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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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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난민 인정은 신의 일”

‘날벼락 같은 행운’으로 국내 세 번째로 난민 인정 받은 시리아인 무스타파 독점 인터뷰… ‘난민의 길’만큼이나 험난한 ‘난민 인정의 길’ 그리고 의료보험 적용 못 받고 생계 위협받으며 빈민으로 전락하는 ‘인도적 체류자들’
등록 2015-09-17 07:51 수정 2020-05-02 19:28
‘시리아 인 코리아’는 시리아 사막처럼 퍽퍽하다.
시리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실향민과 난민이 되어 지구를 떠돌고 있다. 한국에서도 800명에 육박하는 시리아인들이 난민 심사를 신청했으나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3명뿐이다. 이 3명 중 1명을 독점 인터뷰했다. 그가 시리아를 탈출해 ‘난민 인증’을 받는 과정은 ‘국내 시리아 난민의 난민 되기’가 얼마나 지난한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 역설은 난민 심사에서 탈락한 인도적 체류자들의 삶이 인도적 생활과는 거리가 먼 현실과도 연결돼 있다.
난민을 받아들이는 독일의 태도는 한국과 많이 다르다. 이주민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도 난민을 환대하는 독일 사회의 분위기를 현지 르포로 전한다. 5년째 이어지며 최악의 사태로 치닫고 있는 시리아 내전의 최근 상황도 살폈다.
지난 9월4일 인생의 절반을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았던 내툰나잉(버마 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 대표)의 심장이 멈췄다. 그의 46년 인생에서 난민 된 자의 삶과 그들을 대하는 대한민국의 태도를 반추할 수 있다.
취재 김선식·이문영·신윤동욱 기자, 편집 구둘래 기자, 디자인 장광석
알란 쿠르디 등 내전이 앗아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이야기하며 시리아 난민 무스타파(가명)가 두툼한 손을 떨었다.

알란 쿠르디 등 내전이 앗아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이야기하며 시리아 난민 무스타파(가명)가 두툼한 손을 떨었다.

그는 대뜸 “이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터키 남부 해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세 살배기 알란 쿠르디의 얘기를 꺼냈을 때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들을 무스타파(가명)가 불러냈다. 한 아이는 머리에 피를 흘린 채 고개를 젖히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얼굴 반쪽이 괴사돼 있었다. 시리아 내전에서 미사일과 화학무기에 희생된 아이들이었다. 저마다 알란의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릴 때 무스타파는 이 아이들을 생각했다.

“시리아에서 매일 수십 명의 아이들이 정부군의 미사일 폭격으로 목숨을 잃는다. 그들의 죽음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정말 사람들이 우리의 죽음에 관심이 있는 걸까. 난 잘 모르겠다.”

지난 9월9일 시리아 난민 무스타파의 두툼한 손이 떨렸다. 그도 미사일 폭격을 직접 몸으로 겪었다. 2013년 1월 아내와 5명의 아들·딸을 데리고 시리아 국경을 넘었다. 터키 접경지로 가는 길이었다. 정부군은 탈영하는 군 장교들과 이주하는 국민들을 겨냥해 미사일을 쏘았다.

“비행기들이 낮게 날아와 미사일을 쐈다. 주변에 있는 집 20여 채가 부서졌다. 터키에 입국할 때까지 같은 상황이 7차례 되풀이됐다.”

무스타파는 20여 년을 시리아 공무원으로 일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하페즈 알아사드 전 대통령과 그의 아들인 바샤르 알아사드 현 대통령의 임기는 그의 공직 기간보다 길었다. 소수종파인 알라위파 가문 출신의 ‘부자 대통령’은 40년 넘게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2011년 3월 발생한 반정부 시위는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그의 삶을 흔들었다. 그해 9월 무스타파는 수감된 시위자들을 도와줬다는 의심을 받았다. 정치안보국이 그를 연행해 정치범 수용소에 가뒀다. 손을 뒤로 묶고 눈을 가린 채 물을 끼얹고 무차별 구타했다. 풀려나기까지 1년1개월 동안 그는 지옥을 살았다. 정부와 자유시리아군(FSA·반군)의 정치범 석방 협상이 그를 감옥 밖으로 꺼냈다.

한국-터키 사이를 탁구공처럼

정부는 그에게 복직을 명령했다.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출소해보니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터키 접경지역 알레포까지 많은 도시들이 미사일에 파괴돼 있었다. 시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내와 자녀들을 지켜야 했다.”

무스타파의 가족은 난민이 됐다. 안전지대를 찾아 도착한 터키도 안전하지 못했다. 시리아 정부가 파견한 비밀경찰들이 터키로 이주한 군인들과 국민들을 암살하거나 납치했다. 무스타파는 독일로 갈 계획을 짰다. 독일엔 그의 친척이 있었다.

