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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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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의 세계

제7회 손바닥문학상 대상 수상작
등록 2015-12-15 12:05 수정 2020-05-02 19:28

7번째 손바닥문학상 공모전에 92편의 작품이 도착했다. 올해 처음 손바닥문학상 심사를 맡은 소설가 전성태는 “여느 문학상 심사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소재들이 이 문학상의 미덕이다. 손바닥문학상에 투고된 작품만 보면 한 해를 정리할 수 있을 만큼 올해 한국 사회를 관통했던 사회 이슈가 골고루 작품에 등장했다”고 말했다. 전·월세 세입자의 불안한 주거 환경, 대형 유통업체의 횡포, 세월호 참사 그 이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 노인의 성과 고독, 가정폭력, 성소수자 혐오 등 다양한 사회적 소재가 글이 되어 세상을 비추었다.
예심은 기자 5명이 진행했다. 예심에서 선정된 작품 10편을 김선주 언론인, 최재봉 선임기자, 전성태 소설가가 모두 검토한 뒤 대상 1편, 가작 2편을 골랐다. 대상 수상작은 성해나씨의 다. 의약품 생동성 임상실험 아르바이트와 서울 강남의 일본식 술집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는 20대 남녀의 기울어진 삶을 다뤘다. “사선으로 기울어진 것만 같은” 세계에서 절망하고 쓰다듬는 잿빛 청춘의 이야기다.
가작 수상작으로는 최예륜씨의 과 이유경씨의 가 뽑혔다. 은 사글셋방 스물다섯 개가 딸린 림천여인숙에 사는 가난한 군상의 비릿한 삶을 독특한 연극적 구성으로 담아냈다. 는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억울함을 수능시험을 치르는 날을 시간적 배경으로 해 기발하게 그려냈다. 세 편 모두 참담하게 구겨진 현실을 빠져나오는 연대의 다리를 그리는 데도 힘썼다. 작품들은 별도의 작품집으로 묶어 신년호와 함께 발행된다. 시상식은 12월17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 8층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_편집자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그 집으로 이사를 온 첫날, 나와 을은 대형마트에서 산 조립식 식탁 때문에 한참 동안 애를 먹었다. 설명서에 적힌 순서대로 이것을 저기에 끼워 맞추고, 저것을 이쪽에 끼워 맞췄는데도 막상 완성시키면 식탁은 다리 한쪽이 짧은 이상한 모양이 되어 있었다. 여러 번 다시 조립했는데도 그대로였다.

이상하지?

한쪽 다리가 들린 식탁을 보며 을이 말했고, 가만히 서서 바라보다 우리는 그것을 교환하기로 했다.

마트는 언덕 아래에 있었다. 식탁을 분해한 조립품을 담은 박스를 을과 한쪽씩 나눠 들고 언덕을 천천히 내려갔다. 언덕은 가팔랐다. 핑퐁을 하듯 우리는 후, 하, 후, 하, 하는 숨소리를 번갈아 냈다. 후우우. 막 백반 집을 지났을 때 을이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을은 그제 어머니에게 걸려온 전화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 어머니가 지난주에 교회 사람들과 함께 흑석동에 있는 점집에 갔다. 2만원을 내면 한 사람의 사주를 볼 수 있었는데, 그게 그 점집에서 가장 싼 복채였다. 어머니에게는 딱 2만원이 있었다. 가족, 친지의 사주나 아들 부부의 궁합 이런 걸 보는 사람들 틈에서 어머니는 누구의 사주를 봐야 할까 고심하다 내 사주를 봐달라고 했다고 한다. 형도 있고, 동생도 둘이나 있고, 본인도 있는데 왜 하필 내 사주를 봤는지 모르겠다, 고 그는 숨을 가쁘게 쉬며 말했다. 을이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우리는 마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후우우. 을은 다시금 숨을 크게 내쉬었다.

우리보다 먼저 AS를 받으러 온 손님들이 있어 나와 을은 기다리는 시간 동안 지하 식품 코너에서 장을 봤다.

아까 했던 얘기 계속 해줘.

세일 전단을 살펴보고 있는 을에게 나는 말했다. 을은 카트를 천천히 밀며 말을 이었다. 을의 어머니가 받아온 사주에 따르면 그는 스물일곱에 죽을 운명이었다.

