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4일 오후 6시56분 전남 보성의 농민 백남기(68)씨가 서울 종로구청 앞 사거리에서 경찰이 쏜 살수차의 직사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넘어진 백씨의 얼굴을 향해 5초 동안 살수가 이어졌다. 이후 백씨를 구하려는 사람들과 백씨에게 다시 15초간 살수가 이어졌다. 코와 입에서 피가 흘렀다. 안경은 어딘가로 날아갔다. 백씨는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그날 밤 11시께 수술에 들어갔다. 새벽 4시께 수술이 끝났지만 의식불명 상태다.
11월15일 오전 11시, 서울대병원에서 취재를 시작했다. 17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 자택을 다녀왔다. 11월19일까지 5일 동안 백씨와 함께 농민운동을 해온 동료와 후배, 중앙대 후배, 마을 사람 등 15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에서 발행한 와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에서 발행한 를 참고했다.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아내 박경숙, 아들 백두산씨도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보태줬다. 그 이야기들을 모아 ‘농민 백남기’의 생애를 되짚어봤다. _편집자
‘그날’로부터 한 달전인 10월14일이었다. 전남 무안 청계면의 한 식당에 50~70대 농부 20여 명이 둘러앉았다. 무안의 농부 배삼태(56)는 보성 농부 백남기(68)의 말을 기억한다. “농민운동 30년을 했는데, 이젠 정말 더는 농사짓기 힘든 세상이네. 나락(도정하지 않은 쌀) 40kg에 4만원이야. 콩은 40kg에 8만원이야. 개 사룟값만도 못하네.” 그 자리에서 막걸리잔을 즐겁게 들이켜는 이는 없었다. “우리가 운동을 잘못했는가.”
한 달 뒤인 11월14일 오후 3시께, 배삼태는 서울 남대문에서 버스에서 내리는 그를 봤다. 무안군농민회와 보성군농민회 각자의 깃발을 따라가느라 달려가 인사하지는 못했다. 13만여 명이 참여했다는 민중총궐기대회를 일찍 마치고 무안으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무안 농부 배삼태는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 사는 촌로 백남기의 소식을 들었다.
남기 형님이 쓰러졌다“남기 형님이 병원에 실려갔다고? 물대포를 맞았는데 의식이 없다고?” 좌불안석하며 내려갔다가 다음날 다시 서울대병원으로 향했다. 한 달 전 막걸리잔을 나누던 ‘남기 형님’은 없고 이제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기 형님’만 병상에 누워 있었다.
11월20일 저녁 6시 현재까지도 병상에 누워 있는 백남기는 1947년 8월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찰이었다. 아버지의 인사 이동에 따라 네댓 군데 초등학교를 옮겨다녔다. 중·고등학교는 광주에서 나왔다. 1968년 3월, 50여 가구가 살았던 자연부락 부춘마을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했다. 중앙대 행정학과였다. 지난 11월16일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만난 아흔 살 노인은 “남기가 공부를 잘해서 서울 중앙대를 갔재”라고 ‘남기 자랑’을 했다.
공부 잘했던 백남기는 마을 어른들의 기대와 달리 대학에서 유신 철폐 시위에 앞장섰다. 단과대 학생회장도 맡았다. 1973년 교내에서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하다 수배된 뒤 1974~75년 명동성당에 피신해 있다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명동성당을 떠나 1977년 인천의 봉쇄수도원인 갈멜 수도원에서 3년 동안 수사 생활을 했다. ‘살인하지 마라’ ‘낙태하지 마라’ ‘이혼하지 마라’ 세 가지만 지키면 된다는 신부님의 말씀이 좋았다.
