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여성’이라는 죽을 죄?

2006~2015년 ‘묻지마 범죄’ 33건 전수분석… 경찰·대검찰청 보고서, 판결문 입수
등록 2016-06-01 15:43 수정 2020-05-03 04:28
한 여성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살해당했다. 5월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단지 그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사건 현장과 가까운 강남역 10번 출구엔 사건에 대한 공포와 피해자 추모, 그리고 연대의 목소리가 메모로 나붙었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이 사건을 두고 ‘묻지마 vs 여성증오’ 범죄 논쟁이 일고 있다. 한 살인사건의 대표 원인을 단정할 순 없다. 다만 ‘이상동기’ 범죄에서 여성이 희생자로 선택되는 맥락을 살펴볼 순 있다.
최근 경찰청 소속 범죄분석관 10명은 ‘과학적 범죄분석 시스템’(SCAS)에 등재된 3천여 건의 프로파일링 및 사건 자료를 토대로 최근 10년(2006~2015년) 동안 발생한 ‘이상동기 범죄’를 가해자 중심으로 분류했다. 그 결과를 담은 보고서 ‘한국의 이상범죄 유형 및 특성’을 보면, 21명이 ‘묻지마 범죄’, 13명이 ‘분노충동형 범죄’, 12명이 ‘기타 이상범죄’ 등 총 46명이 ‘이상동기 범죄’를 저질렀다.
은 이 자료에 등장하는 21명의 ‘묻지마 범죄자’가 벌인 33건의 사건을 전수조사했다. 가해자 21명 중 20명의 판결문도 입수해 최초로 분석했다(1명은 공소권 없음 또는 불기소 처분 추정). 이와 함께 대검찰청이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묻지마 범죄’로 정보 보고된 163건의 사건을 분석한 ‘묻지마 범죄 분석 및 대책III’도 참고했다.
기사 본문에서 인용문 출처는 각각 ‘경찰청 자료’ ‘판결문’ ‘대검찰청 자료’로 짧게 표기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나이는 범행 당시를 기준으로 했다.
취재 정환봉·김선식 기자, 편집 김효실 기자, 디자인 장광석
[%%IMAGE1%%]

‘묻지마 범죄’는 동기를 쉽게 찾기 어려운 범죄를 의미한다. 수사기관이나 학계에서는 ‘무동기 범죄’(Motiveless Crime)나 ‘불명확 동기 범죄’(Nonspecific Motive Crime)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사용하는 ‘범죄분류교범’(Crime Classification Manual)에는 불명확 동기 살인을 살인범죄의 한 유형으로 분류해 그 특징을 설명한다. ‘범행은 보통 공공장소에서 이뤄진다’ ‘가해자만이 살인의 이유를 안다’ ‘가해자는 자신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피해자를 무작위로 선택한다’.

이 21명의 가해자가 저지른 33건의 ‘묻지마 범죄’를 분석한 결과에도 이런 특징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범행 장소를 살펴보면, 33건 중 길거리가 20곳으로 가장 많았다. 판결문에는 자신을 학대하던 사람과 닮았다거나 교도소에 가고 싶다는 이유 등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범행 동기들이 나열돼 있었다. 33명의 피해자 중 31명은 가해자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피해자들은 길거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거나 다쳤다.

이런 일들은 우연처럼 일어난다. 단지 그 장소 그 시간에 가해자와 함께 있었던 것이 피해자가 겪어야 했던 끔찍한 불운의 모든 이유다. 하지만 이 우연에는 경향성이 있다. 한쪽 면이 넓은 주사위를 던지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무작위의 숫자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넓은 면의 반대편에 적힌 숫자가 나올 가능성이 가장 높다. 피해자는 무작위로 선택되지만 공평하게 정해지지는 않았다.