그럼 당장 내년에 죽는다는 거잖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을에게 나는 그렇게 물었다. 을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쇼핑 카트에 우유를 집어넣었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더 주는 전단 상품이었다. 함께 장을 볼 때마다 그는 유통기한도, 브랜드도 상관없이 무조건 싸게 파는 음식만을 집어들곤 했다. 제조일자를 확인하고, 조금 더 나은 음식을 사라고 해도 그는 그래도 싸잖아, 하며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그 무당 말이 나는 결혼하면 삼대가 족족 망할 기구한 팔자를 가졌다고 하더래. 어차피 그럴 바에 일찍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저런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그의 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울적해졌다. 아는지 모르는지 을은 세일 전단만 꼼꼼히 확인하며 저렴한 상품을 선별하고 있었다. 가장 싼 시리얼이 뭔지 살피는 을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몰랐는데 을은 귓불이 없는 귀를 가지고 있었다. 귓불 없는 귀를 가진 사람은 가난하다던데. 중얼대다 을이 쳐다보기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누군지 몰라도 나랑 결혼할 사람은 힘들 거야.

을은 말했다. 대답 대신 나는 을이 고른 시리얼보다 조금 더 비싼 유기농 시리얼을 카트에 담았다. 을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때마다 나는 말을 아꼈다. 을은 말이 없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내가 고른 시리얼을 제자리에 놓고, 정육 코너를 향해 카트를 밀었다. 돼지고기를 할인 판매한다는 방송이 들렸다.

새 제품으로 교환했는데도 식탁은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건 이 집 문제야.

또다시 마트에 가야 하나 고민하는 내게 을은 말했다. 을은 냉장고에서 생수병 하나를 꺼내 굴렸다. 병은 집의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천천히 굴러가 그쪽 벽에서 멈추었다. 나는 오, 하고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지반이 왼편으로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고 을은 말했다. 을의 말을 듣고 보니 집의 모든 것들이 이상한 각도로 치우쳐진 것 같았다. 식탁에 앉아 머리를 왼편으로 살짝 기울였다. 수평은 여전히 맞지 않았다.

그래도 집값이 싸잖아.

이상하다고 중얼대는 내게 을이 말했다. 다음엔 더 나은 곳에서 살자. 그는 그렇게 덧붙였다. 을이 말하는 다음이 언제인지 물으려다 말았다. 다음이 얼마나 기약이 없는 말인지 나도, 을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한참 동안 머리를 기울이고 있으려니 목 뒤가 뻐근했다.

마트에서 사온 것들로 저녁을 지어 먹은 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벗고 몸을 섞었다. 을의 몸에서는 언제나 미묘한 냄새가 났다. 하도 맡아 이제는 익숙해진 냄새였다. 간장 냄새 같기도, 오래 달인 약재에서 풍기는 향 같기도 한 냄새. 그런 냄새를 나는 어린 시절 친구의 집에서 맡은 적이 있었다. 놀러갈 때마다 친구 어머니의 배가 항상 불러 있던, 형제가 많고 가난한 집이었다. 익숙하지만 친근해질 수는 없을 것 같은 그 냄새를 맡으며 나는 을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긴 정사 후, 설거지하기가 귀찮아져 나와 을은 이불을 정리하고 창가 아래 나란히 누웠다. 건너편 상가의 네온사인 불빛이 빨강, 초록, 노랑으로 반짝이는 어두운 방 안에서 나는 을의 등에 그의 이름을 반복해 적으며 혼자 웃었다. 을의 풀네임은 가을이었다. 을은 그와 함께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일했을 때 동료들이 그를 부르던 별칭 같은 것이었다. 가을이라고 부를 때도 있었지만 을이라는 어감이 더 가볍고, 간편해 다들 을을 을이라고 부르곤 했다. 을 또한 그렇게 불리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나는 을의 등에 을이라고 썼다 가을이라고 썼다 하며 장난을 쳤다. 어렸을 때. 어둠 속에서 을이 말했다.