2014년 2월 무스타파는 홀로 터키를 떠났다. 가족 7명이 한꺼번에 움직여 이동 시간을 늘리면 독일 난민이 되는 날도 늦춰질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최대한 빨리 난민 인정을 받은 뒤 가족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독일로 가는 길은 탈출 과정만큼이나 험했다.


“우리는 한국에 물질적 도움을 바라는 게 아니다. 다만 안전한 생활을 원할 뿐이다. 가족이 죽고, 친구가 죽었다. 난민이 되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우리가 다 죽으면 난민으로 인정할 것인가.”
-함단

독일에 안전하게 도착하려면 여러 나라를 돌아가는 편이 낫다는 지인들의 조언이 있었다. 무스타파는 제3국을 통해 한국을 거친 뒤 독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인천공항에 내린 그가 독일로 출국하는 심사대에 섰을 때 그의 여권에서 ‘어떤 문제’가 발견됐다. 한국 정부는 그에게 강제퇴거 명령을 내려 목적지 독일이 아닌 출발지 터키행 비행기를 태웠다. 터키에 도착한 그는 독일로 갈 수도, 가족에게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의 출국을 허가했던 터키가 입국은 불허했다. 터키는 하루 만에 그를 한국으로 되돌려보냈다. 두 나라 사이에서 그가 탁구공처럼 떠넘겨졌다.

무스타파는 인천공항 송환대기실에 갇혔다. 보름 남짓 모든 끼니마다 치킨버거 한 개와 콜라 한 잔만 제공됐다. 잠은 바닥에 갈색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출입국관리사무소와 2차례 면담했다. “독일로 가서 난민 신청을 하고 싶다”며 도움을 청한 그는 결국 “독일로 갈 수 없다면 한국에서라도 난민 신청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난민 신청 의사를 밝힌 다음날 출입국관리사무소는 그의 팔목에 은색 수갑을 채웠다. 그는 난민 심사를 받는 동안 구금될 화성외국인보호소로 이송됐다. ‘왜 수갑을 채우냐’는 항변에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은 ‘같이 가면 일이 잘 해결될 것’이라 말했다”고 무스타파는 기억했다.

행방을 찾고 통역사를 데리고 온 변호사

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된 무스타파는 자살을 생각했다. 보호소 생활 이틀째 날 어느 직원이 그를 불렀다. “그 직원은 공책을 들고 다니며 본국에 송환할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그가 나를 시리아로 송환시키겠다고 했다. 나는 싫다고 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 직원이 웃었다. 시리아에 송환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체포돼 고문당한 뒤 결국 죽게 될 것이었다.”

대다수의 난민 신청자들에겐 오지 않는 행운이 그에게 왔다. 우연히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지난해 3월 한 변호사가 인천공항 송환대기실에 있는 외국인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변호사는 대기실에 머무르던 시리아인들이 입국 절차를 완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명의 행방이 확인되지 않았다. 화성보호소로 이송된 사실을 수소문 끝에 파악했다. 변호사는 아랍어 통역사를 데리고 화성으로 무스타파를 찾아왔다. 외국인보호소가 그를 구금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변호사의 이의신청으로 무스타파는 풀려날 수 있었다.

법무부는 지난해 9월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며 그의 난민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본국의 내전 상태가 지속돼 귀국시 생명의 위협 가능성이 있다”며 인도적 체류를 허가했다. 무스타파는 한국 내 시리아 난민 신청자 81%에게 이름 붙여진 ‘인도적 체류자’가 됐다.

무스타파는 그를 고문한 시리아 정부를 피해 난민의 길에 오른 사람이었다. 터키에 체류하던 당시엔 유튜브에 정부를 비판하는 동영상을 올린 적도 있다. 난민 불허에 이의를 신청한 변호사가 시리아 정부의 박해 가능성을 조목조목 반박한 뒤에야 무스타파는 난민 자격을 얻었다. 변호사는 이의신청 사유서에서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장은… 별도의 국가정황조사도 없이… 대부분의 시리아 난민 신청자들을 전쟁유민으로 간주하여 그들에게 인도적 체류를 시혜적으로 허가해주면 된다는 내부 지침에 따라 분명한 박해 사유가 있는 무스타파에게도… 인도적 체류 지위만 부여했다”고 썼다.

지난 3월 무스타파는 1994년 이후 국내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3번째 시리아인이 됐다. 그의 난민 자격은 자력으로 얻은 지위가 아니었다. 한 변호사에게 발견된 ‘날벼락 같은 행운’과 그 변호사의 법률 조력이 있어 가능했다. 무스타파는 “내가 난민으로 인정된 것은 변호사와 알라의 도움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무스타파가 겪은 일들은 ‘난민의 길’만큼이나 ‘난민 인정의 길’이 험난한 국내 시리아인들의 처지를 드러낸다.

