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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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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야, 흘러야 ‘강’이다 강은 흘러 흘러야 한다

4대강 사업 뒤 망가진 금강을 지켜내려 온몸으로 기록하는 김종술 기자… 콘크리트 보에 막힌 물에서는 독소와 큰빗이끼벌레가 둥둥 떠다니고… 민주주의의 훼손으로 망가진 강, 민주주의가 흘러야 4대강도 살아난다
등록 2015-09-08 09:45 수정 2020-05-02 19:28
‘넓고 길게 흐르는 큰 물줄기’. 강이다. 그런데 흐르지 못한다. 일 벌인 전직 대통령은 제집에서 지낸다. 막지 말고 흐르게 하자는 사람은 다 잃었다. 김종술(49) 기자 이야기다. ‘금강의 요정’ 또는 ‘괴물 기자’라는 별명이 있다. 4대강 사업 착공 때부터 지금까지 6년, 그의 직장은 금강이었다. 그동안 술 한잔 입에 대지 않았다. 4대강은 16개 보(라고 부르지만 결국 댐이나 다름없는 콘크리트 벽)에 가로막혀 있다. 녹조가 해마다 강을 뒤덮고, 호수에서나 몸집을 키울 큰빗이끼벌레가 폭증하고 있다. 마이크로시스틴-LR라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간 손상을 줄 수 있는 독소들이 둥둥 떠다닌다. 수돗물에 섞일 수 있는데도 정부는 괜찮다는 말만 반복한다.
강이 죽으면 사람도 못 산다. 물이 썩었는데 어디서 물을 구할 것인가. 4대강 사업을 비판하고 강을 되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김종술 기자의 삶, 올해 들어 마이크로시스틴-LR의 창궐이 예사롭지 않은 낙동강·금강, 4대강을 흐르게 하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흐르게 하는 것이라는 이철재 환경운동연합 정책위원의 글까지 담았다.
강변 모래톱 강수욕장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날을 기다린다.
취재 전진식 기자, 편집 이정연 기자, 디자인 장광석
9월2일 충남 공주시 공주보 상류에서 김종술 기자가 투명카약을 타고 금강을 둘러보고 있다. 그의 등 뒤로 공주보가 보인다. 류우종 기자

9월2일 충남 공주시 공주보 상류에서 김종술 기자가 투명카약을 타고 금강을 둘러보고 있다. 그의 등 뒤로 공주보가 보인다. 류우종 기자

눈물 없이 그를 만날 수 없다. 강물 없이 그를 말할 수 없다. 그는 새가 아닌 벌레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까마득한 이상의 창공은 그가 바라보는 곳이 아니다. 그의 시선은 금강의 수면과 나란하다. 찰랑이는 강물의 눈으로 그는 이상을 꿈꾼다. 꿈은 오직 하나, 맑은 강이다. 2009년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착공 뒤부터 그의 삶은 강물에 젖었다. 오늘도 그는 해진 신발 신고 강변을 따라 걷고 뛴다. 그와 금강 사이에는 1mm의 격절도 없다. ‘금강의 요정’이라고 일컫는 사나이. 그는 ‘금강 탐사 전문기자’ 김종술(49)이다.

2015년 여름, 오늘도 ‘5천원 인생’

지난해 6월. 주머니를 만졌다. 딱 5천원. “그래, 5천원어치만 하자.” 구멍가게에서 빵 5천원어치를 사서 가방에 욱여넣었다. 버스를 타고 충남 부여군까지 갔다. 거기에는 백제보가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4대강 사업으로 강바닥에 박은 전국 16개 보 가운데 하나다. 백제보에서 금강을 따라 상류로 걸었다. 아파트 보증금은 진작에 날렸다. 월세도 몇 달치 밀렸다. 그만하고 싶었다. 너무 힘들었다.

가다 지치면 강변에 손수건 베고 누워 잠들었다. 풀밭이든 모래톱이든 침대가 되어주었다. 풀벌레 소리가 슬펐다. 밤이슬보다 먼저 눈물이 흘렀다. 말라붙은 눈물을 아침 햇살이 두드리면 일어났다. 그렇게 3일을 풍찬노숙했다. 어느덧 떠나왔던 공주에 다시 닿았다. “아껴서 먹는다고 했는데도 빵이 다 떨어지고 없더라고요.”