어렸을 때, 가족이랑 딱 이만한 방에 살았어. 그 집에서 살기엔 여섯은 너무 많았던 거 같아. 내 왼편에 형이 자고, 오른편엔 아버지가 잤는데 누구한테 방이 너무 좁다고 말은 못하고 밤마다 입을 꾹 다물고 울었어. 가족도 알고 있었는지 언젠가 밤에 자는데 아버지가 왜 밤마다 우느냐고 꾸짖는 거야. 이유도 말하지 못하고 나는 자꾸 울고, 아버지는 천장을 보고 누워서 왜 우냐, 왜. 자꾸 혼만 내고.

등을 돌리고 있어 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동조 없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돌아누운 을의 등에 네온 불빛이 어른대었다. 을의 목소리가 이곳이 아니라 저 길 건너편에서, 아니 그보다 먼 데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려고 애써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천장에 고인 형형색색의 빛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빛은 흘러가다 왼쪽 벽의 모서리에서 직각으로 꺾였다. 지반이 기운 집에 누워 있으려니 이 세계도 조금은 사선으로 기울어진 것만 같았다. 영영 수평을 이룰 수 없다면 이 세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하다 잠들었다.

아버지는 용접공이었는데, 아파트 건설 현장 같은 데서 일하다 죽었어. 공중에서 날아온 크레인 갈고리에 머리를 맞아서. 아버지 죽은 후에 가족이랑 누워서 잠을 자는데 뒤척여도 될 만큼의 자리가 생긴 거야. 조금 넓어져서 좋았는데, 자꾸 허전하고 그래서 전처럼 또 울었는데 이제는 왜 우는지 이유를 모르겠는 거야. 이유를 몰라서 계속 울었어.

길 건너 네온사인이 빨강, 파랑, 초록으로 어슴푸레 반짝이다 돌연 깜깜해졌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말을 마친 뒤에도 을은 아무런 미동 없이 등을 돌린 채 누워 있었다. 등을 쓰다듬어줄까, 생각하며 손을 조금 뻗었다. 어쩐지 움츠러든 것 같은 등 위로 네온사인 빛이 천천히 흘러갔다. 그 등을 보며 이내 마음을 접었다. 뭔가 얹힌 것처럼 뱃속이 묵직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만 자자.

어둠 속에서 을이 말했다. 자려고 애써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천장에 고인 형형색색의 빛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빛은 흘러가다 왼쪽 벽의 모서리에서 직각으로 꺾였다. 지반이 기운 집에 누워 있으려니 이 세계도 조금은 사선으로 기울어진 것만 같았다. 영영 수평을 이룰 수 없다면 이 세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하다 잠들었다.

그 집의 현관 문고리에는 전에 살던 사람들이 두고 간 것 같은 우유 주머니가 걸려 있었다. 그 주머니를 보고 을과 나는 우유를 배달시켜 먹는 일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을은 내게 우유를 배달시켜 먹어본 적이 있느냐 물었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늘 우유를 시켜 먹었다고 대답했다.

엄마가 일 나가느라 바쁘니까 아침 차려줄 사람이 없어서 밥 대신 우유랑 시리얼 같은 거 먹고 그랬어.

내 말을 듣고 을은 생각에 잠겼다가 자신은 한 번도 우유를 배달시켜 먹어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럼 이번 기회에 한번 마셔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내가 말했고, 을은 내일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가기 전에 배달업체에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그 무렵 을은 생동성 실험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택배 상하차 일을 하다 허리를 크게 다친 이후로 을은 그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실험 중인 복제약을 먹고 신체 변화를 체크하는 일이었는데, 정기적이지도 규칙적이지도 않아 을은 주로 집에서 칩거하며 일이 생길 때마다 밖으로 나가곤 했다. 을은 매 실험마다 10mℓ의 피를 뽑고, 30분 간격으로 약을 복용했다. 수척해진 채 돌아오는 을의 팔에는 언제나 채혈용 바늘 자국이 남아 있었고, 빨래를 하기 위해 바지 주머니를 뒤져보면 알약 껍질들이 쏟아져나왔다.

다른 일 하면 안 돼?

주사 자국들이 남아 있는 을의 팔을 쓸어내리며 나는 따지듯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을은 손가락을 튕겨 내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어쩔 수 없잖아.

