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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지 않도록 도와달라”

영화 <귀향> 14년 만에 시민의 힘으로 2월24일 전국 개봉… 감독 조정래,“영화 상영 때마다 소녀가 돌아온다는 마음”
등록 2016-02-02 21:54 수정 2020-05-02 19:28
끌고 간 사람들이 제자리로 돌려놓지 않으면 고향으로 찾아갈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온 10대의 소녀들이 있다.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간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숨지거나 버려졌고, 극히 일부가 돌아와 상처를 안은 채 살아왔다. 조정래 감독의 은 1943년 15살 전후에 위안소로 끌려간 소녀들의 과거를 비추고, 1991년을 사는 어린 무녀가 타국에서 숨진 위안부 피해 소녀들의 넋을 고향으로 데려오는 내용의 영화다. 15살 관람가다.
이 영화가 구상된 지 14년 만에 개봉을 앞뒀다. 7만5270명의 시민이 11억6122만원의 제작비를 후원해 을 일으켰다. 시민 후원자 수는 세계 영화 사상 최대 규모다. 도 18개월간 이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보도하고, 제작비 마련을 위한 온라인 펀딩을 진행해 의 개봉에 힘을 보탰다. 여기 을 만든 사람들을 소개한다. 역사적·문화적 증거로 남기려고 이 영화에 동참한 사람들이다. _편집자
영화 <귀향> 포스터 앞에 선 조정래 감독. 인터뷰를 마친 다음 날인 1월21일, 그는 <귀향>을 들고 미국 현지 시사회를 위해 출국했다가 2월1일 귀국했다. 김진수 기자

영화 <귀향> 포스터 앞에 선 조정래 감독. 인터뷰를 마친 다음 날인 1월21일, 그는 <귀향>을 들고 미국 현지 시사회를 위해 출국했다가 2월1일 귀국했다. 김진수 기자

지난 1월19일, 영화 팀의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케이크 위에 ‘2.2.4’라고 적힌 3개의 숫자가 꽂혔다. 조정래(43) 감독이 촛불을 껐고, 배우와 스태프들이 한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그날은 전국 개봉 날짜(2월24일)가 찍힌 포스터가 언론에 공개된 날이었다. 2월24일이란 날짜를 받아들기까지 14년이 걸렸다. 감독은 “감동적이고 감격스러우면서도 개봉의 바다로 나가기 위해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2002년 고수를 흔든 한 장의 그림

14년의 출발점은 하나의 그림이었다. 대학 시절(중앙대 연극영화과) 국악동아리에서도 활동했던 조 감독은 창작 소리꾼 ‘바닥소리’의 전속 고수(북 치는 사람)였다. 바닥소리의 일원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있는 ‘나눔의 집’에 찾아가 공연과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다 강일출 할머니가 미술심리치료 과정에서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이란 그림을 2002년에 보았다.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들이 산속 구덩이에서 불타는 것을 목격한 기억, 그곳에서 죽기 직전 갑자기 교전이 벌어져 가까스로 탈출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숨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막연히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어디선가 살아 있는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학살됐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소모품처럼, 물건처럼 취급하다가 간단히 죽여버린 것에 경악했어요.”

감독은 강일출 할머니가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을 2002년에 보고 <귀향>을 구상했다.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감독은 강일출 할머니가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을 2002년에 보고 <귀향>을 구상했다.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는 이상한 꿈까지 꾸게 됐다.

“충격을 받아서인지 몸도 많이 아팠어요. 그리고 새벽에 꿈을 꿨죠. 구덩이에서 불에 타 죽은 소녀들이 어느 순간 일어났는데 피로 얼룩진 옷들이 흰옷으로 바뀌고 상처도 없어진 거예요. 발을 살짝 들더니 소녀들이 하늘을 나는데, 뭐랄까 장관이었죠. 돌아가신 분들이 지금 고향으로 너무 돌아오고 싶어 하는구나,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그때부터 이걸 영화로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그 결심이 감독으로서 그의 삶을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만들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꿈을 꾼 이후 그는 타국에서 숨진 어린 소녀들이 나비가 되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오는 의 큰 골격을 써내려갔다.

넋의 귀향을 바라면서 제목을 귀신 ‘귀’(鬼), 고향 ‘향’(鄕)으로 정했다. 이후 내용을 구체적으로 더 다듬은 뒤 2008년부터 투자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인이건 낯선 사람이건 영화를 얘기할 기회가 되면 의 내용을 소개했고, 이 영화를 꼭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조 감독을 아는 영화 관계자들은 그를 아끼는 마음으로 만류했다. “위안부 소재는 한국 영화계에서 마지막 남은 금맥 같은 소재이지만 흥행성이 떨어져 많은 감독들이 영화로 만들지 않았던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 영화 만들고 (망한 뒤에) 감독 생활을 끝내려는 거냐”고 걱정하기도 했다.