4대강 사업으로 망가진 금강을 되살리기 위해 2009년부터 매달렸지만 포기하고 싶었다. 포기하려고 떠난 3일이었다. 그 끝에서 그는 큰빗이끼벌레를 만났고, 포기하지 못했다. “매일 밤 다짐했어요. 내일부터는 그만 강에 가자. 그런데 다음날 눈을 뜨면 나도 모르게 강에 나가 있어요. 그 ‘함정’에 또 빠진 거죠.”

공주보 인근 수상공연장에서 눈이 커졌다. 난생처음 보는데 징그러웠다. 썩는 냄새처럼 고약했다. 사진을 찍어 환경단체들에 보냈다. 좀더 걸어 쌍신공원. 물속을 보니 더 많았다. 환경단체나 교수들한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모두 모른다 일색. 청양지천생태모임의 복권승 대표가 회신을 보냈다. 딱 여섯 글자. ‘큰빗이끼벌레’. 김종술이 강에 대량 서식하는 큰빗이끼벌레를 국내에서 처음 발견한 순간이다. 그는 전문가 전화 인터뷰를 서둘러 마친 뒤 자신이 시민기자로 일하는 에 기사를 보냈다(‘저수지 된 금강에 큰빗이끼벌레… 녹조와 물고기 폐사로 악취’).

태형동물인 큰빗이끼벌레는 저수지·호수처럼 고인 물에 서식한다. 1mm 안팎의 개체가 수없이 모여 군체를 이룬다. 가을철 수온이 떨어지면 집단 폐사하면서 독소를 내뿜어 수중 생태계에 악영향을 준다. 금강에서 큰빗이끼벌레가 대량 서식한다는 것은 보에 가로막힌 강이 이미 호수로 변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서울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돈 좀 빌려줘.” 4대강 사업으로 망가진 금강을 되살리기 위해 2009년부터 매달렸지만 포기하고 싶었다. 포기하려고 떠난 3일이었다. 그 끝에서 그는 큰빗이끼벌레를 만났고, 포기하지 못했다. “매일 밤 다짐했어요. 내일부터는 그만 강에 가자. 그런데 다음날 눈을 뜨면 나도 모르게 강에 나가 있어요. 그 ‘함정’에 또 빠진 거죠.”

공주시 신관동 그의 집 책상에는 지금도 5천원이 놓여 있다. 1천원권 지폐 다섯 장. 지난해 6월의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2005년 봄, 비단강에 홀딱 반하다

김종술은 2005년 금강을 처음 찾았다. 어느 봄날이었다. 금강철교를 버스가 막 지날 참. 곰나루 둔치가 눈에 들어왔다. 석양이 강을 황금빛으로 칠했다. “말 그대로 비단강(錦江)이었어요. 한순간에 푹 빠질 만큼 아름다웠어요. 그다음 날 바로 곰나루 모래톱을 걸었다니까요.”

1966년 전남 장성군에서 1녀3남 가운데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벼농사를 짓는 농부였다. 20대 초반 서울에 가서 옷가게를 했다. 규모는 고만고만했지만 수출이 괜찮았다. 내처 규모도 키웠다. 한창때 직원 20명을 두었다. 평일엔 소처럼 일했다. 주말엔 새처럼 놀았다. 낚시가 좋아 전국 어디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다 우연히 누나가 사는 공주에서 금강을 만났다. 고향 생각도 났다. 마을을 굽어 흐르던 황룡강….

2005년 서울살이에다 사업까지 작파했다. 이삿짐 꾸려 공주에 정착했다. 새벽 5시면 일어나 금강 둔치를 걸었다. 물안개가 아가씨같이 피었고 고라니가 개구쟁이처럼 뛰었다. 소나무 등걸이 고왔다. “그때만 해도 천국이었죠. 여기 온 걸 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친척이 운영하던 지역신문()에 관리과장으로 입사했다. 삶은 금강처럼 유장하게 흐르는 듯했다.