을은 더 높은 보수의 일자리를 구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나한테는 특별한 게 없으니까. 지금은 허리도 이렇고. 을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실험이 끝나고 3개월간은 참가할 수 없었지만, 을은 병원에서 일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주사 자국이 가시면 다시금 일을 시작하곤 했다. 그렇게 번 돈은 부모의 빚을 갚거나 집세를 내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날, 퇴근을 해 집으로 돌아와보니 우유 배달에 대해 별 얘기가 없기에 기다리다 저녁을 먹을 때 넌지시 물어보았다. 을은 아무 말 없이 밥만 먹다 낮에 배달업체 직원과 나눈 통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화를 걸긴 했는데.

을은 잠시 우물대다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엄청 높은 여자가 전화를 받았어. 그런 전화를 걸긴 처음이라 그 여자가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한참 동안 대답을 못했어.

고단백 저지방 우유부터 무지방, 가공우유, 검은깨, 멸균, 요구르트까지. 직원이 나열하는 우유 종류만도 10가지가 넘었고, 크기도 180mℓ부터 910mℓ까지 다양했다고. 흰우유, 딸기, 초코 정도만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열심히 일러주는 직원의 목소리를 듣다보니 점점 맥이 빠지고, 멀미하듯 속이 울렁거렸다고. 한참 그 새된 목소리를 들으며 분기별 납부 금액을 머릿속으로 계산해보다 슬그머니 수화기를 놓았다고 을은 말했다.

을의 이야기를 다 듣고 그럼 그렇지, 하며 우유 이야기를 잊었다. 그 뒤부터 을과 나는 한 번도 우유를 꺼내본 적이 없는 그 주머니에 우유 대신 열쇠를 넣고 다녔다. 우리에겐 그게 더 익숙했다.

을이 병원에서 채혈을 하고 혈중 농도를 측정하는 동안 나는 강남 번화가의 고급 술집에서 일했다. 카운터에 큰 인조 벚나무가 서 있는 외관이 화려한 일본식 술집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총 아홉 명. 매니저가 하나, 직원이 둘,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모두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는 조선족이 많았다. 외양이 비슷해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미묘하게 억세고, 어눌한 발음 때문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일을 하다가도 모여 서툰 한국말로 욕이나 육담을 하며 웃고, 때때로 저들끼리만 알 수 있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종종 내게 너는 히프가 있어 애는 잘 낳겠구나, 같은 농담을 던지며 저들끼리 웃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을 한번 흘겨보다 대꾸 없이 일을 했다. 그런 행동들은 참을 만했다.

술집은 예약제로 운영되었다. 가로수길이 내려다보이는 예약석에 앉은 이들은 얼굴도, 차림새도 하나같이 세련되어 보였다. 아르마니 시계를 차고 고급 안주를 주문하는 남자들이나 명품 핸드백을 멘 여자들을 눈으로 훑으며 주문을 받고, 서빙을 했다. 그들은 내가 아는 이들과는 달랐다. 손님이 계산을 마치면 아르바이트생들은 서빙 카트를 끌고 와 식기와 쓰레기를 치우고, 새로 세팅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때때로 손님들은 안주나 술을 조금씩 남겼다. 아깝네. 내가 그것들을 한데 모아 버릴 때마다 조선족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그들은 말라버린 참치 다다키나, 차게 식은 관자 스테이크 같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집어 먹었다.

먹어봐, 맛있어.

그들이 손님이 남기고 간 안주를 내게 권할 때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맛있는데. 손님이 남긴 안주를 이것저것 집어 먹으며 그들은 식기를 치우고, 술병을 카트에 실었다. 참을 수 없는 건 이런 것들이었다. 그런 행동들이 불쾌했다. 그런 행동들은 가게의 외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정말 구질구질하지 않느냐고 나는 밤마다 을에게 토로했다. 내 말을 듣는 을의 반응은 언제나 시큰둥했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버리기엔 아깝고, 배는 고프고 어쩔 수 없잖아.

아무튼 불쾌해. 난 그 사람들이랑 다르단 말이야.

집에 돌아오면 노트북을 펼치고 명품 구매 대행 사이트에 들어가 새벽까지 서핑을 했다. 명품을 교묘하게 본뜬 이미테이션을 중저가에 파는 사이트였다. 밤마다 나는 눈여겨봐둔 핸드백이며 지갑을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아놓고, 다음날이 되면 그것들을 장바구니 목록에서 지웠다.

사지도 않을 거면서 그런 건 왜 보고 있는 거야? 어차피 가짜잖아.

