 많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암 선생의 혼을 얘기하는 등의 분위기로 봐서는 확장주의적 상고사가 국정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논의는 결국 우리 역사의 상한 연대나 영토 범위를 최대치로 설정해보고 싶은 것인데, 우리의 희망사항과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은 구분해야 한다”고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말했다.

‘상고사 강화’는 새 역사 교과서 개발 초기엔 검토된 바가 없다. 박근혜 정부가 2018년 적용을 목표로 새로운 교육과정(2015 개정 교육과정)을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뒤, 교과목별로 교육과정 예비연구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연구진은 상고사를 포함한 전근대사보다 근현대사 비중을 크게 하는 쪽으로 연구를 마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예비연구(‘문이과 통합 역사과 교육과정 재구조화 연구’) 책임을 맡은 최상훈 서원대 교수는 과 통화에서 “연구진은 전근대사가 근현대사와 비중이 비슷하거나 근현대사 비중이 커야 한다고 봤다. 그게 역사 교육의 세계적 추세다. 전근대사와 근현대사 비중이 4.5 대 5.5 정도로 갈 수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실제 당시 최 교수팀이 학교 교사들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전근대사가 근현대사보다 많아야 한다(6 대 4)는 응답은 17.46%로, 근현대사가 더 많아야 한다(4 대 6-23.81%, 3 대 7-16.67%)는 응답의 절반에 불과했다.

하지만 예비연구 이후 교육과정을 개발한 본 연구팀은 전근대사와 근현대사 비중을 6 대 4로 결론 냈고 이에 따라 국정교과서가 개발됐다. 역사 교육 현장의 요구와는 무관하게 교육부가 국정교과서 관련 정책 결정을 주도한 셈이다. 최 교수는 “다른 교과목에서는 예비연구를 하는 팀이 본연구를 하는 일이 일반적인데, 우리는 별다른 이유 없이 본연구를 진행하지 못했고 다른 팀이 선임됐다”고 말했다.

전근대사와 근현대사 비중은 2010년 5월 교육과정 개정 때 3 대 7이었고, 2011년 5 대 5로 조정된 뒤 국정으로 전환된 새 역사 교과서에서 6 대 4로 역전됐다. 한 역사교육 전공 교수는 “단군사학회 등에서 를 정사로 인정하라고 국사편찬위원회(국편)에 압박을 지속하는 등 국정교과서 편찬에도 영향이 없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상고사 분량을 기계적으로 늘리면서 같은 ‘이설’이 추가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해 10월 교육부의 국정화 방침 이후 있었던 교육부와 국편의 엇박자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다. 당시 교육부가 “국정교과서에 이설을 병기하겠다”고 밝히자, 고대사 전공자인 김정배 국편 위원장이 “이설 병기는 안 된다”고 엇박자를 냈다.

같은 ‘이설’ 추가될까
1985년 김은수가 일본어를 우리말로 번역해 펴낸 <주해 환단고기>의 표지(왼쪽). 서울 종로구 사직동 단군성전에 봉안된 정부 표준 단군 영정. 한겨레

1985년 김은수가 일본어를 우리말로 번역해 펴낸 <주해 환단고기>의 표지(왼쪽). 서울 종로구 사직동 단군성전에 봉안된 정부 표준 단군 영정. 한겨레

당시에는 근현대사와 관련된 다양한 해석을 둘러싸고 ‘좌우를 아우르자’는 교육부와 ‘좌편향은 안 된다’는 국편의 입장이 충돌한 것으로 보도됐다. 한 고대사 연구자는 “김정배 교수는 인정받는 고대사 연구자로서 류의 고대사 부풀리기가 이설의 하나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실제 박근혜 정부 들어 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응한다는 명분 아래 맹목적으로 옹호된 측면이 있다. 특히 2013년 6월부터 국회에 설치된 동북아역사왜곡특별대책위원회(동북아특위)는 를 옹호하는 쪽에 날개를 달아줬다.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의 ‘비정상적인 국정’ 가운데 하나로 연설문 인용 사건이 손꼽히지만, 2013년 12월20일 열린 동북아특위의 12차 회의록을 보면 국회의원들이 너도나도 ‘에 나온 내용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이명수 새누리당 의원은 “(발제한 교수가) ‘를 보면 고조선사와 관련된 사료는 단편적이고 별로 없다’고 했는데, 제가 를 직접 읽어보고 여러 번, 이게 제 책상 옆에 있다. 그러고 따져야 되는데 실제는 고조선 관련된 얘기가 많다”고 했다. ‘에는 사료가 별로 없다’고 발제한 이는 한국 역사학계에서 최초로 고조선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였다. ‘고조선 관련 얘기(사료라고 하지 않았다)가 많다’고 주장한 이 의원은 행정공무원 출신이다.

