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독일 정부와 방송은 정치를 가르친다

학교에서 정치가 학습 테마, 어린이 뉴스 프로그램 나오는 독일… 14살 이상 정당 가입, 16살 선거권 캠페인 등이 한국에 시사하는 ‘탈정치’ 극복법
등록 2016-04-14 08:00 수정 2020-05-02 19:28
투표 참관인들이 지난 3월 실시된 독일 헤센주 지방선거에서 우편 투표자들의 용지를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dpa

투표 참관인들이 지난 3월 실시된 독일 헤센주 지방선거에서 우편 투표자들의 용지를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dpa

독일이 패전 반세기 만에 정치 선진국으로 발전한 배경에는 시민 정치교육이 큰 역할을 했다는 데 정치학자 대부분이 동의한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직후부터 독일 정당들은 유권자를 찾아가 정치가 왜 중요한지, 정치인을 잘못 뽑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유권자의 책임과 의무는 무엇인지를 알렸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무력 쿠데타가 아닌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 정상적으로 의회에 진입했기에, 유권자 스스로 투표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1960년대 후반 서유럽을 흔든 청년들의 혁명 열기로 전후 세대에 의한 과거 청산이 본격화하고 권위적인 사회 분위기에 평등의 새바람이 불면서, 독일 사회의 정치의식도 더 향상되는 계기를 맞았다.

독일 일상에선 ‘1인1표’가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원리로 작동한다. 9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베를린에 있는 각 정당은 이미 당원들의 1인1표 투표로 지역구와 비례대표 후보를 선출했다. 공식 회의든 친구들 간의 수다 자리든 쟁점이 생겨 합의가 불가능할 경우 독일인들은 다수결로 논쟁을 정리한다.

나치에 대한 반성이 바탕

학급 운영뿐 아니라 공동 발표 위주의 과제를 준비하면서도 1인1표 방식으로 토론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초등학생 때부터 체험하다보니 성인이 된 뒤에도 자신의 의견만큼 상대 의견도 존중돼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자신의 주장이 공동 결정으로 채택되려면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독일인들은 토론의 달인이다.

일상의 민주화를 구현한 독일이지만 지금도 시민 정치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의 교육방송(EBS) 같은 독일의 어린이 채널 KIKA는 매일 저녁 7시50분부터 10분짜리 어린이 뉴스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난민·환경 등 일상적 주제가 다뤄지는 것 외에 선거 기간엔 정당의 총리 후보가 이 프로그램의 어린이 리포터와 초등학생 눈높이의 인터뷰를 하기도 한다. 2013년 선거에서 당시 만 4살이던 나의 둘째아이는 길거리 포스터에 등장한 총리 후보자의 이름을 이 방송 덕분에 줄줄이 외우게 됐다.


독일 정당은 유권자, 특히 투표권이 없는 청년에게 다양한 정치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 만 14살 이상 아이들은 기독민주연합 청년유니온, 사회민주당 청년조직, 청년 녹색당 등에 가입해 활동할 수 있다.

중등과정에 선택과목으로 배치된 ‘정치 수업’이 아니더라도 정치는 중요한 학습 테마로 학교 현장에 반영된다. 획일적인 교육내용(커리큘럼) 대신 수업 시간의 30%가량(주마다 다름)을 교사 재량으로 진행해야 하는 독일의 공교육 규정 때문에 일반화할 순 없지만, 초등학교 6학년인 내 첫째아이의 경우 이번 학기 한 달간 독일어 시간에 ‘나치’를 주제로 공부한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박해했던 사료를 읽고 토론하며, 마지막 시간에는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와 관련한 영화를 함께 본다. 유명한 동물학자 이름을 딴 공립학교답게 환경을 다루는 자연 수업에도 정치색이 짙게 깔려 있다. 4학년 아이들은 한 학기 동안 먹거리에 대해 배우면서 기아 문제, 국가 간 식량 불균형, 공정무역에 대해 토론한다.

중앙정부는 1952년 설립된 연방정치교육센터를 통해 정치의 중요성을 알린다. 지금까지의 독일 정치를 기록으로 보여주는 온라인 아카이브(보관소)를 운영하고, 현장에서 시민들과 만나는 노력을 꾸준히 펼친다. 이달만 해도 난민에 적대적인 옛 동독 지역 슈베른에서 ‘전쟁·난민, 그리고 통합?’이란 제목의 3일짜리 세미나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97개의 행사를 진행한다.

독일 정당은 유권자, 특히 투표권이 없는 청년에게 다양한 정치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 모든 정당이 청년 당원들의 활동을 위해 공간을 내주고 당직자를 배치한다. 자금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만 14살 이상 아이들은 기독민주연합 청년유니온, 사회민주당 청년조직, 청년 녹색당 등에 가입해 활동할 수 있다. 정당법에 근거해 만들어진 정당 산하 재단들도 일반 시민 대상의 정치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데, 그 주제가 난민·유럽연합·환경·성소수자·아시아·문학 등으로 다양하다. 미래 세대를 키우기 위해 정당의 뜻에 부합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도 재단의 주요 업무다.