을은 핸드백의 가격을 보고 질겁하듯 물었다. 그 말을 하는 을을 매섭게 흘겨보았다. 네가 뭘 알아, 같은 거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서핑을 이어갔다. 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잠들곤 했다.

한참 서핑을 하다 을의 곁에 누웠다. 그는 내 옷을 입고 있었다. 내가 다녔던 전문대 로고가 등에 크게 새겨진 티셔츠였다. 내게는 조금 큰 그 옷을 을은 즐겨 입었다. 하도 입어 빨아도 그의 냄새가 지워지지 않을 정도였다.

대학은 어땠어?

때때로 그가 물을 때마다 시시했어, 짧게 답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을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을은 대학에 다닌 적이 없었으므로 그 행동은 묘하게 거슬렸다. 네가 뭘 알아. 알고나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묻고 싶어도 묻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그 티셔츠는 을과 어울리지 않았다.

생동성 실험에 참여하기 위해 병원에 갈 때마다 을은 적게는 2박3일이나 많게는 일주일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은 집에서 자고 싶어도 병원에서 쉴 틈 없이 채혈검사, 채뇨검사, 신체검사, 문진을 반복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을은 말하곤 했다.

그날은 을이 나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퇴근 후에 평소처럼 우유 주머니를 뒤적이며 열쇠를 찾는데 아무리 뒤적여도 그게 집히지 않았다. 어디 떨어진 게 아닐까 싶어 옥상 여기저기를 뒤져보았지만 쓰레기만 집힐 뿐 열쇠라 할 만한 것은 도통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헤매다 혹시나 싶어 방 쪽으로 조그맣게 나 있는 들창을 들여다보았다. 벽 쪽에 검은 형상이 기대어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을이었다.

을아, 문 좀 열어봐.


을이 나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퇴근 후에 평소처럼 우유 주머니를 뒤적이며 열쇠를 찾는데 아무리 뒤적여도 그게 집히지 않았다. 어디 떨어진 게 아닐까 싶어 옥상 여기저기를 뒤져보았지만 쓰레기만 집힐 뿐 열쇠라 할 만한 것은 도통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헤매다 혹시나 싶어 방 쪽으로 조그맣게 나 있는 들창을 들여다보았다.

창문을 두드리며 크게 외쳤다. 을처럼 보이는 형체는 가만히 몸을 숙이고 있다가 비틀비틀 움직이더니 곧 현관 쪽으로 가 문을 열었다. 을은 방에 불도 켜지 않고, 이불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었다. 놀라 불을 켜고 을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을은 나를 보며 한참 망설이다 몸에 두르고 있던 이불을 걷어 보였다. 가려워. 을이 말했다. 목 언저리부터 둔부까지 열꽃이 피어 있었다. 손을 대보니 놀랄 만큼 뜨거웠다. 을은 가렵다며 온몸을 벅벅 긁었고, 그럴 때마다 살갗이 붉게 달아올랐다. 얼음을 대고, 후시딘을 발라보아도 나아지는 게 없었다. 가려워. 가려워. 반복해 말하는 을의 곁에 내가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다 그만 잠이 들었다. 꿈에서도 벅벅, 몸을 긁는 소리가 들려 그날 밤 나는 여러 차례 잠을 설쳤다.

다음날 출근을 하기 전, 을과 함께 피부과에 들렀다. 밤사이 을의 발진은 허벅지까지 내려와 있었다. 얼마나 긁었는지 고름이 터져 짓무른 흔적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의사는 온몸에 오톨도톨하게 돋은 발진을 살펴보다 복용하는 약이 있느냐고 물었다. 을은 손가락을 접어가며 아르바이트 내내 복용했던 약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바이토린정, 암로디핀, 올란자핀, 라베프라졸….

그거 다 알고 드신 거예요?

경악하는 의사를 보며 을은 겸연쩍게 웃었다. 의사는 그동안 복용했던 약이 문제인 것 같다고 말하며 위생장갑을 낀 손으로 발진 부위를 쿡쿡 눌렀다. 의사의 손가락이 몸에 닿을 때마다 을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의사는 우선 바르는 약을 처방해주겠다고 말했다. 내장 기관도 상했을지 모르니 외과에 가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 일 좀 그만두라고 했잖아. 이게 뭐야.