760여 명의 시리아인이 난민 청했지만[%%IMAGE4%%]

1994년부터 2015년 7월 말까지 760여 명의 시리아인이 한국 정부에 난민 심사를 청했다. 내전이 악화된 2012년 이후 신청자(2012년 146명→2013년 295명→2014년 204명)가 85%를 넘는다. 무스타파를 빼면 760여 명 중 난민 인정자는 2명뿐이다. 0.39%만 난민으로 인정된 셈이다. 전체 국가 대상의 난민 인정률 6.7%(7735명 중 522명)보다 크게 낮다. 신이 도운 무스타파는 ‘공식 난민’이 됐으나, 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절대다수의 시리아 난민은 인도적 체류자로 남는다.

무함마드 아타르(26)가 병원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병문안 온 함단 아셰이크(23)와 아드난 알야타칸(31)이 그의 상태를 살폈다. 병실의 한국인 환자들이 9월8일 3명의 시리아인에게 말없는 눈길을 보냈다.

깁스 안에서 무함마드의 손은 말라붙은 피로 거무튀튀했다. 일주일 전 저녁밥을 준비하던 그는 칼에 혈관을 다쳐 출혈이 심했다. 입원 당시 병원은 보증금이라며 150만원을 요구했다. 무함마드는 돈이 없어 50만원 납부를 뒤로 미뤘다. 9월11일 퇴원하는 그의 치료비는 쌓이고 불어 450만원이 됐다. “병원이 100만원을 깎아줄 테니 350만원만 내라고 했다”며 무함마드는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쳐다봤다. 이미 지불한 100만원을 제해도 그는 250만원을 추가로 내야 했다. 난민 인정이 거부된 자는 의료보험을 적용받지 못했다. 그에겐 치료비를 완납할 돈이 없었다. 그의 시리아 친구들이 부족한 병원비를 수소문하고 있었다.

무함마드와 함단과 아드난은 ‘난민이면서 난민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2012년 무함마드는 일 때문에 한국에 있었다.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면서 귀국이 불가능해졌다. 고국에 있던 가족은 국경을 넘어 터키로 탈출했다. 한국 정부에 난민 심사를 신청했으나 불허됐다. 아드난도 2012년 4월부터 한국에 발이 묶였다. 전쟁은 시리아의 아드난 집을 부수었고, 살아남은 가족들은 이집트를 떠돌고 있으며, 그는 ‘귀국당하면’ 살해당할 것이란 두려움을 안고 산다. 난민 신청 2년 만에 ‘불인정’을 통보받았다. 2014년 4월 접수한 이의신청도 6월 말 기각됐다. 법무부는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전쟁 미아’가 돼도 개인적 박해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한국은 난민 지위를 주지 않는다.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가 없는” 무함마드와 함단과 아드난은 포탄이 부순 자신들의 집 사진을 서로에게 보여주며 공포에 떨었다.

그들의 ‘난민 됨’을 부정한 법무부는 그들에게 인도적 체류를 허가했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생명과 신체에 위험이 있는 상황”(인도적 체류 조건)과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난민 인정 조건)가 무엇이 다른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의 시리아대사관에 억류된 여권
2014년 난민 인정이 불허된 시리아인 아드난의 이의신청에 대해 법무부가 기각 결정한 통지서(위). 시리아 난민(인도적 체류자) 함단이 2년 전 정부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사촌동생들의 묘비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2014년 난민 인정이 불허된 시리아인 아드난의 이의신청에 대해 법무부가 기각 결정한 통지서(위). 시리아 난민(인도적 체류자) 함단이 2년 전 정부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사촌동생들의 묘비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7월까지 누적된 국내 인도적 체류자는 876명이다. 이 중 621명이 시리아인이다. 지난 한 해에만 539명이 인도적 체류 자격을 받았다. 502명이 시리아인이었다. “한국 정부가 시리아인이란 이유로 엄밀한 난민 심사 없이 무조건 인도적 체류 지위를 부여해 난민 인정의 부담을 회피하고 있다”(김성인 난민인권센터 사무국장)는 지적까지 제기된다. 한국과 시리아 사이엔 수교 관계가 없다. 북한과 시리아는 1966년 수교했다.

“너도 곧 여권 빼앗길 텐데.”

