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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애국주의자

부림사건부터 전교조·한총련·통합진보당 해산까지 전방위 종북·좌파 척결 나선 ‘애국 진영의 애국주의자’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
등록 2015-10-13 07:59 수정 2020-05-02 19:28
‘MBC를 국민의 품으로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 10월8일 서울 여의도에서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바닥에 깔아놓았다. 류우종 기자

‘MBC를 국민의 품으로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 10월8일 서울 여의도에서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바닥에 깔아놓았다. 류우종 기자

그는 모교 교수를 원했던 공대생(서울대 화학공학과)이었다. 대학교 3학년 때 소석회광산과 자동차정비공장을 운영한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유학을 고려하던 그는 군에 입대했다. 광주 포병학교 교장실에서 군 복무를 하며 샤를 몽테스키외의 을 읽었다. 이것이 공대생을 사법시험으로 이끈 계기가 됐다. 알려져 있듯 은 특정 권력이 홀로 작동하면서 그 권력이 설파하는 논리가 독주하지 않도록 ‘삼권분립’의 정신을 강조한 책이다. 그는 시험 준비 2년 만인 1976년 사시(18회)에 합격했다.

검찰에서 ‘공안 이론가’였던 그는 2006년 1월 서울남부지검장을 끝으로 공직을 떠난다. 이 시점부터 “종북·좌파 세력 척결”을 위한 대중 활동에 투신한다. 예를 들어 그는 2011년 극우단체인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가 주최한 ‘일전불사 종북박살 출정식’과 같은 행사에 주요 연사로 초청된다. 전직 대통령(노무현)과 야당 대표(문재인) 등을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하고,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등이 우리나라의 공산화를 이끌 ‘적화 주동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극우·보수 세력 사이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애국 진영의 애국자’로 불리는 그는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장이다.

“참교육은 공산주의 이론” 검찰 내부서도 “지나치다”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위원을 지낸 적이 있다.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에서 근무한 한 인사는 기자와 만나 “고 이사장의 최근 발언은 보수 진영에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발언이자 인식”이라고 우려했다. 공대생이었던 그는 28년여간 검찰에서 어떤 과정을 통과하며 지금 ‘종북박살 세력’의 이론적 선봉장이 됐을까?

검사 초창기에 그를 만났던 이들은 지금과는 약간 다른 느낌을 떠올렸다. 이재화 변호사는 1985년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됐을 때 자신을 기소한 공안검사 고영주를 처음 만났다. 이 변호사는 “지금은 그가 진보적 생각이나 정부에 반하는 목소리를 모두 반체제의 움직임으로 보지만, 그땐(1985년) 모든 것을 반공 논리로 보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대학생들이 의식화 학습을 시작할 때 나도 같이 공안 업무를 시작해 그 사람들의 책을 보면서 공부했다. 그 사람들의 전략·전술을 검찰에서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게 됐다. 변형된 공산주의 이론을 통한 간접 침략에 대한 검찰의 공안 업무를 주도해왔다고 자부한다.” -2006년 와의 인터뷰

그러나 1980년대 당시 고영주 검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다른 사례도 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1986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사건으로 국군보안사령부에서 전기봉·고춧가루물·구타 고문 등을 당한 뒤 검찰에 송치됐을 때 “고영주·정진규 검사에게 고문 흔적을 보여주며 호소했으나 무시당했다”고 1988년 공개 증언하기도 했다.

고 검사는 1980년대에 집중학습을 통해 공안이론가로 거듭난다. 그는 2006년 와의 인터뷰에서 “대학생들이 의식화 학습을 시작할 때 나도 같이 공안 업무를 시작해 그 사람들의 책을 보면서 공부했다. 그 사람들의 전략·전술을 검찰에서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게 됐다. 변형된 공산주의 이론을 통한 간접 침략에 대한 검찰의 공안 업무를 주도해왔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론 학습’이 결정적 구실을 한 사례로 그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참교육’의 실체를 밝혀낸 것을 꼽는다. 그는 “‘참교육’은 학생들에 대한 좌경의식화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혁명 역량을 키우려는 공산주의 이론”이라고 보았다. 당시 그의 주장에 대해 검찰 내부에서 “지나친 논리”라는 반대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006년 과의 인터뷰에서 “89년도에 전교조 교사 1400여 명을 해직시켰는데, 전교조를 와해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게 ‘참교육의 실체’였다”고 말했다. 그는 검찰 퇴임 이후 ‘전교조가 표방하는 참교육의 실체’란 논문을 냈고, 2008년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의 상임지도위원을 맡아 ‘전교조는 이적단체’라며 검찰에 고발했다.

신경림·고은, ‘박정희 체제’에 저항해서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이 검찰 퇴임 3년 전인 2003년 청주지검장 시절 모습. 연합뉴스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이 검찰 퇴임 3년 전인 2003년 청주지검장 시절 모습. 연합뉴스

민중·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선전 이론이라고 보고, 이 개념의 이적성에 대한 유죄를 이끌어내 1990년 전후 학생운동·재야 세력에서 이 용어의 공개적 사용을 막은 것도 자신의 치적으로 여긴다. 최근 그는 국회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민중민주주의자”이자 “변형 공산주의자”로 거듭 평가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1996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해 학생운동을 크게 약화시킨 검찰 내부 주역으로 꼽힌다. 대검 공안기획관이던 1997년 대검 공안부장과 함께 민주이념연구소도 차렸다. 신문기사, 시민단체·학생운동권의 유인물, 학위논문, 도서출판물의 이적성 여부를 판단하는 연구소였다.

연구소가 설립된 그해 검찰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유홍준 교수의 의 일부 글, 시인 신경림·고은의 글 등이 이념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2000년 교과서 개정 때 이 글들을 빼라고 교육부에 요청했다. 검찰이 문제 삼은 신경림의 시는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로 시작하는 ‘가난한 사랑 노래’다.