역사 관련 서적을 탐독 또는 애독할지언정 사료 해석이나 역사적 고증에는 문외한인 국회의원 10여 명이 에 대한 역사학자의 전문적 견해를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 해석한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이상한 일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졌던 것이다. 역사학자인 강창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만이 “만주가 다 우리 땅이라면 기분 좋은 겁니까? 그렇지도 않고요. 사실에 입각해서 역사가 서술되어야 한다”며 다른 목소리를 냈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는 “일본 식민사학이 군국주의로 이어진 것도 역사적 사실보다는 신화를 현실인 것처럼 얘기한 것이 토대가 됐다. 일본은 천황도 현인신(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라 할 정도로 신화를 현실로 만드는 데 몰두했다. 침략이나 식민지배를 합리화·정당화하는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는 진짜 방법은 내놓지 못하면서, 일본과 유사한 방식으로 역사 왜곡에 대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역사 왜곡에 우리도 ‘왜곡’으로?

의 그림자는 박근혜 정부 출범 때부터 어른거렸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는 박정희 정권 시절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피해자 김중태씨가 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됐다. 김중태씨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썼다는 예언서를 입수해 해설한 책 를 1997년 발간한 바 있다. 이 책은 박정희 대통령을 “하늘이 낸 인간”이라고 적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은 “한인하느님이 가난한 한국 땅으로 내려보내 난을 일으키도록 점지되었다”고 적었다. 를 살펴본 신라사 전공 교수는 “와 등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교육부 전문위원으로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에서 일한 성삼제 현 서울대 사무국장은 널리 알려진 옹호자다. 성삼제 국장은 대구시 부교육감으로 일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수위에 파견된 뒤 교육부 서열 3위인 기획조정실장으로 승진한다.

성 국장이 의 사료적 가치에 주목한 내용을 담아 2005년 펴낸 에는 ‘이설과 다양한 학설을 국정교과서에 병기하겠다’는 교육부의 국정화 주장과 유사한 대목이 나온다. 그는 “고조선과 한사군에 관한 문제는 지금도 학자들 간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사안이다. …(교과서에) 고조선과 한사군에 대한 다양한 가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고대사를 전공한 한 교수는 “를 중시하는 성삼제 국장을 비롯한 교육부 내 일부 고위 공무원들이 있고, 청와대에도 이런 이들이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다”고 말했다. 해당 교수가 지목한 ㅇ씨가 2013년 4월 공무원들을 상대로 한 특강의 내용을 보도한 기사를 보면, 그는 특강 중에 “오늘 좋은 소식이 때마침 있는데, 박근혜 정부에서 상고사 정립 방안을 마련하라는 대통령 지시 사항이 내려졌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언론 보도 어디에도 ‘상고사 정립 방안 수립’이라는 정책이 보도된 바가 없다.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게 맞다면 왜 상고사 강화를 은밀하게 내부적으로만 추진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노조 파괴 수단 되기도

역사학자들이 를 우려스럽게 바라보는 이유는 1990년대 가 국가주의를 강화하고 노조 파괴 수단으로 이용된 적이 있는 등 역사 퇴행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대기업에서 사원 연수를 위탁받아 운영하면서 와 유사한 방식으로 고대사를 부풀리고 민족의식을 강조해 ‘우경 의식화 교육’을 한다는 비판을 받은 ‘다물민족학교’가 대표적이다. 다물교육을 받은 직원들이 자체적으로 회사 내에 ‘다물단’을 조직해 노조 와해에 동원되는 일이 빈번했다.

1993년 대우조선 다물단이 작성한 회보 ‘다물’을 보면, 다물운동에 대해 “반만년 동안 우리 민족의 혼을 알리고 비뚤어진 역사관을 바로잡으며, 5600년 민족사 중 최고 수준에 이른 경제력을 바탕으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통일 후에는 1300년 만에 잃어버린 만주땅을 경제력으로 되찾고자 하는”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한겨레21_박근혜_최순실_특별판_구매하기


1136호에서는 도대체 대통령이 무슨 자격으로 자괴감이 들고 괴로운지 집중 파헤쳐 봤습니다. 이름하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집 2호!!
1136호를 구매하시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집 3호(1137호)를 무료로 드리고 그리고 또!!! 뭔가가 있습니다.
구매하러 가기▶ https://goo.gl/F7y09Z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