그는 저널리즘을 모른다. 책 펴들고 배운 적 없다. 고집이 세서 잘 배우려고도 않는다. 강물에 젖은 옷, 눈물로 빤 손수건, 강변 흙 묻은 신발, 무릎에 날마다 붙이는 파스, 그리고 그가 쓴 900여 개 기사. 그것들만이 그를 증거한다. 그는 리얼리즘이다.

1년 뒤부터 기자로 일했다. 배운 건 하나도 없었다. “남들 쓰는 것 보니 별것 아니더라고요.” 2008년 공주에 석산 개발 바람이 불어닥쳤다. 석산이 한번 들어서면 돌보다 먼저 사람이 부서지기 일쑤였다. 고향집 뒤에 있던 시멘트 공장 생각도 났다. 어머니는 새벽같이 일어나 마루와 항아리를 닦았다. 돌가루를 장기간 들이마신 탓에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시던 마을 어르신들도 떠올랐다.

배운 건 없었다. 사업자들이 휘두르는 온갖 편법에 대응할 길을 몰랐다. 참다못해 공주시청으로 달려갔다. 한 공무원이 두툼한 책자 하나를 보여줬다. . “가져갈 수 없으니 필요한 부분만 적으라고 하더라고요. 그 자리에 앉아서 저녁때까지 수첩에 일일이 적기 시작했어요. 보다 못한 공무원이 그냥 가져가라더군요.” 방구석에 틀어박혀 법령을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무기’가 생긴 셈이다.

수정 같은 기사 900개, 수갑 같은 빚 5천만원
4대강 사업으로 강변과 강바닥에 대규모 준설이 이뤄지면서 수생 생태계가 파괴됐다. 김종술 기자 제공

4대강 사업으로 강변과 강바닥에 대규모 준설이 이뤄지면서 수생 생태계가 파괴됐다. 김종술 기자 제공

그길로 석산이 들어섰거나 들어설 곳을 다녔다. 근처 청양은 물론 충북을 거쳐 경북 점촌, 강원 태백까지 훑었다. 인근 공주시 정안면에서는 1년을 주민들과 싸워서 석산 개발을 막았다. 충남 연기군(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의 한 마을과 관련한 기사를 쓰고는 경찰 조사까지 받아야 했다. 사업 무산에 앙심을 품은 사업자가 그를 고소했다. 4대강 사업 취재를 하면서도 김종술은 석산 개발 문제를 끊임없이 추적 보도하고 있다. 올해 초에는 공주시 의당면의 한 마을에서 석산 개발 사업자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감격한 주민들은 그에게 감사패를 건넸다. 그가 시민기자이면서 환경운동가인 내력이다.

2009년은 김종술에게 노을 같은 해다. 아름답지만 이울기 시작했다. 4대강 사업 공사가 본격 시작된 뒤 그는 4대강 사업의 거짓을 비판하는 기사를 토해냈다. 2010년 기자로 일하던 을 친척한테서 인수하면서 가속페달을 밟았다. 맨 먼저 지방자치단체나 기업의 광고가 뚝 끊겼다. 10명 넘는 기자들 월급까지 챙겨야 하니 다달이 2천만원 넘게 적자였다. 친구들한테 돈을 빌리고, 고향 논밭도 팔았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었다. 인수 1년 만인 2011년 신문사 경영을 접었다. 그즈음 에 시민기자로 뛰어들었다. ‘김 사장’에서 ‘김 기자’로 되돌아왔다.

4대강 사업은 그가 보기에 의문투성이였다. “첨엔 긴가민가했어요. 그런데 취재를 못하도록 계속 막길래 의심병이 생기기 시작한 거죠. 좋은 거면 못하게 할 이유가 없잖아요.” 협박·폭력에도 시달렸다. 강변 준설공사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다가서면 건설사 인부들한테서 삽이 날아왔다. “개××, 죽고 싶어?” 팔도의 온갖 욕지거리를 다 들었다. 집과 신문사 사무실도 털렸다. 묘하게 컴퓨터 하드디스크만 훔쳐갔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범인 검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협박 전화도 하루에 수십 통씩 받았다.