투자자들의 반응은 더 차가웠다. 그가 내민 시나리오를 보지 않는 경우도 잦았다. “감독이 마이너에만 있어서 모르나본데 아이돌 가수라도 배우로 쓰든지. 소재도 마이너이고. 이 영화 100% 안 된다”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감독 생활 끝내려는 거냐” 만류

“전쟁이 나면 어차피 여성은 당하게 되어 있는 것 아니냐”는 험한 말도 들었다. “젊은 사람이 이런 거 하지 마라. 위안부 할머니들 가짜란 걸 몰라? 몸 팔러 간 여자들이지”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사람은 수도권 지역 시장 예비후보로 출마한 경력도 있었다. 조 감독은 화를 누르다 “할머니에게 사과하세요”란 말을 던지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고비는 2013년에 찾아왔다. 투자 의향이 있다는 중국 쪽 사람과 연결되면서 감독은 중국인 배역을 넣어 시나리오를 일부 수정하기도 했다. 중국 여성도 위안부로 동원됐기 때문에 그쪽에서 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투자 가능성이 무르익어 계약을 위해 중국 베이징에까지 갔다. 하지만 그쪽에서 “주인공을 중국 사람으로 해야 한다”는 조건을 갑자기 들고나왔다.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중국 쪽의 큰 투자가 물 건너가면서 이 영화를 함께 준비한 사람들도 많이 떠나갔다. 그때 감독은 “ 이건 안 되는 영화인가” 자문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죄송했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위안부 피해) 소녀들의 영령을 모시지 못해 죄송스러웠다. 모든 출구가 닫힌 듯해 자신감이 없어졌고 우울증도 왔다”고 떠올렸다. 당시 그를 본 한 관계자는 “감독의 눈빛이 꺼져 있을 만큼 의욕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차근차근 둘러보니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가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2009년 처음 만나 무턱대고 일본군 배역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아준 뒤 팀에 합류한 친동생 같은 동반자(임성철씨)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다시 힘을 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 복잡해지면 ‘나눔의 집’ 찾아
위안부 관련 행사(왼쪽)에 적극 참여해온 그는 2014년 10월 경남 거창에서 <귀향>의 티저 영상을 촬영했다.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위안부 관련 행사(왼쪽)에 적극 참여해온 그는 2014년 10월 경남 거창에서 <귀향>의 티저 영상을 촬영했다.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이후 그는 “더 몸을 숙여 ‘도와달라’고 얘기하며 다녔다”고 했다. ‘도와달라’는 말은 나중에 의 스태프로 합류한 이들도 감독한테 공통적으로 들은 얘기라고 입을 모은다.

“‘도와달라’고 했던 것은 그 말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저에게 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만들라고 명령하신 게 아니라 ‘우리가 당한 일이 잊혀지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말씀하셨죠.”

그는 마음이 복잡해지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있는 ‘나눔의 집’을 찾았다. 그곳엔 그가 생전에 뵈었으나 이제는 세상을 떠나 ‘나눔의 집’ 입구에 동상으로 세워진 할머니들도 있다. 동상 앞에서 “나의 생이 끝나 할머니들을 다시 뵐 때 웃음을 지으며 달려갈 수 있게 저를 일으켜주세요”라고 기원했다.

연로한 할머니들을 대신해 이 영화가 국내외를 누비는 “문화적 증거”가 되기를 바랐던 감독은 더 이상 제작을 늦출 수 없었다. 생을 마감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늘어나고 있었다.

투자자의 외면을 받던 그를 일으킨 건 시민들이었다. 그는 의 대략적 줄거리와 영화 관련 영상을 인터넷에 올렸고, 이를 본 시민들이 조금씩 후원금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 후원금을 종잣돈 삼아 2014년 10월 경남 거창 서덕들에서 을 소개하는 짧은 영상을 찍었고, 인터넷에 공개한 이 영상이 다시 시민의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나눔의 집’ 동상 앞에서 “나의 생이 끝나 할머니들을 다시 뵐 때 웃음을 지으며 달려갈 수 있게 저를 일으켜주세요”라고 기원했다.

도 이 영화의 제작비 마련에 동행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카카오와 협력해 ‘뉴스펀딩’(현 스토리펀딩)을 시작했다. 2014년 12월18일부터 44일간 진행한 이 펀딩에서 2억원 남짓 모였고, 제작진 후원 계좌로도 시민의 후원금이 밀려들었다. 저금통에 모은 돈을 엄마와 함께 후원했다는 유치원생, 하루에 1천원씩 365일간 36만5천원을 모아 후원한 가족도 있었다.

