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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도발을 도발하다

<한겨레21> 대통령 연설문 2597건 분석… 박근혜 대통령, 18년 만에 ‘퍼주기’ 첫 공식화
등록 2016-02-23 14:08 수정 2020-05-03 04:28

“과거처럼 북한의 도발에 굴복하여 퍼주기식 지원을 하는 일도 더 이상 해서는 안 될 일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2월16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여러모로 특별하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 역대 대통령들이 신년연설, 시정연설이 아닌 ‘특별’연설을 한 경우는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 더구나 청와대 기자들과의 공식 기자회견을 세 차례밖에 하지 않을 정도로 연설을 꺼린 박 대통령이 직접 특별연설을 자처했다. 내용도 여느 연설과 달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두 대통령의 같은 말, 다른 쓰임</font></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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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대통령 선거 때부터 표방했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라는 대북정책 기조를 완전히 뒤집었다. “북한 정권을 반드시 변화”시키겠다고 다짐했고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를 직함도 없이 ‘김정은’이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역대 어느 대통령의 연설보다도 북한을 향한 적대감을 강하게 내비쳤다. 대통령은 연설 도중 주먹을 불끈 쥐기까지 했다.

‘대통령의 말’이라는 측면에서도 이번 연설은 송곳처럼 돌출적이다. 은 지난 1월 데이터 분석 전문업체와 함께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 총 2597건을 분석(제1096~1097호 ‘숫자로 읽는 대통령’ 시리즈 기사 참조)한 바 있다. 그 가운데 북한과 관련한 ‘대통령의 말’, 특히 2013년 2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 179건에 등장했던 말들을 다시 분석해보았다.

‘퍼주기’라는 단어는 지난 18년치 대통령 연설문 317만670개 형태소 가운데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 보수 단체나 언론이 남북 경제협력과 대북 지원사업을 ‘퍼주기’라고 비난하긴 했어도 대통령이 공식 연설에서 공공연히 이처럼 규정한 적은 없었다. 이번 연설에서 처음으로 박 대통령이 ‘대북 지원=퍼주기’ 프레임을 공식화한 것이다.

‘도발’이라는 단어의 쓰임도 되짚어봤다. 박 대통령은 2013년 2월 취임 이후 2015년 10월까지 연설문에서 ‘도발’이라는 단어를 총 77번 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도발’이라는 단어의 사용량이 눈에 띄게 늘어 임기 5년간 연설문에서 99번 북한의 ‘도발’을 언급했다.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5번밖에 쓰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도발’을 120번이나 언급했다. 햇볕정책을 떠올리면 뜻밖이지만, 배경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대북정책 3대 원칙의 첫 번째로 “북한의 어떠한 무력 도발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1999년 서해교전(연평해전)이 벌어진 탓도 작용했다.

자주 쓰였다 하더라도, 김대중과 박근혜의 ‘도발’은 맥락이 전혀 다르다. 김 전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나머지 2가지 원칙인 “우리도 북한을 해치지 않으며 남북 교류협력을 적극 추진한다”는 입장을 강조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도발’을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이번 연설에서 ‘도발’을 20번이나 썼다. 연설문에 언급된 단어 횟수로만 따지면 북한(54번), 국민(29번), 핵(28회) 다음으로 많이 등장했다. 하나의 연설문에서 ‘도발’이 10번 이상 언급된 적은 이 분석한 총 2597건의 연설문 가운데 하나도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을 20차례에 걸쳐 비난했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해법으로는 ‘제재’만 제시했다. ‘대화’라는 단어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았고 ‘통일’도 4번 언급하는 데 그쳤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툭툭 내뱉는 공식 연설문</font></font><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4"><i><font color="#991900"> 극과 극은 통한다. ‘대박’의 꿈이 멀어졌다고 느끼자, 대통령은 다듬어지지 않은 말들을 툭툭 내뱉었다.</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북한의 붕괴를 바라는 듯한 언급도 과거엔 없었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연설문에서 북한 정권을 겨냥해 ‘붕괴’라는 단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북한의 붕괴를 획책하는 것이 아닙니다”(김대중 전 대통령 1999년 10월5일 ‘제9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개회사), “외국 투자자들은 전쟁이나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노무현 전 대통령 2007년 1월23일 ‘신년연설’)와 같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붕괴’라는 단어를 예외적으로 등장시켰을 뿐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연설에서 “북한 정권이 핵개발로는 생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체제 붕괴를 재촉할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하겠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1990년대 이후 4명의 대통령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통일·외교 관련한 언급을 많이 했다. 은 기자 3명이 대통령 연설문에서 쓰인 단어를 정치/경제/사회/통일·외교/행정 등 총 7개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이를 교차 검증하는 ‘휴먼 코딩’ 방식으로 대통령이 어떤 시기에 어떤 분야를 연설에서 부각시키려 했는지를 따져봤는데, 박 대통령의 통일·외교 분야 단어의 언급 추이는 과 같았다. 2014년 3월 독일 드레스덴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을 발표했을 때 관련 단어량이 최고조에 달했고, 개성공단이 162일간 폐쇄된 2013년 4~9월, 비무장지대(DMZ)에서 목함 지뢰 사건이 일어난 2015년 8월에도 북한 관련 언급이 크게 늘어났다.