수사가 되기 위해 일흥 포도농원과 서울 수유리 갈멜 수녀원에서 잡부 생활 2년을 견디기도 했다. “곧지 못한 것에 분노하는 것 말고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 수도사가 딱 맞았죠.” 농부 백남기의 곁을 지켜온 아내 박경숙(62)씨가 말했다. 세상일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 첫날밤 치르는 데만도 3주인지, 석 달인지 걸렸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지인 사이에서 전설처럼 떠돌지만, 아내 박씨에게 묻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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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가 수사 생활을 그만둔 건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면서다. 1980년 3월 무기정학 처분도 해제됐다. 바야흐로 ‘서울의 봄’이었다. 복학하자 후배들이 총학생회 부회장직을 억지로 떠안겼다.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그해 5월15일 전두환·최규하·신현확 등의 상여를 만들어 중앙대 교내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유신 잔당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서울역까지 행진하는 거리시위 준비의 대부분도 백남기가 했다. 상여를 만들려고 목공소를 찾아다니고, 학생들이 먹을 빵을 마련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그를 대학 친구들은 기억한다.
짧았던 ‘서울의 봄’을 뒤로하고 5월17일 계엄이 선포됐다. 학교 안으로 계엄군이 밀려들어왔다. 당시 기숙사에 있던 백남기는 도망가지 않았다. “‘형, 갑시다’라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남기 형님은 ‘피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그대로 기숙사에 남았다”고 후배 백상태는 기억했다. 백남기는 그때 붙잡혀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이듬해 3월3일 가석방됐다. “항소를 하지 않아서 가석방이 됐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양반이 항소를 안 한 건 ‘항소를 하는 건 내가 한 일이 잘못이라고 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아내 박경숙씨는 말했다.
징역을 사는 동안 학교에서 퇴학 조치된 백남기는 가석방 뒤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조용히 살겠다’며 고향인 전남 보성군 웅치면으로 내려갔다. 집 바로 뒤쪽에 선 대나무들이 바람에 소슬하는 소리만 고요하게 들리는 정갈한 한옥집이다. 그해 11월28일 “해처럼 빛나 보이던” 아내와 선본 지 두 달 만에 결혼했다.
자전거 타고 다니며 알린 농민의 권리아내는 선보는 자리에서 고문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 박씨는 “내가 아니면 (저 사람이) 평생 결혼 안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결혼한 지 한참 지나서 남편은 “‘내가 참 운이 좋은 놈이구나’ 생각했다. 해가 눈앞에 떠 있는 것 같았다”고 선보던 날에 대해 아내에게 말했다.
백남기는 3~4년 동안 농사일을 착실히 배웠다. 소도 몇 마리 샀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융자를 해주며 소 사육을 권장했다. 그러나 정부는 외국 농산물의 수입 장벽도 거둬들였다. 1985년 쌀·밀·콩은 물론 곰탕용 소뼈까지 300가지가 넘는 농·축산물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농·축산물 가격이 폭락했다. 1983년 한 두당 100만~150만원 하던 소값이 2년 만에 30만~50만원으로 떨어졌다. 백남기 역시 농가 부채의 더미 위에 앉게 됐다.
그 무렵인 1985년 가톨릭농민회 보성·고흥협의회의 실무를 도맡아 했던 백종덕(57)은 조금 들떴다. 당시 가톨릭농민회는 농민권익보장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며 회원들이 구속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럴수록 ‘농촌 현장에 뿌리를 내리자’는 생각으로 생활공동체 운동을 하던 차였다. 청년이 부족했다. 그때 백종덕은 한 선배로부터 ‘서울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백남기라는 자가 지금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짓고 있다. 꼭 함께 농민운동을 해야 할 사람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백종덕은 곧장 백남기에게 협의회 안내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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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장을 받은 백남기가 회의에 참석하면서 보성 지역, 특히 백남기가 사는 웅치면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백남기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열정적으로 농민의 권리 회복을 위해 함께 일하자고 면민들에게 말했다. 웅치면의 30여 개 부락(자연마을)에서 1명씩 가입한 웅치분회가 만들어졌다. “웅치분회 사례가 전남 지역 농민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면 단위로 분회를 확대하는 사례를 보면서 이후에 면 단위 분회가 확산됐다”고 백종덕은 말했다.