병원에서 나오며 을에게 소리를 질렀다. 을은 내 눈을 한참 동안 망연히 바라보다 어쩔 수 없었잖아, 작게 말했다. 나도 모르게 힘이 빠져 다른 말은 더 보탤 수가 없었다.

약국에서 나는 을과 나란히 앉아 약이 제조되길 기다렸다. 딱히 할 말도 없고 해서 약국 벽에 걸린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기린 무리가 초원을 누비며 풀을 뜯고 있었다. 자주색 혀를 내밀며 풀을 뜯는 기린 중 유독 목이 짧은 잡종이 한 마리 섞여 있었다. 카메라는 그것을 오랫동안 클로즈업해 찍었다. 다른 기린들이 열심히 풀을 씹는 동안 그것은 목을 늘이며 풀을 뜯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무리가 이동을 할 때도 그것은 자꾸만 뒤처지다 결국은 낙오되었다. 몸 군데군데 털이 빠져 볼품없어 보였다.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 약사가 을의 이름을 부르기에 고개를 돌리고 접수대로 갔다.

을과 병원에 다녀온 이후 개강을 한 아르바이트생 둘이 줄줄이 일을 그만둬 나는 휴일도 없이 일을 해야 했다. 사케를 데우거나 차게 식히고, 그것을 내가고, 무릎 꿇고 주문을 받고, 때때로 카운터 보는 일을 반복하고 돌아오면 씻을 힘도 없이 노곤했다. 을과 제대로 눈도 맞추지 않은 채 잠드는 날이 이어졌다.

한번은 목이 말라 잠에서 깨 우연히 을을 보게 되었다. 발진이 일어난 이후로 을은 거의 벌거벗은 채 지냈다. 몸에 천이 닿으면 발진이 악화되었기에 별수 없었다. 졸음에 반쯤 감긴 눈으로 물을 마시는데 냉장고 불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을이 눈에 들어왔다. 을은 뒤척이며 허벅지며 팔뚝을 긁다 손바닥으로 온몸을 철썩철썩 때렸다. 간간이 신음 섞인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그 광경을 한참 동안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데 등이 서늘해졌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그의 몸이 더없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서둘러 냉장고 문을 닫고 요를 끌어와 을과 멀찍이 떨어져 잤다. 그날 밤 이후로 나는 집의 오른쪽 벽에 붙어 잤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며 내 옆에 요를 바싹 붙이던 을은 시간이 지나자 왼편에 요를 깔고 잤다. 점점 나는 오른편에서 을은 왼편에서 자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있었다.

을의 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발진은 몸 전체에 균일하게 퍼졌다. 몸을 긁으면 고름이 터졌고, 그 자리에 흉터가 생겼다. 긁지 말라고 몇 번 손을 묶어놓기도 하고, 고무장갑 같은 것을 끼워주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을은 습관적으로 긁었고,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병은 낫지 않았다. 을의 담당의는 일주일에 두 번 피부과에 들러 치료를 받으라고 했지만, 을은 언젠가부터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았다. 함께 병원에 가준다고 말해도 고개만 몇 번 주억일 뿐 알았다고 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지 않을까. 거기까지 가는 것도 힘들고, 약값이며 병원비며 신경 쓸 것도 많잖아.

점심을 먹으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구질구질하다, 진짜.

을을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대다 흠칫 놀랐다. 을에게 그런 말을 내뱉긴 처음이었다.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을은 연신 콩자반만 집어 먹고 있었다. 먹으면서도 그는 사타구니나 종아리 부근을 끊임없이 긁었다. 그런 을을 지켜보다 허겁지겁 밥을 밀어넣고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은 채 집을 나왔다. 출근 시간보다 이르게 나온 건 처음이었다. 을에게 문자나 할까 생각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마음을 접었다. 퇴근하면 오랜만에 둘이 맥주나 한잔 해야겠다. 그동안 못했던 얘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언덕을 천천히 내려갔다.

유난히 바쁜 날이었다.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말도 없이 출근을 하지 않았고, 예약 손님이 밀려 숨 돌릴 틈도 없이 서빙과 세팅을 반복해야 했다. 평소에는 수다를 떨며 몸을 사리던 조선족 파트타이머들도 정신없이 홀을 뛰어다녔다. 화장을 다시 고칠 틈도 없이 테이블을 치우는데 가게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기계적으로 인사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한 무리의 남자들을 따라 들어온 낯이 익은 여자가 정면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살이 빠지고, 얼굴이 화사해져 누군지 못 알아봤는데 자세히 보니 대학 동기였다.