감독은 이런 후원금과 일본군 역을 겸했던 임성철 PD가 끌어온 시민 투자금을 합해 2015년 6월 촬영을 마무리했다. “스태프들이 도와주러 왔다가 이 영화의 주인으로 변해갔다. 이런 영화는 잘 찍어야 한다며 더 좋은 장비를 싸게 가지고 오기도 했다”며 조 감독은 고마워했다. 배우 손숙씨 등도 “출연료는 필요 없다”며 촬영에 동참했다.

하지만 컴퓨터그래픽, 색보정, 사운드 보강 등 후반작업을 위한 제작비 부족에 다시 직면했다. 은 2차 뉴스펀딩을 시작했고, 시민들은 약 3억원을 모아주었다.

“일본 국민도 봐야 할 영화”
2015년 4~6월 <귀향>의 본촬영을 진행했고 (위쪽), 그해 8월15일 ‘나눔의 집’에서 <귀향>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상영했다(가운데). 지난 1월17일 서울극장 시사회를 끝으로 후원자 1차 전국 시사회를 마무리했다.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2015년 4~6월 <귀향>의 본촬영을 진행했고 (위쪽), 그해 8월15일 ‘나눔의 집’에서 <귀향>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상영했다(가운데). 지난 1월17일 서울극장 시사회를 끝으로 후원자 1차 전국 시사회를 마무리했다.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해외의 관심도 이어졌다. 는 소속 기자를 직접 한국에 보냈다. 위안부 소재의 영화가 국민 후원 방식으로 제작되는 과정을 지난해 3월 1개면을 털어 보도했다. 개봉하지도 않은 한국 영화를 이렇게 크게 보도한 건 이례적이다.

미국 연방의회에서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위안부 결의안을 주도했던 마이크 혼다 의원이 지난해 7월 말 결의안 통과 8주년 행사에 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의원회관에서 상영하도록 도왔다. 영상을 본 혼다 의원은 “굉장한 힘을 가진 영화다. 일본 국민도 봐야 할 중요한 영화”라고 말했다.

감독은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 중순까지 국내 후원자를 위한 1차 전국 시사회를 진행했다. 시민 후원으로 영화를 완성하고, 그 후원금으로 전국의 극장을 대관해 상영회를 연 것은 영화계에서 처음이다. 1월29일 현재, 이 영화를 후원한 시민은 7만5270명이다. 시민 후원금 총액은 11억6122만원에 달한다. 시민 후원자의 규모는 세계 영화 사상 최다 기록이다.


“이 영화를 집이라고 한다면 시민들이 벽돌 한장 한장을 모아준 것이죠.”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엔딩 크레디트의 긴 행렬을 보고 “울컥했다”는 관객이 많았다. 이 영화의 배급사는 포스터에 ‘국민이 만든 영화’라는 글귀를 새겼다.

먼저 영화를 만난 이들의 평도 호의적이다.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본 어떤 관객은 “과연 완성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갖고 후원했는데 진짜 완성돼서 놀랐고, 생각보다 완성도가 높아서 또 놀랐다”는 글을 온라인에 남겼다. 다른 관객은 “보통 영화들은 극장에서 나오면 그 감흥이 날아가는데 은 시간이 지날수록 슬픔이 파고든다”는 평을 남겼다.

중간에 주저앉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14년간 아내도 “근근이 이어가는 생활”을 견뎌주었다. 감독의 아버지는 촬영 기간에 배우들을 태워 이동시키는 ‘수송 스태프’로 참여했다. 감독의 어머니는 영화 편집이 완료될 즈음 암 수술을 받았다. 지금 암과의 힘겨운 싸움을 이겨내고 있다.

“대형 제작사도 아니고, 유명 감독도 아니잖아요. 아무리 제가 이 영화를 선한 의도로 만든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분들이 도와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영화를 집이라고 한다면 시민들이 벽돌 한장 한장을 모아준 것이죠.”

감독은 “영화가 1회 상영될 때마다 타지에서 숨진 한 분의 영혼이 돌아온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의식을 치르는 기분”이라고 했다.

영화는 최근 한·일 양국의 위안부 문제 합의가 이뤄진 직후에 개봉하게 됐다. 그는 “(위안부) 피해자가 공감하지 못하는데 합의를 이쯤에서 이해하라고 하는 건 폭력”이라고 했다. 그를 아끼는 영화인들은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한 정부의 태도 때문에 극장들이 스크린을 많이 열어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려한다.

관객의 열망만큼 스크린 열리길

조정래 감독의 소망이 있다.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만큼, 그리고 이 영화의 개봉을 기다렸던 관객들의 열망만큼 극장의 스크린이 합당하게 열리기를 그는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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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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