피해자는 ‘여성 중 아무나’[%%IMAGE5%%]

“제가 여관방에서 나오면서 칼과 옷을 종이가방에 담았고, 여관을 나가 부근에 있는 휴대폰 대리점 앞에 남자 3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이들을 죽일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남자이니 죽일 생각을 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밑에 있는 왜관지하도의 인도로 내려가 걸었습니다. 그런데 한 명의 여자가 반대쪽에서 저의 방향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고 순간 저 여자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종이가방에서 칼을 꺼냈습니다. (중략) 누군가를 죽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있던 차에 처음 본 혼자 있는 여자이어서 그런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대검찰청 자료)

2012년 10월1일 경북 칠곡군의 한 지하도에서 20대 여성을 칼로 찔러 숨지게 한 윤○○(35·남)씨가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내용이다. 이 사건의 판결문을 보면, 윤씨는 평소 아버지에게 잦은 야단을 맞았다. 그는 추석을 앞둔 2012년 9월29일 집에 있기 싫어 집에 있던 과도를 가지고 가출했다. 모텔에서 이틀을 보낸 윤씨는 돈도 없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 이렇게 살면 뭐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고 스스로 죽을 용기도 없어 아무나 죽여 교도소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씨가 선택한 피해자는 ‘아무나’가 아닌 ‘여성 중 아무나’였다.


“남자이니 죽일 생각을 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 누군가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있던 차에 처음 본 혼자 있는 여자여서 (…)”
-윤◦◦씨 진술

이같은 사례는 또 있다. 아버지와 술을 마시다 다툰 장○○(23·남)씨는 2014년 7월27일 새벽 울산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10대 여성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대한민국이 싫다. 나 혼자 죽기는 그렇고 누구 하나 같이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해자를 고른 이유는 술에 취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이 사건의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가 체구가 작은 여성이기에 더욱더 범행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애초부터 “교도소에 들어가기 위하여 피고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부녀자를 살해하기로 마음먹고 그 대상을 물색”해 40대 여성을 숨지게 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도 있었다.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34)씨도 이런 모습을 보였다. 그는 서울 서초동의 한 노래방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 6명의 남성을 보낸 뒤 여성을 피해자로 선택했다.

김씨의 프로파일링을 맡았던 권일용 경찰청 범죄분석담당관(경감)은 “김씨가 꼭 여성을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목적의식적으로 사건을 벌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저항이 적어 범행을 저지르기 쉬울 것으로 보이는 여성이라 희생자로 선택된 것은 맞다”고 말했다. 그는 “조현병(정신분열증)이라도 정도에 따라 범행 대상을 선택하는 판단을 내리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여성 증오가 범행 동기로 추정되는 사건도 발견된다. 가정 불화로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와 살던 송○○(16)군은 2013년 3월과 5월 잇따라 부산의 한 길거리에서 귀가 중이던 여고생 2명을 둔기 등으로 내리쳤다. 그는 수사기관에서 “집에 늦게 들어온다고 할머니가 혼내며 어머니 욕을 하자 화가 나는 동시에 부모에 대한 원망 등을 느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또 송군은 “평소 여자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며 여고생을 범죄 대상으로 고른 이유를 밝혔다.


“가해자에게만 집중하게 되면 어렵게 터져나온 여성들의 목소리들을 은폐하는 결과를 낳을 것”
-이나영 중앙대 교수

대검찰청 자료에서도 여성 증오가 살인 동기로 추정되는 살인 사건이 발견된다. 공익근무요원이던 이○○(21)씨는 2014년 2월22일 밤 서울 서초구의 한 빌라에서 20대 여성을 흉기로 찌르고 벽돌로 내리쳐 숨지게 했다.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행동 수칙’이라는 제목의 메모가 발견됐다. 이 메모에는 “4. 계집년들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다”, “7. 살해 순위는 애새끼들, 계집년, 노인,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 순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같은 자료에는 황당한 이유로 여성을 범죄 대상으로 선택한 사례도 등장한다. 32살의 한 남성 증권전문가는 2013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인천 지역에서 20~30대 젊은 여성 5명을 소주병이나 돌로 때려 다치게 했다. 그는 수사기관에서 “내가 내성적인 성격이라 노인들은 다칠 수 있다는 점이 죄송스러워서 범행 대상에서 제외했고 남자는 겁이 나서 제외하였으며, 약해 보이는 여성을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이같은 경향은 남성을 대상으로 한 ‘묻지마 범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경찰청 자료와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남성을 죽이기 쉽다고 생각해 피해자로 선택한 사례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여성이 여성을 증오해 벌인 ‘묻지마 범죄’는 발견된다. 고○○(47·여)씨는 “모친과의 불화로 정신적으로 매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나 시모와의 갈등으로 이혼하게 되자 여성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불행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여성에 대해 강한 피해의식과 혐오감”을 느껴 2008년 8월부터 12월까지 총 세 차례에 걸쳐 여성들을 상대로 살인미수 범죄를 저질렀다.