오랜만이다. 예뻐졌네.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왔다는 그녀에게 나는 그렇게 말했다.

어머, 너는….

그녀는 말을 고르다 이렇게 말했다.

여전하구나. 딱히 친하지는 않았던 여자애였다. 그녀와 얽힌 기억은 딱 하나였다. 학교를 그만두기 전, 조별 과제를 하기 위해 그녀의 아파트에 간 적이 있었다. 북유럽풍의 가구를 집 안 곳곳에 배치한 정결한 집이었다.

이런 집은 얼마나 해?

방이 두 개나 딸린 집을 둘러보며 내가 물었고, 그녀는 그냥… 비싸, 하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녀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그녀가 학부를 마치고 친지의 회사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누군가에게서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내 무엇이 여전하다는 건지 묻기도 전에 그녀는 거나하게 취한 남자들과 함께 룸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모두 내 또래로 보였다.

친구야?

가까운 곳에서 테이블을 치우던 조선족 직원 하나가 슬그머니 물었다. 망설이며 대답을 미뤘다. 조선족 직원들은 그런 나를 둘러싼 채 부럽다며 떠들어댔다. 그들은 친구도 보고 좋겠다느니 같이 술 한잔 하라느니 하며 내게 한마디씩 건넸다.

친구들은 잘사나봐. 이런 데 술 마시러 오고.

그중 하나가 안주로 나온 해초무침을 씹으며 말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입에서 좋지 못한 냄새가 났다. 나는 해초를 씹는 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네가 뭘 알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소리를 질렀다.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이 없던 말이어서 내가 더 놀랐다. 조선족 직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한참 그렇게 서 있는데 동기의 룸에서 벨이 울렸다. 조선족 직원들을 뒤로한 채 동기가 들어간 룸으로 주문을 받으러 갔다.

동기는 이미 다른 곳에서 충분히 마시고 왔다며 사케와 간단한 안주를 부탁했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머리를 만질 때마다 컬이 들어간 머리칼이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여전히 그녀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으며 알겠습니다, 정중하게 말한 뒤 그 방을 나왔다.

그들은 술이 떨어질 때마다 벨을 눌렀다. 그때마다 나는 그 방으로 들어가 주문을 받았다. 그들은 꾸준히 술과 안주를 시키고 내가 나간 뒤에는 떠들썩하게 웃었다. 마감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그 방은 소란스러웠다. 자정 즈음 주방에서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으니 주문을 그만 받으라는 호출이 들어와 그 방으로 들어가 그 말을 전했다. 저기요. 돌아서는 내 등 뒤에 대고 그 방의 누군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담배 좀 사다주세요.

때때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손님들이 있었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하거나, 다른 가게에서 사온 음식을 데워달라고 하는 사람들. 그럴 때마다 대처는 내가 아닌 매니저나 직원이 하곤 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니저나 다른 직원을 호출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도 내 호출에 달려와줄 것 같지 않았다. 난처해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데 오른편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동기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어떤 표정이 설핏 지나갔다. 낙오된 짐승을 보는 듯한 표정. 한동안 느껴지는 그 시선을 나는 애써 피했다.

보헴 시가 마스터.

남자는 지갑에서 2만원을 내게 내밀었다. 손목에 찬 아르마니 시계가 조명에 반짝였다. 돈은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인사라도 하듯 허리를 엉거주춤 숙인 채 그 돈을 받아들었다. 저기요. 잔에 사케를 따르며 남자는 덧붙이듯 말했다.


손님들이 전부 나간 뒤, 그 방으로 들어가 그들이 더럽혀놓은 테이블을 치웠다. 술병을 정리하고 식기를 차곡차곡 모아 서빙 카트에 담았다. 테이블 위에는 그들이 시킨 안주가 남아 있었다. 참치 뱃살 같은 고급 안주였다. 모두 쏟아 버리려다 참치회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어딘가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맛있네. 천천히 회를 씹으며 재떨이를 비웠다.

남은 돈은 가지세요. 팁이니까.

