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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와 고영주의 ‘같기도’

두 사람 다 법률가, 매카시에게는 트루먼 대통령도 백기를 들었지만 고영주에게는 지지세력 없어
등록 2015-10-13 22:17 수정 2020-05-03 04:28

“나는 국무부가 공산주의자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내 손에는 그 205명의 명단이 있습니다.”
미국 위스콘신주 출신 초선 상원의원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41)는 1950년 2월9일 서부 버지니아주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당원 집회에서 지지 연설을 했다. 미국 행정부의 심장인 국무부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그의 발언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다음날에도 그는 비슷한 내용의 연설을 했다. 다만 그 수가 57명으로 줄었다. 상관 없었다. 공산주의자 색출 작전은 대대적으로 시작돼버렸으니까.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는 미국 공화당과 언론, 여론의 지지를 얻어 공산주의자 색출 작전을 벌였다. 하지만 ‘한국의 매카시’라고 불리는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 대한 한국 여론은 싸늘하다. 위키피디아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는 미국 공화당과 언론, 여론의 지지를 얻어 공산주의자 색출 작전을 벌였다. 하지만 ‘한국의 매카시’라고 불리는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 대한 한국 여론은 싸늘하다. 위키피디아

문재인 대표에서 사법부, 공무원으로 확대

전병헌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10월6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고영주(66)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장을 두고 “ 매카시가 한국의 고카시로 살아 돌아온 것인가 싶다”고 했다. 노영민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10월7일 긴급 의원총회에서 “미국의 매카시 광풍에서 현재의 대한민국을 본다”고 말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도 성명을 내어 고 이사장의 발언에서 “광기 어린 매카시즘이 느껴진다”고 비판했다.

고 이사장을 따져보면 매카시와 닮은 점이 있다. 첫째, 두 사람 다 법률가이고 확신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들의 발언은 날이 갈수록 강해진다. 검사 출신인 고 이사장은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확신한다”로 시작해 “사법부에 김일성 장학생이 있다” “공무원 중에도, 검찰에도 (김일성 장학생이) 있을 수 있다고 보고 대비해야 한다”며 점차 그 대상을 확대해나갔다. 변호사·판사 출신인 매카시는 “국무부 공산주의자”로 출발해 연방정부, 언론, 육군 등으로 공산주의자 색출을 확대해갔다.


<i>매카시가 보유했다는 “205명의 명단”은 허구였다. 상원이 소위원회를 소집해 진위를 확인했지만 매카시는 명단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인에게 매카시가 반공주의의 전사로 떠오른 뒤였다.</i>

둘째, 근거가 약하다. 고 이사장은 문재인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하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폐지 △한미연합사 해체 △연방제 통일을 주장한다는 점을 들었다. 이 세 가지가 “북한의 대남 전술의 핵심이기 때문”이라는 게 고 이사장의 말이다. 또 “사법부에 김일성 장학생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느 판사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다만 “1964년 북한 김일성의 사법부 침투 지시”가 있었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있다”고 주장한다(10월6일 국회 국정감사). 김일성의 지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50년 전의 일이지만, 고 이사장은 상관하지 않는다.

매카시가 보유했다는 “205명의 명단”은 허구였다. 상원이 소위원회를 소집해 진위를 확인했지만 매카시는 명단을 갖고 있지 않았다. 민주당 소속인 소위원장이 “협잡꾼이자 장난 삼아 남을 속인 자”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미국인에게 매카시가 반공주의의 전사로 떠오른 뒤였다.

셋째, 공산주의자 낙인찍기는 ‘사적 경험’과 관련이 있다. 고 이사장이 문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그가 체험한 ‘부림사건’ 때문이다. 부림사건은 사회과학 책을 읽던 부산의 학생, 교사, 회사원을 무더기로 구속한 공안사건이다. 영화 의 배경인 이 사건을 고 이사장이 1981년 수사했는데 그는 공산주의 운동이었음을 확신한다고 했다. “문재인 대표는 부림사건 피의자들과 평생 동지가 됐다. 이념이 같지 않으면 그리하기 힘들다.”(10월2일 국회 국정감사) “사법부가 일부 좌경화됐다”는 발언도 부림사건을 2014년 9월 대법원이 33년 만에 무죄로 뒤집으면서 나왔다.