반면 가해자가 남성을 증오해 벌인 ‘묻지마 범죄’는 찾을 수 없었다. 2011년 5월12일 경북 안동에서 학대를 일삼던 큰아버지와 닮은 60대 남성을 숨지게 한 박○○(19·남)씨 사례와 2009년 7월11일 60대 남성을 자신의 어머니를 폭행한 사람이라고 착각해 숨지게 한 박○○(52·남)씨 사례 등 특정인에 대한 분노가 타인에게 전이돼 남성이 남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경우가 발견될 뿐이다.

같은 혐의의 전체 범죄 통계와 견줘보면 ‘묻지마 범죄’의 여성 피해자 비율이 더 높은 경향도 나타난다. 남성은 ‘묻지마 범죄’ 대상에서 제외될 이유가 많지만 여성은 그 반대라는 점이 통계에서도 정황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묻지마 범죄’, 여성 피해 경향 높아
강남역 10번 출구에 이번 사건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붙인 추모의 메모가 서울시민청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김진수 기자

강남역 10번 출구에 이번 사건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붙인 추모의 메모가 서울시민청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김진수 기자

‘경찰청 범죄 통계’를 보면 2014년 살인사건(살인미수 포함) 피해자는 913명으로 집계된다. 이 중 여성은 402명(44%), 남성은 510명(56%)이며 성별이 확인되지 않은 피해자는 1명이다. 전체 살인사건의 경우 남성 피해자 수가 여성 피해자보다 12%가량 많은 것이다. 동기가 분명한 살인의 경우 남성 간 원한이나 다툼 등이 주된 범행 이유가 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살인 동기가 명확하지 않은 ‘묻지마 살인’을 살펴보면, 피해자의 성별 비중은 역전된다. 이 분석한 ‘묻지마 범죄’ 33건 중 살인사건(살인미수 포함)의 피해자 23명 중 여성은 14명(61%), 남성은 9명(39%)이었다.

살인에 국한하지 않고 폭력 범죄 일반으로 넓혀보아도 비슷한 패턴이 발견된다.

경찰청 범죄 통계에서 살인·상해·폭행·협박·방화·손괴 등 6개 죄목과 관련한 피해자를 보면, 2014년 해당 범죄 피해자는 총 24만9021명인데, 이 중 여성은 7만3813명(30%), 남성은 14만7154명(59%), 성별 불상 2만8054명이다. 여성이 남성 피해자의 절반 수준이다.

하지만 대검찰청이 2012~2014년 일어난 163건의 묻지마 범죄(살인·상해·폭행·협박·방화·손괴)를 분석한 결과, 범죄 피해자 288명 중 여성은 142명(49%), 남성은 146명(51%)이다. 경찰청 범죄 통계와 비교해보면, 범행 동기가 분명치 않은 범죄일수록 여성 피해자의 비중이 급증하는 것이다.

‘묻지마 범죄 vs 증오범죄’ 틀을 넘어서

여성이 희생됐고, 희생되고 있다. 이 사건을 두고 ‘묻지마 범죄’인지 ‘증오범죄’인지 논쟁이 벌어졌지만, 중요한 대목은 그것이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권일용 경감은 “증오범죄의 경우 집단화 경향을 보인다. 흑인을 증오해 여러 테러와 범죄를 저지르는 쿠클럭스클랜(KKK)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번 사건은 그런 형태의 증오범죄라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도 “강남역 사건은 조현병 관리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일어난 범죄라는 점에서 크게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설명했다. 학문적·사법적으로 보자면 증오범죄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역시 “여성이 손쉽게 피해 대상이 되는 것은 사실”(권일용 경감)이며 “문제의 본질은 여성이 범죄 피해에 많이 노출되는 것”(이수정 교수)이라고 목소리를 모은다. 여성의 공포는 경험에 바탕하고 있는데, ‘묻지마 범죄’건 ‘증오범죄’건 여성에게 공포스럽긴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중요한 것은 학문적 개념이 아니다. 여성을 상대로 한 살인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과거 여성혐오와 폭력을 경험한 많은 이들이 추모하고 분노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번 사건으로 터져나오는 여성들의 발언을 들으면서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 차별 구조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조현병을 지닌 한 가해자에게만 집중하면 어렵게 터져나온 여성들의 목소리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