돈을 유니폼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나는 그 방을 나왔다. 나와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방 안에서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들이 전부 나간 뒤, 그 방으로 들어가 그들이 더럽혀놓은 테이블을 치웠다. 술병을 정리하고 식기를 차곡차곡 모아 서빙 카트에 담았다. 테이블 위에는 그들이 시킨 안주가 남아 있었다. 참치 뱃살 같은 고급 안주였다. 모두 쏟아 버리려다 참치회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어딘가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맛있네. 천천히 회를 씹으며 재떨이를 비웠다.

옥탑은 캄캄했다. 을은 TV를 켜놓은 채 늘 자던 그 자리에서 잠들어 있었다. 을은 여전히 몸을 긁었다. 하도 긁어 거무스름해진 상흔이 을의 몸 군데군데에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막상 집에 들어오니 씻을 힘도 없이 노곤했다. 트렁크 안에 손을 넣어 몸을 긁는 을의 곁에 우두커니 앉아 TV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각 분야의 멘토들이 시청자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날은 한 단역 배우가 멘티로 나왔다. 얼굴도, 이름도 상당히 낯선 배우였다.

10년 동안 네 편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모두 우정출연이거나 두 컷도 나오지 않는 단역이었습니다.

남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출연한 영화 중에는 내가 아는 영화도 있었다. 1천만 관객을 돌파한 누아르 영화였다. 방송 도중에 그 영화가 자료 화면으로 나왔다. 악역인 주인공이 형사와 마약 거래를 하는 장면이었는데, 방송에서는 그 장면을 반복해 보여주었다. 그의 얼굴이 유일하게 클로즈업된 장면이었다. 조직원 4 역할이었다던 그는 주연 배우에게 반쯤 가려진 채 웃고 있었다. 주연 배우를 줌인하자 뒤에 있던 그의 얼굴도 같이 확대되었다. 반쪽만 보이는 눈과 코, 입, 그리고 귀. 그 귀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귓불이 없는 작은 귀였다. 좋은 밤 되세요.

선잠에 들다 깨다 하니 프로그램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클로징 멘트를 하는 MC의 목소리를 듣고 발을 뻗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TV가 꺼졌고, 방이 더욱 어두워졌다. 길 건너 상가가 보름 전 문을 닫아 더 이상 빨강, 초록, 파랑의 빛이 방 안에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나는 주섬주섬 을의 옆자리에 요를 깔았다. 을은 나신으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을의 등에 난 상처를 찬찬히 어루만졌다. 그의 등을 만져본 게 아주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아물려나.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좋지 않았다. 상처가 영영 아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은 피곤한데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좋은 밤 되세요. 아까 TV에서 들었던 MC의 클로징 멘트가 귓전을 맴돌았다. 좋은 밤 되세요. 좋은 밤 되세요. 눈을 감지 않아도 깜깜한 방 안에서 을의 등을 쓰다듬으며 한동안 중얼거렸다.

을아, 좋은 밤은 있을까.

을은 미동이 없었다. 자는 걸까, 생각하며 을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지랄. 창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성해나
대상   성해나  수상  소감


작가는  시대의  몸살을  함께  앓는  사람


성해나 제공

성해나 제공

지난여름부터 가을까지 를 쓰고, 고쳤다. 그 시기에는 이유 없이 쓸쓸해지고, 슬픔을 감당하기가 전보다 어려웠는데 아마 그 소설을 쓰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20대가 패기를 가지기 어려운 시대다. ‘니트족’ ‘삼포세대’ 같은 단어를 접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르바이트를 하다 화상을 입어 받은 상해보험금으로 스키장에 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스키장이라니.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아마 그것이 이 시대 20대의 태도는 아닐까. 힘든 게 싫다. 반론을 제기하고 싸우고, 그런 건 너무 힘든 일이다. 더 나아질 것 없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이미 충분히 지쳐 있다. 그런 세계에서 살아가는 연인을 그리고 싶었다. 위로해주고 싶었으나 난폭한 세계에 그들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온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작가는 시대의 몸살을 함께 앓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함께 아파하고 기억해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미숙한 글을 정성껏 심사해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를 전한다. 이번 수상이 글을 쓰는 데 좋은 동력이 될 것 같아 기쁘다. 더 부지런히 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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