그런 지도력으로 백남기는 1987년 보성·고흥협의회장을 맡았고 1989~91년 가톨릭농민회 광주·전남 지역 회장을 맡았다. 농업용수에 매겼던 수세 폐지 운동, 농협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마을 민주화 운동도 했다. 면사무소에서 지정하는 ‘관선 이장’이 마을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투표제도를 만들었다. 마을 주민이 직접 뽑은 ‘민선 1호 이장’이 됐다. 관선 이장들의 회의에 의자를 들고 가 ‘나는 민선 이장이오’ 하고 앉아 마을 유지와 관료들의 ‘나눠먹기’를 감시했다. 웅치면에 사는 백준선(71)은 “남기가 똑똑하고 일을 잘했다. 그리고 마을 운영을 민주적으로 해서 우리가 좋아했다”고 말했다.
민선 1호 이장, 우리밀 살리기 운동당당하고 소신이 강한 태도는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도 드러났다. 첫째는 민중을 뜻하는 도라지(33), 둘째는 통일을 의미하는 두산(31), 셋째는 민주화를 염원하며 민주화(29)라고 지었다. 1987년 6월항쟁이 있기도 전이었다. 호적에 이름을 올리러 가면 ‘이게 주민등록용 이름이냐’고 직원은 반문했다. 다들 손을 휘저으며 말렸다. 백남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10년만 지나면 민주화라는 이름이 다 쓰는 이름이 될 거야.”
그 무렵 가톨릭농민회는 전환기에 서 있었다.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출범하면서 농민운동의 대표 자리를 내준 뒤 가톨릭농민회는 우리밀 살리기 운동, 땅을 되살리는 ‘되살이 운동’ 등 대안운동을 시작했다. 백남기 당시 전남본부 회장은 우리밀 살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89년께부터 우리밀 씨앗을 찾아 돌아다녔다. “시골 어르신들이 약으로 갖고 있던 씨앗 몇 개를 얻어 1989년에 심은 ‘이름 없는 밀’이 시작이었다”고 농민운동 후배 최강은은 말했다. 동네 어른의 기억에 의존해 밭에 쟁기질해서 퇴비 놓고 골을 파서 밀을 뿌렸다. 실험하듯 우리밀 재배를 시작해 우리밀 재배 면적을 4년 만에 300만 평까지 늘렸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이 밀 수매를 중단하면서 ‘우리밀 씨가 말라버린’ 현실을 바꾼 셈이다.
전남 전역의 소비자들에게 ‘유기농 먹거리’를 꾸러미 형태로 배달하는 생협운동도 했다. 일일이 전화로 ‘달걀, 고구마, 쌀, 배추’ 등 상품을 주문받아서 그걸 생산자들에게 받아와 소비자에게 배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구적인 일이었다”고 최강은은 회고했다.
일체의 직함을 모두 내려놓은 2000년부터 백남기는 “이제 지역에서 농민으로 살아가겠다”며 ‘칩거하다시피’ 했다. “후배들이 도지사에 나가라,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라 아무리 이야기해도 고사했다. ‘나는 농사일을 지으며 우리 먹거리를 바르게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늘 말했고 그래서 더 존경받았다”고 최강은은 말했다. 사람들은 그를 ‘수도사 같은 농민운동가’라고 불렀다. 아내는 그를 “경제 0점, 도덕 99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아직도 1983~84년 소값 폭락 때 진 빚을 갚지 못했다. 빚을 갚을 만큼 돈을 벌어 손에 쥐어본 적이 없었다.
도덕 점수 99점인 아버지 아래서 아이들은 반듯하게 컸다. 큰딸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둘째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고 있다. 막내 민주화는 중학교 2~3학년 동안 동네 친구들 10여 명과 함께 아버지 백남기에게 영어를 배웠다. 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서 미리 예습을 하고 오후에 아이들에게 영어 문법을 가르쳤다. 민주화는 네덜란드로 어학연수를 갔다가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다. 막내 민주화가 쓴 페이스북 글에서 보이는 아버지 백남기는 막내딸과 전화할 때마다 “세상을 다 줘도 바꿀 수 없는 우리 딸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자상한 아버지다.