메르켈의 탈원전 정책이 나온 이유
필자인 염광희씨의 초등학교 6학년인 첫째아이가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박해 등을 배우는 수업 자료. 염광희씨 제공

필자인 염광희씨의 초등학교 6학년인 첫째아이가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박해 등을 배우는 수업 자료. 염광희씨 제공

이런 정치교육을 한 결과, 독일 시민들, 특히 청년들의 사회 참여는 매우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정당의 청년 모임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아이디어가 독일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베를린의 청년 녹색당원들이 주장한 대중교통 무상화는 이미 기성 정치인들의 진지한 토론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또한 독일어 명사에서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성별 구분 표기법을 파괴하면서까지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캠페인(시민이란 뜻의 단어 Bürger*Innen처럼, 남성형(Bürger)과 여성형 어미(Innen) 사이에 별표(*) 넣기)을 벌인다.

투표권 연령을 더 낮추자는 운동도 청년들이 주도한다. 독일은 연방제여서 지방선거 참여 연령이 주마다 다른데, 베를린의 경우 만 16살부터 지방선거 투표가 가능하다. 사민당 청년모임은 독일 국회의원선거의 투표 가능 연령(만 18살부터)을 지방선거처럼 만 16살로 낮추기 위해 청년 녹색당, 독일노조연맹 청년 조합원 조직 등과 연대해 기성 정치인들을 압박하고 있다.

독일 사회의 이러한 정치화는 사회 안정으로 나타난다. 정치인들이 정치화된 유권자를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공동의 이익보다 소수 기득권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 등은 다음 선거에 나와봤자 낙선이다. 정치인들은 유권자와 만나 소통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원자력발전 수명 연장을 결정한 지 반년 만에 발생한 후쿠시마(일본) 원전 사고 직후 자신의 결정을 뒤집고 탈핵을 선언한 것도 결국은 유권자의 표심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정치화된 다수의 유권자가 원하는 것을 따르니 사회가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독일 정치를 접하면서 바라본 한국의 상황은 ‘유권자 스스로의 탈정치화’라고 요약할 수 있다. 종합편성채널(종편)을 필두로 한 거대 언론은 양비론을 동원해 정치 혐오를 조장한다. 독일 사회와 비교하면 한국 청년의 탈정치화도 심각해 보인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성년이 되도록 시험 범위에 들지 않는 현실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무엇이 ‘헬조선’의 상황을 만들었는지, 왜 정치가 중요한지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노사모’ 열풍이 증명했다

그렇다면 청년을 포함한 한국 사회의 탈정치화를 막는 해법은 무엇인가? 독일처럼 정부 차원의 정치교육센터를 만들고, 학교 현장에서 일상적인 정치교육이 도입되면 좋겠지만, 역사 교과서 논쟁처럼 정치교육마저 국정화됐다가는 시민의 정치화는 고사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획일화된 교육이 이뤄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독일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정당의 민주화다. 사실 우리는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 등에서 투표권이 보장되는 것 외에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할 공간이 별로 없다. 정당은 이런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연습하기 좋은 제도적 공간이다. 독일처럼 주요 정책이나 선거에 나설 후보를 당원들의 1인1표에 의한 민주적 방식으로 결정하는 원칙 하나만 보장돼도 당원들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늘 토론하고 서로를 설득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거대 정당 내부에선 이런 민주적 방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지난 몇 달간 각 정당의 총선 후보자 선출 과정에서 보았듯, 당대표 또는 공천관리위원회의 판단에 따라 당원들의 의사와 무관한 이들이 대부분 지역구 후보로 결정됐다. 또 어떤 정치적 비전을 가졌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비례대표 후보로 지명됐다. 시민으로 구성된 당원들에게 의사를 표출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본선에서 표를 달라고 호소하니 국민의 정치 혐오가 더해갈 뿐이다.

정당은 그 어떤 생활공간보다 결과를 신속하게 확인할 수 있고, 그래서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공간이다. 주기적으로 선거가 열리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 당시 ‘노사모’ 열풍이 단적인 사례다. 적극적이며 헌신적인 우리 국민의 특성을 고려하면 정당에서 1인1표의 민주적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경우 그 폭발력은 독일이 경험한 이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는 시민들을 지역 정당 사무실로 불러들일 수 있고, 이들의 분노와 희망을 한데 모아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정책 수립도 가능할 것이다. 청년들의 정치 참여 의식도 이런 정당의 틀에서 높아질 수 있다.

정당 민주화, 탈정치 해법

여야를 불문하고 이번 총선이 국민의 감동을 끌어내지 못한 것은 유권자와의 소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책 결정이든 현역 의원 공천 탈락이든 후보자 선출이든 모든 선거 업무가 당원 위에 군림한 소수의 과두들에 의해 결정됐다.

탈정치화된 유권자, 정치에 무관심한 청년 세대를 탓하기 전에 정당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부터 돌아봐야 할 숙제가 우리에게 있다. 또한 정치가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작업이라면, 독일처럼 미래 세대인 청년들이 정당 안에서 정치와 민주주의 작동 원리를 경험할 수 있도록 정치아카데미를 내실 있게 운영하는 것도 탈정치화 극복을 위한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염광희 베를린자유대학 정치학과 박사과정·싱크탱크 코덱 연구원

※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