대통령이 공무원 무차별적으로 해고

매카시는 자신을 “협잡꾼”이라고 말한 상원 소위원장을 공산주의라고 몰아붙여 1950년 선거에서 낙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를 욕하는 민주당 의원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매장했다. 비판적인 언론을 향해서는 신문과 잡지를 장악한 공산주의자 정보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압박했다.

매카시즘을 포함해 동서양의 ‘마녀사냥’을 다룬 의 저자인 정찬일씨는 고영주 이사장의 발언에 대해 “기시감이 든다”고 했다. “시대와 공간은 다르지만 각지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회적 위기가 왔을 때 사람들은 불안을 해소시킬 어떤 것을 찾는다. 또 기존 질서를 유지하거나 전복하려 할 때 희생양을 찾는다. 그것이 마녀사냥의 등장이다.”

하지만 정씨는 두 사람의 발언은 비슷하지만 두 사회의 대응이 다르면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했다. ‘빨갱이 사냥’을 막을 길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0년대 한국 사회의 대응에는 1950년대 미국 사회와 차이가 분명하다.

첫째, 발언에 따른 행동이 없다. 매카시는 국무부에서의 공산주의자 발언 이후 트루먼 대통령이 공산주의자 공무원을 방치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은 백기를 들었다. “공산주의자의 유혹에 이끌릴 위험이 있는” 공무원을 무차별적으로 해고한 것이다. 1950년에 2천 명이 넘는 직원이 사임했고 212명이 면직됐다. 공화당 후보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같은 이유로 집권 기간에 8800명을 좌천시켰다.

반면 고 이사장이 “김일성 장학생이 있다” “일부 좌편향됐다”고 지목한 사법부는 그의 발언을 일축했다. 박병대 법원행정처장은 10월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일성 장학생 발언이 어떤 취지인지 선뜻 납득 안 되는데 그런 식의 규정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부림사건에 대해서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고 그것이 대법원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말했다. 서울변회도 “사법부에 자신의 정치색을 받아들여 판결하라고 직접적으로 강요를 하는 것과도 같다”고 지적했다.

둘째, 지지 세력이 없다. 미국 공화당은 매카시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지만 고 이사장에 대한 여권의 반응은 싸늘하다. 새누리당은 대변인 논평도, 의원들의 방송 인터뷰도 자제한다. 조원진 원내수석대표는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고 방어하고 나설 생각도 없다”고 했다. 자칭 ‘애국세력’이 “고 이사장은 우리 시대의 의인”이라고 적극 옹호하고 나섰지만 확장성은 없어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공 광풍이 불었던 1950년대 미국과는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술로 괴로움을 달래다 간염으로…

셋째, 언론과 여론이 차갑다. 매카시는 초기에 언론의 지지를 등에 업었다. 1950년 2월 매카시의 공화당 집회 연설을 129개 신문이 보도했는데 그를 비판한 기사는 8개에 그쳤다. 매카시 명단을 확인하려는 언론도 드물었다. 몇 개월 뒤 명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매카시의 의도대로 보도했다. 매카시는 항상 증거를 내놓을 것처럼 흰 종이를 흔들었다. 그의 쇼맨십에 미국인들도 매료됐다. 하지만 고 이사장의 발언에 대해 한국 언론은 비판적이다. 보수 성향인 도 10월8일치 사설에서 “우파 인사라도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매카시의 추락은 보수세력이 이끌었다. 1953년 육군에도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매카시의 주장에 육군은 물론 재향군인회도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육군 장성 출신의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더는 침묵할 수 없었다. 육군은 자체 조사를 한 뒤 매카시의 주장이 명백한 허구라고 결론 내고 청문회를 제안했다. 매카시가 이를 수락해 1954년 5월 ‘육군-매카시 청문회’가 열렸다. 2천만 명 이상이 시청한 청문회에서 매카시는 인신공격을 일삼았지만 육군은 객관적 자료로 반박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국인은 크게 실망했다. 전통적 지지층인 보수적인 유권자들이 거센 비난을 쏟아냈다. 그해 의원 선거에서 상하 양원 모두 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매카시는 고향에서 가까스로 당선됐지만 그의 정치생명은 끝난 셈이었다. 그는 술로 괴로움을 달래다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해 며칠 만에 숨을 거뒀다. 1957년 5월2일, 향년 48이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참고 문헌 (양철북·2015), (백산서당·1997), (자음과모음·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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