2014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통일은 대박”이라는 다소 뜬금없는 말을 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 ‘대박’의 꿈이 멀어졌다고 느끼자, 대통령은 다듬어지지 않은 말들을 툭툭 내뱉듯이 공식 연설문에 등장시켰다.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고 있는 김정은 정권” “지금 북한 정권은 극한의 공포정치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의 불가측성과 즉흥성” “잘못된 통치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삶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 등 이번 연설에 등장한 단어들에선 성마른 결기가 느껴진다.

박근혜 대통령이 쓴 표현들은 어디에선가 본 듯이 낯설지가 않다. 은 데이터 전문 분석업체에 의뢰해 2013년 2월~2015년 10월 이 ‘박근혜’와 ‘북한’을 동시에 언급한 사설을 분석해봤다. 그 사설 속에 담론이 어떻게 형성돼 있는지를 ‘지도’(단어 간 의미연결망 분석)로도 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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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속 단어를 형태소 분석기로 헤아린 다음 ‘북한’이라는 단어와 밀접하게 연결된 단어가 무엇인지를 언급 빈도수(원의 크기)와 동시 출현 횟수(선의 굵기)로 따져본 결과가 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처럼 ‘도발’이라는 단어는 박근혜 정부 들어 와 사설에서 빈번하게 등장했다. 이것이 이번 대통령 연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 밖의 연관을 살펴보면, 는 ‘대북-제재’를, 는 ‘제재→북핵→포기’라는 논리 흐름을 만들며 ‘위기’를 고조시켰다. 는 ‘개성공단’이라는 의제에 상대적으로 신경을 더 많이 썼고, 와 은 ‘대화’를 통한 ‘한반도-평화’와 ‘통일-준비’에 관심을 가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대통령 표현이 낯설지 않은 이유</font></font>

이번 특별연설 다음날인 2월17일치 신문 사설에서도 이같은 프레임은 그대로 재현됐다. ‘朴 대통령, 對北정책 전면 전환해 ‘核 불감증’ 퇴치할 수 있을까’(), ‘박 대통령 국회 연설, 국론 결집 계기 돼야’(), ‘北 김정은에 박 대통령 최후통첩 “핵 포기냐, 체제 붕괴냐”’() 등에서 드러나듯, 조·중·동은 박 대통령의 연설에 힘을 실어줬다. 반면 와 은 각각 ‘부작용만 키울 ‘초강경 대북정책’ 밀어붙이기’ ‘북핵 문제에 궤변·변명·무대책으로 일관한 대통령 연설’이라며 박 대통령을 비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에 북한을 향해 도발, 핵, 미사일, 제재, 발사, 위협, 긴장 등 잔뜩 날선 말들을 쏟아냈다. 대통령 연설문에 등장한 이런 단어들을 누가 이미 많이 써왔는지는 가 말해준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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