함단이 무함마드의 깁스를 보며 말했다. 함단과 아드난에겐 여권이 없다. 인도적 체류 상태에선 고국의 허가 없이 여권 갱신이 불가능(난민 인정자는 본국의 개입 없이 국제여행 가능)하다. 여권이 만료된 국내 시리아 인도적 체류자들은 주일 시리아대사관(한국엔 시리아대사관 없음)에 여권을 보내 갱신을 요청한다. 주일 시리아대사관은 ‘문제적 인물들’의 여권 갱신을 거부하며 여권 자체를 압류한다. 함단과 아드난은 시리아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그들은 병역을 거부(“같은 시리아인을 죽일 수 없었다”)했고, 한국에서 시리아 정부 반대 시위에 참여했으며, 페이스북에 정부 비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함단과 아드난의 여권은 그렇게 일본에 억류돼 있다. 아드난은 가족을 보러 갈 수도 없고 한국으로 데려올 수도 없다. 난민 인정자와 달리 인도적 체류자들은 가족과의 재결합이 불가능하다. 자녀가 한국에 있다 해도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아드난은 4년째 가족과 이별 상태다.

인도적 체류자는 1년마다 체류 자격을 갱신해야 한다. ‘난민 자격증’을 얻지 못한 그들에겐 G-1 비자가 주어진다. G-1 비자는 원칙적으로 취업이 금지돼 있다. ‘포괄적 체류자격 활동허가’를 받아야 일을 할 수 있으며, 사전 허가를 받은 사업장에만 취업할 수 있었다. 허가받고 할 수 있는 일 자체가 제한적이었다. 체류 자격이 불안정한 사람을 쓰려는 고용주도 많지 않았다. 인도적 체류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순노동뿐이었다. 인도적 체류가 ‘허가 없이 일하는 인도적 체류자’를 양산했다. 무함마드도 단순노동 일을 맴돌았다. 대구 자동차정비소에서 하루 일하면 하루는 일하지 못했다. 2개월 전 서울에 올라온 그는 손을 다칠 때까지 자동차부품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번 돈을 터키의 가족에게 보냈다.

사전 허가 없이 식당에서 일하다 적발돼 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된 한 시리아인이 있었다. 설거지 일을 하겠다고 신고했을 땐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행정소송에 이긴 뒤에야 그는 주방보조로 일할 수 있었다. “인도적이지 못한 인도적 체류 지위가 난민 불인정자들을 교도소 담장 위로 걷게 만든다”(헬프시리아 박지훈 변호사)는 비판이 제기됐다. 2014년 초가 돼서야 인도적 체류자에게 ‘선 취업, 후 신고’가 적용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제69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시리아 참상에 대응하는 한국 정부의 노력’을 언급했다. 대통령 연설 전후로 정부는 시리아 출신 인도적 체류자 급증 사실을 홍보해왔다.

인도적 체류자 위한 비자 만들어야

“체류할 수 있도록 했다면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없고, 가족을 데려와 같이 살 수도 없다. 의료보험 적용이 안 돼 병을 키우고, 자녀들은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없다. 인도적 체류자들은 결국 한국 사회의 소외계층으로 고착화될 수밖에 없다.”(김성인 난민인권센터 사무국장)

체류 자격이 체류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돌아갈 곳을 잃은 자들은 존재하는 곳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존재하는 곳에선 존재할 허가 외에 살아갈 환경은 주지 않는다. ‘비인도적인 인도적 체류’ 과정에서 국내 난민은 빈민이 되고 있다. 국내 인도적 체류자 수(2015년 7월 기준 876명)는 이미 난민 인정자 수(522명)를 앞질렀다. 인도적 체류자에게 ‘체류할 조건’을 만들어주는 별도의 비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함단이 울음을 감싸쥐었다. 그의 손 밖으로 흘러나온 울음소리가 아드난의 좁은 방을 채웠다.

“알라 야르하무훔.”(알라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길)

함단은 코란의 짧은 문구가 박힌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사이드 무함마드 아셰이크, 1999년생. 자이납 아셰이크, 2009년생. 그의 사촌동생들 이름과 생몰 연대가 찍힌 묘비가 사진 안에 있었다. 2013년 시리아의 집에서 놀고 있던 두 동생은 정부군의 폭격으로 16살과 6살 나이에 죽었다. 그들의 흩어진 몸은 하나로 수습되지 못했다. “너무 많이 죽어서 우리 모두 죽음에 너무 익숙하다”며 함단은 고개를 꺾었다. 울음이 그의 말을 자주 끊었다.

“하루만 집 밖에서 자도 불편한데, 우리는 나라 밖에서 자고 있다. …우리는 한국에 물질적 도움을 바라는 게 아니다. 다만 안전한 생활을 원할 뿐이다. …가족이 죽고, 친구가 죽었다. 시리아 인구 절반 이상이 난민이 됐다. …시리아엔 미래가 없고, 우리에겐 나라가 없다. 난민이 되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우리가 다 죽으면 난민으로 인정할 것인가.”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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