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은 2015년 1월1일 현충원 방명록엔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올해 방명록엔 평화통일을 이루는 해를 ‘2016년’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평화통일은 우리 헌법에서 지향하는 목표다. 그러나 지난해까지만 해도 북한의 소행이라고 국방부가 발표한 비무장지대 지뢰 폭발을 두고 남북 간 긴장감이 고조된 것을 떠올리면 2016년에 통일을 달성할 만큼 속도를 낼 수 있을지 의문도 든다. 통일의 상대는 우리 정부가 “도발·기만·위협”을 일삼는다고 주장해온 북한이다.
대북 전문가들은 2016년 1월1일 방명록의 배후는 ‘북한 붕괴를 전제로 한 통일’을 염두에 둔 박 대통령의 인식이라고 해석한다. 북한이 최근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강행한 이후 박 대통령이 결정한 조처들이 그런 인식에서 전개됐을 것이란 얘기다. 박 대통령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반도 배치 협의와 개성공단 전면 폐쇄로 북한에 초강경 대응을 선언했다. 지난 2월16일 국회 연설에선 북한이 변하지 않으면 “체제 붕괴를 재촉할 뿐”이란 말도 언급했다. 3월7일부터 4월 말까지 이어질 한·미 연합훈련에 미군은 역대 최대 규모의 전력을 참가시킨다.
박 대통령은 정말 북한 붕괴를 고려한 통일을 그리는 걸까. 북한 붕괴는 가능할까. 그러한 통일은 남북한에 긍정적인 걸까. 남북관계는 우리 경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만큼 중대한 문제다. 은 박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남북 전문가들의 진단과 남북문제에 관한 박 대통령의 말들을 심층 분석한 기사를 표지이야기로 싣는다.
취재 송호진·황예랑 기자, 편집 정은주 기자, 디자인 장광석</font>
2014년 6월 한국에서 개봉한 장률 감독의 영화 에 이런 대화 장면이 나온다.
“김정은의 북한은 얼마나 갈 거 같아요?” “….”
지방대 교수인 박아무개(이 영화의 공동 음악감독이자 가수 어어부프로젝트의 백현진이 연기)는 술자리에서 우연히 합석하게 된 남자가 동북아 문제에 정통한 유명 국제정치학자인 중국 베이징대학 최현 교수(박해일)라는 사실을 알고는 ‘김정은의 북한’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들은 듯 만 듯 빙그레 웃기만 하던 최 교수가 한마디 한다. “100년.”
<font size="4"><font color="#008ABD">김정은의 북한 100년 간다?</font></font>기분 좋게 대취한 상태이던 박 교수가 버럭 화를 낸다. “지방대 교수라고 나를 무시하는 거요? 사람이 진지하게 물으면 진지하게 답을 해야지, 농으로 받아넘기다니….” 최 교수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다시 말한다. “진지하게 말하는 겁니다, 100년.”
영화 를 다룬 평론이 숱하지만, 이 짧은 대화를 해석한 글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영화예술의 측면에서 이 대화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감독이 이 대화 장면을 아무 의미 없이 끼워넣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장률이 누구인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오랜 세월 서로 돕고 갈등해온 재중동포(조선족)와 북한 인민의 신산한 삶을 담담하게 그린 영화 의 감독이다.
최 교수의 ‘100년’이 재중동포 3세이자 소설가 겸 교수였던 장률 감독의 ‘판단’이라면, 박 교수의 “김정은의 북한은 얼마나 갈 거 같아요?”는, 한국 사회에 미만한 ‘북한붕괴론’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최 교수와 박 교수의 대화를 한국 사회를 뒤덮은 북한붕괴론에 대한 장률식 풍자로 읽어도 무방할 터.
북한붕괴론은 아주 오래된 농담이다. 역사가 길다. 첫 농담은 자못 심각했다. 1994년 7월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영원한 수령’ 김일성 주석이 심장마비로 숨을 멈춘 직후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북한을 ‘고장난 비행기’에 비유하며, “북한은 붕괴에 직면해 있다”고 장담했다. “빠르면 사흘, 길어도 3년” 안에 북한이 붕괴하리라는 ‘예언’이 김영삼 정부 고위 관료들의 입에서 무시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아는 바, 북한은 붕괴하지 않았다. 다만 김영삼 정부 시기는 남북관계에서 “공백의 5년”으로 기록됐다.