하루하루 손주 사진 보는 재미로 살아가는 할아버지가 된 농민 백남기는 나이가 들어도 농민 관련 행사에 열심히 참여했다. ‘밀밭밟기 행사’ 때마다 징이나 꽹과리는 백남기의 몫이었다. ‘농민의 권리를 스스로 지켜야 한다’며 매년 농민대회 때마다 서울로 향했다. 둘째아들 백두산이 이제 그만 갈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농가 부채 탕감하러 가야지”라고 말했다. 때로는 “동생들이 가자고 해서”라며 ‘의리 있는 형님’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 11월14일 백남기를 비롯한 전남 지역 농민들은 오후 3시께 서울 남대문 앞에 도착했다. 풍물대를 따라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모두 모이기로 한 광화문 광장으로 행진했다.
그때 종로구청 사거리까지 함께 행진한 보성군 노동면 농민 최영추는 사고 당시 “남기 형님이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우리가 있던 자리에서부터 300~400m 앞에 경찰차벽이 있었다. 형님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보려고 앞으로 간 게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는 “늘 제 몸을 사리지 않는 성격에 물을 뿌리면서 길을 막는 경찰에 분노해 칠십 노인이 또 앞장선 건 아닌가” 하며 말끝을 흐렸다. 농민 백남기가 왜 차벽 앞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직후 백남기에겐 20초간 공권력의 살수가 이어졌다.
그의 가족은 아버지 또는 남편에 대해 “생명운동을 하는 심지 굳은 농민”이라고 말했다. 백남기는 정부가 수매하지 않아 제값을 받지 못하는 우리밀 농사를 1989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어왔다. 지난 11월16일 찾은 부춘마을 백남기씨 집 뒤 2500평 밭에는 지난가을에 뿌린 밀이 파릇하고 씩씩하게 싹을 틔우고 있었다. 11월14일 아침에도 둘러보고 나간 밀밭이었다.
절임배추 작업을 하느라 병문안을 가지 못한 이웃마을 막걸리 동무 김회근(56)은 일하다 말고 줄줄 눈물을 흘렸다. “그 형님은 농민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거짓 없이, 어린아이하고도 벗을 할 만한, 구십 먹은 노인하고도 벗을 할 만한, 어디다가 손가락질 한 번 당해본 적이 없는 양반인데….” 목메어하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11월20일로 6일째 병실 앞에서 남편 곁을 지키는 아내 박경숙씨도 밤이 되면 그저 눈물만 흐른다. “그 아버지 때 그렇게 수배당하고 감옥살이를 하더니, 지금은 그 딸 때문에 저렇게 사경을 헤매네.”
”아버지 때 그렇게 당하고, 이제 그 딸 때문에…”농민 백남기가 평소 좋아하던 말이 있다. “순서가 바뀌면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하며, 술자리에선 건배사로, 지인들과 헤어질 땐 인사말로 썼다. “1. 건강백세 2. 사업번창 3. 자손발복 4. 백년해로 5. 안심입명”.
건강하게 살고, 하는 일 잘 이루고, 자손들 복되게 살고, 부부간 의좋게 지내고, 편안히 이 세상을 떠나기를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빌었다. 후배들은 모두 그 인사말이 좋아 따라하곤 했다. “인생을 꽉 짜서 함축한 말이라 다들 좋아했지. 그런데 이렇게 갈까봐….” 한 동료가 말을 흐렸다.
“같이 올라왔으니 같이 내려가야 한다”는 친구와 아내와 자식들이 눈물로 지키고 있는 병실로 정부 책임자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농민 백남기의 가족은 강신명 경찰청장, 구은수 서울지방경찰청장, 제4기동단장, 제4기동단 경비계장, 제4기동단 중대장과 물대포를 직접 조종한, 이름을 알 수 없는 경찰관 2명을 살인미수죄와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으로 형사고발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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