이를 주도한 이가 고영주 검사다. 당시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체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의 글이 대상이 됐다. 중고생들이 교과서에 실린 글에 관심을 갖고 이들의 (다른) 글을 찾아봤을 때 사상적 충격을 받을 것”이란 논리를 폈다. 신경림·고은 등이 유신 시절 ‘박정희 체제’에 저항한 성향이 고려된 것이다.

검찰이 1997년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 등이 쓴 초등학교 통일교육 교재 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찬양·고무 등)로 이 교수 등을 기소했으나, 이후 대법원이 “이적표현물이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린 사건이 있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7월호)과 (9월호)에서 이 교재의 이적성을 먼저 제기한 게 발단이었다. 검찰은 이 교수 등의 구속영장을 두 차례 청구했다가 기각되자, 대선 이후 불구속 기소로 방향을 바꿨다. 당시 언론은 검찰에서 이 교재의 이적성을 감정한 인물로 고영주 검사를 지목했다.

그가 공안검사로 맹활약하며 반공론에 대한 확신을 강화한 시기가 1980~90년대라면, 검찰에서 퇴임한 2006년 이후는 극우·보수 단체와 함께 그의 반공론이 검찰 담장 밖에서 활보한 시기다.

그는 “좌파 정부에서 국가 정체성이 훼손됐다”며 2008년 설립된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이 위원회는 2010년 박원순 당시 변호사, 노회찬 전 의원 등을 ‘친북·반국가 행위자 100명’에 포함시켜 발표했다. 그는 통합진보당 해산 청원서 작성과 제출을 주도해 지난해 진보당의 해산도 이끌었다.

말한 사람 없는 “공산주의 되면 심판…”
고영주 이사장이 공안검사로서 수사에 참여한 부림사건에 연루됐던 이들이 지난해 9월 대법원에서 33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자 기뻐하고 있다. 한겨레 김광수 기자

고영주 이사장이 공안검사로서 수사에 참여한 부림사건에 연루됐던 이들이 지난해 9월 대법원에서 33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자 기뻐하고 있다. 한겨레 김광수 기자

‘사법부의 김일성 장학생’ 발언도 그 연장선에서 나왔다. 그는 “사법부가 국가 변란 세력의 지원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어떤 판사가 김일성 장학생인지 모르나 북한의 사법부 침투 전술이 상당히 성공했다고 본다”고 지난 5월 인터넷방송 ‘배나TV’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사법부의 좌경화 근거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경우 (대선 개입의) 증거도 없는데 어거지로 유죄 판결하고 구속까지 했다. 애국 세력에는 잔인하고 종북 세력에게는 우호적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달리 대법원은 지난 7월 원 전 원장을 구속한 2심 판단을 깨고 사건을 재심리하라며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원 전 원장은 최근 보석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고영주 이사장이 ‘좌파·종북 세력 척결’이란 신념을 가진 계기로 1981년에 ‘부림사건’을 맡았던 것을 꼽는 이가 많다. 그는 당시 피의자가 “공산주의가 되면 우리가 검사님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라고 자신에게 했다는 발언을 극우·보수 단체 행사나 인터뷰에서 거의 빼놓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건을 변론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표도 부림사건이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므로, 이들도 공산주의자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부림사건에 연루된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 사건의 관련자들에게 모두 물어봤는데 그렇게 말한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고 이사장에게 했다는 발언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치면, 고 이사장은 이들이 1980년 초반에 가졌던 생각을 수정·변화시키지 않은 채 우리 사회의 공산화를 위해 활동할 것이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 그는 “부림사건은 공산주의 운동과 종북세력의 뿌리”라고 여전히 주장한다. 이런 수정·불가론은 지난해 통합진보당 해산 당시 검찰이 제기한 논리이기도 했다.

그의 주장 가운데 다른 오류도 있다. 문재인 대표는 1981년엔 사법연수원에 있어 이 사건을 변론하지 않았다. 문 대표는 부림사건이 불법 감금, 고문 등으로 조작된 공안사건이라며 이 사건 관련자들이 재심을 청구해 지난해 부산지법에서 무죄를 받을 때 변호인이었다. 대법원도 지난해 9월 이 사건에 무죄를 선고했다.

고 이사장이 문 대표 등 야권에 대한 적대적 사고를 가진 이면에 검찰 재직 후반부에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다는 피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그는 2013년 보수·애국 단체 신년회에서 “노무현 정권에서 핍박을 받았다”면서 참여정부 당시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을 핍박을 가한 핵심 인물로 지목했다.

그가 국민의 정부(김대중)에서 공안 분야의 주요 보직인 대검 공안기획관을 지냈고 참여정부(노무현)에서 서울남부지검장까지 올라 ‘핍박’이란 말이 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참여정부에서 자신의 일부 사시 동기들보다 승진에서 밀리거나, 대검 공안부장, 고검장 등에 오르지 못한 것을 두고 그가 피해의식을 느낄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군사정권 시절 ‘구공안 검사’들이 퇴조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어하지 않는 정권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한 다른 인사는 “그(고영주)에게 어떤 인사 불이익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지금 고 이사장의 발언과 인식을 보면 당시 검찰 인사가 잘됐다는 것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현 여권에서 청와대 근무 이력이 있는 인사는 “현 정부에서 시도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이념적으로 갈라치기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정권 전체 차원의 기획이란 의심도 든다. 하지만 고 이사장의 발언은 개인 성향이 가미된 돌출·돌발적 성격이 강해 보인다. 문제는 이런 논란을 일으키는 그가 방문진 이사장까지 오르도록 이 정권이 제어하지 않은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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