이에 앞서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실존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연쇄 체제 전환 탓에 북한붕괴론이 한국 사회 일각에서 제기됐으나 널리 퍼지진 않았다. 당시 노태우 정부가 북한과 오랜 협상 끝에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해 ‘상호 체제 인정·존중(1조), 내정 불간섭(2조), 비방·중상 금지(3조), 파괴·전복 활동 금지(4조)’ 등을 약속한 덕분이다. ‘붕괴’가 아닌 ‘공존’의 길이다. 노태우 정부 5년간 남북 당국 회담이 164차례 열렸는데, 이는 역대 정부 가운데 노무현 정부 때 169회를 빼고는 가장 많다. 보수 정부라고 다 북한붕괴론에 집착하지는 않았다는 역사적 실례다.
두 번째 농담이 출현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화해협력과 공존을 도모한 덕분이다. 두 차례 정상회담이 열렸고(2000년 6월, 2007년 10월), 동부전선에선 금강산관광, 서부전선에선 개성공단이 ‘평화의 회랑’을 만들었다.
두 번째 농담도 첫 농담 때처럼 ‘죽음’과 함께 램프의 뚜껑을 열고 나와 유령처럼 세상을 배회했다. 2011년 12월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숨을 멈춘 직후다. 각종 시나리오가 난무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 위원장의 죽음 이전부터 북한붕괴론을 부추겼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12월 말레이시아 동포 간담회에서 “통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선언했다. 2010년 11월30일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국무부 외교 전문을 보면, 그해 2월 천영우 외교부 2차관은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미국대사와의 조찬 자리에서 “북한은 이미 경제적으로 붕괴하고 있고,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하면 2~3년 내에 정치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붕괴는 없었다. 대신 남북관계가 직격탄을 맞았다. 천안함이 침몰했고, 남북의 해군이 서로 총과 포를 쏴댔고, 북한이 연평도에 포를 쏴 한국인 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명박 정부의 5·24 대북 제재 조처로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남북교류가 끊겼다. 하지만 2011년 이후 북한 경제는 한 차례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지 않았다(한국은행). 5·24 조처 이듬해인 2011년 북-중 무역이 전년 대비 162%로 급증했다(중국 해관). ‘풍선효과’다.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첫해인 2013년 겨울, 세 번째 농담이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그해 12월12일 김정일 위원장의 매제이자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고모부인 ‘2인자’ 장성택의 처형·죽음이 불쏘시개로 쓰였다. 남재준 당시 국가정보원장은 그해 12월21일 국정원장 공관에서 열린 송년회에서 “2015년에는 자유 대한민국 체제로 조국이 통일돼 있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2014년 ‘통일대박론’을 들고나왔다.
지금은 2016년. 통일은커녕 남북관계의 마지막 안전판인 개성공단마저 폐쇄됐다. 남북의 군통신과 판문점 연락관 창구도 닫혔다. 지금 남북 사이엔 실오라기 하나 이어져 있지 않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북한은 조만간 붕괴할까</font></font>박 대통령은 2월16일 국회 연설에서 “핵개발은 체제 붕괴를 재촉할 뿐”이라며,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북한 정권을 반드시 변화시키겠다”고 말했다.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라 ‘북한을 붕괴시키겠다’는 다짐이었다.
박 대통령이 2015년 7월10일 청와대에서 열린 통일준비위원회 회의에서 “통일은 내년에라도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지난 1월1일 국립서울현충원 방명록에 “한반도 평화통일을 이루어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2016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쓴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겠다. 박 대통령은 ‘북한 붕괴’를 언제부터 꿈꿔왔을까?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size="4"><i><font color="#991900"> ‘주한미군과 국경을 맞대느니 골칫덩어리 북한이 낫다’, 이것이 중국이 북한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앞선 세 차례의 농담은 북한의 붕괴를 목격하지 못하고 먼저 붕괴했다. 그사이 달라진 게 있다면, 농담의 출현 주기가 빨라지고 내용이 자극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 정도다. 박 대통령의 결기에 찬 선언은 ‘네 번째 농담’의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역사 리뷰가 길었다. 이제 두 개의 질문을 던지자. 첫째, 북한은 조만간 붕괴할까? 둘째, 북한이 붕괴하면 한국 주도로 통일이 이뤄질까?
첫째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중국’을 비껴갈 수 없다. 중국은 북한 대외무역의 90% 남짓을 차지하고, 북한이 소비하는 원유의 대부분을 공급한다. 이런 중국이 미국처럼 경제적으로 봉쇄하면 북한 체제가 오래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중국은 4차 핵실험 이후에도 “한반도 비핵화 실현, 정세의 안정과 평화 수호,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3원칙)을 강조하며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이런 방침은 희로애락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 것”(1월27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북한의 ‘깽판’으로 아무리 화가 나도 이 3원칙은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주한미군이 1500km에 이르는 압록강·두만강 접경지역에 주둔하면 중국이 좋아할까? ‘주한미군과 국경을 맞대느니 골칫덩어리 북한이 낫다’, 이것이 중국이 북한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반도를 해양세력의 침범을 막는 완충지대로 여겨왔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명이 대군을 파병하고, 1894~95년 망해가는 조선에서 일본과 전쟁(청일전쟁)을 치르고,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이 압록강까지 밀리자 마오쩌둥이 대군을 파병한 이유다. 청이 청일전쟁에서 대패하자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유린했다. ‘완충지대가 사라지면 대륙이 위험에 빠진다’, 이게 중국이 역사에서 배운 교훈이다.
지금 중국이 생각하는 완충지대는 북한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일본도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분단과 남북의 군사적 갈등은 미국 군산복합체의 오랜 화수분이고,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천명한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에 ‘깡패국가 북한’의 존재는 중국을 견제할 한·미·일 3각 안보협력을 강화할 명분이 된다.
더구나 미국·일본으로선 ‘통일한반도’가 중국을 적국으로 상정해 한-미 동맹을 지속한다는 보장도 없다. 지금보다 더 크고 강력할 수밖에 없는 ‘통일한반도’의 출현은 일본에도 달갑지 않은 상황 변화다. 북한이 동유럽의 옛 사회주의 국가들과 달리 지금껏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데에는 특유의 통치체제와 ‘내구력’보다 이런 동북아의 복잡한 역학 구도 탓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진단이다. 동북아의 냉전 구조가 해소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북한 붕괴하면 한국이 통일 주도할까</font></font>둘째 질문은 국제법과 현실의 측면으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 국제법적 판단은 이미 나와 있다. 그럴 가능성도 없지만, 북한이 폭삭 망해 무주공산이 됐다고 치자. 자동으로 한국 차지가 될까? 그렇지 않다. 국제법은 유엔의 통치권만 인정하고 있다.
유엔은 한국전쟁 기간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1950년 10월1일, 그래서 10월1일이 ‘국군의 날’이 됐다)하자, 그해 10월7일 총회에서 ‘결의 376(V)호’를 채택해 38선 이북 지역을 유엔군사령부가 접수하고,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가 “한반도의 구호와 재건”을 책임지도록 결정했다. 이는 한국의 주권이 유엔 감시 아래 총선을 치른 지역(38선 이남)에 한정된다는 유엔 ‘결의 195(Ⅲ)호’(1948년 12월12일)에 따른 것이다.
국제법은 그렇다 치고 현실은 어떨까? 북한 내부의 급변 사태로 김정은 정권이 무너지면, 북한의 권력층과 인민들은 남한에 ‘흡수합병’되기를 바랄까?
“북한이 붕괴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혹여라도 김정은 정권이 내부 권력 다툼 와중에 무너진다면, 중국 정부의 인정을 먼저 받는 세력이 새로운 정권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김정은 정권이 무너지면 북한 지역이 한국 차지가 되리라는 전망은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헛물켜기다.” 북-중 관계와 남북관계에 정통한 정세현 한반도평화포럼 상임대표(전 통일부 장관)의 지적이다.
독일의 통일은 동독의 붕괴로 이뤄진 게 아니다. 동독 인민들이 총선에서 서독과 통일을 핵심 정책으로 내건 정당을 다수당으로 뽑은 뒤 동·서독 정부의 협상을 거쳐 이뤄졌다. 빌리 브란트 이후 서독 정부의 일관된 동방정책이 동독 인민의 마음을 얻은 덕분이다.
한반도라고 다를 게 없다. 박근혜 정부처럼 남북관계를 극한의 갈등·충돌, 상호 불신의 수렁으로 몰아가면 ‘통일한반도’의 꿈은 신기루일 뿐이다. ‘통일한반도’의 꿈을 현실로 바꾸려면, 쉼없는 화해협력과 공생 노력으로 북녘 인민의 마음을 얻어 ‘사실상의 통일’ 상태를 이루고 ‘비핵·평화 한반도’를 다짐해 국제사회의 정치적 인정을 받는 길뿐이다. 다른 길은 없다.
*(한반도평화포럼 지음, 서해문집 펴냄, 2015)에 실린 필자의 글에서 일부 인용했음을 밝힙니다.이제훈 통일외교팀장 nomad@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font color="#C21A1A">▶ 바로가기</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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