저인망처럼 촘촘한 방해를 뚫고 김종술은 지금까지 6년간 900개 가까운 기사를 썼다. 거의 전부 현장 기사다. 건설 현장에 상주하던 국가정보원이나 청와대 직원들에게 그는 ‘공공의 적’이었다. 친한 이들은 그가 해코지를 당할까 진심으로 염려하기도 했다. “일개 지역신문이 정부 국책사업을 반대하면 ‘어렵다’고들 하더라고요.” 대책 없는 고집으로 6년을 견뎠다.

는 물론 지역 환경단체들한테서 많은 상을 받았다. 2014년 12월에는 충남시민재단이 선정한 제1회 충남공익활동대상의 영예도 안았다. 공주 공산성 석축 붕괴, 금강 물고기 떼죽음, 큰빗이끼벌레 대량 서식…. 그가 세상에 타전한 특종 기사는 셀 수 없이 많다. 모두 금강에서 퍼올린 아픈 현실이다. 정부에 눈엣가시였지만 소송은 단 한 건도 당하지 않았다. 오직 현장에 가서 보고 묻고 만져본 뒤에야 기사를 쓴다는 그의 철칙 때문이다.

그러나 받은 상의 개수보다 짊어진 빚이 더 무거워졌다. 지난해에는 신용카드 3개를 돌려막다 대출금을 감당할 수 없어 파산 직전까지 갔다. 실수입이 거의 없으니 4대 보험 가운데 어느 하나도 그에게 적립돼 있는 게 없다. 최근 들어 집주인한테서 월세 5만원을 올려주지 않을 거면 집을 비우라는 말도 들었다. 견딜 수 없을 때면 공사판 막노동이나 대리운전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금세 강으로 돌아왔다.

“공사장에서 일당 8만원을 받았는데 손이 덜덜 떨리더라고요.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나 생각도 들고 죄를 짓는 것도 같고….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여기서 더 망가지면 얼마나 망가질 거냐 생각했죠. 지금도 밤에 누워 10년, 15년 뒤를 생각하면 암울해요. 그래도 후회할 삶을 살기는 싫어요.”

금강에서 금강으로, 6년째 매일 출퇴근[%%IMAGE5%%]

김종술은 오늘도 금강으로 출근한다. 벌써 6년째다. 다니는 길도 정교하게 짜여 있다. 금강변 쌍신공원과 건너편 수상공연장, 공주보를 날마다 확인한다. 강의 조그만 변화도 알아차릴 정도란다. 하루는 금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세종시까지 짚는다. 사나흘에 한 번은 더 상류인 충북 청원군까지 달린다. 또 하루는 금강 하류를 따라 부여군까지 밟는다. 사나흘에 한 번꼴로 서천군 금강하굿둑까지 살핀다. 하루 평균 차량 이동거리만 해도 100km를 넘는 길. 4년이 채 안 된 그의 차량 계기판에 찍힌 숫자는 15만km를 넘은 지 오래다.

그가 차량에 싣고 다니는 물건도 진풍경이다. 카메라와 노트북 컴퓨터는 기본이고 장화만 해도 3개다. 발목까지 오는 것, 허벅지까지 오는 것, 바지처럼 입는 것. 커다란 들통, 온도계, 줄자, 구명조끼, 사다리…. 강변의 험한 비포장길을 다니다보니, 구덩이에 차량 바퀴가 빠져 옴짝달싹 못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강물에 휴대전화를 빠뜨리는 것도 예사. 미끄러지고 가시에 긁혀 다친 상처도 숱하다. 하루 수십, 수백 번 강물에 담근 손은 60~70대 노인 같다. 그 투박한 손으로 ‘독수리 타법’에 의지한 채 강변에서 쪼그리고 보낸 기사가 900개를 넘는다.

지난 8월24일 그는 금강을 뒤로하고 낙동강에 갔다. 그의 차에는 투명카약 하나가 실렸다. 4대강 녹조 탐사를 위해 시민 모금으로 마련한 ‘비밀 병기’다. 애초 모금 목표액은 300만원이었지만 지금까지 1100만원 넘는 돈을 시민들이 모아줬다. 내친김에 낙동강 쪽에도 투명카약 하나를 선물했다. 2박3일 동안 낙동강 곳곳을 누비며 녹조 곤죽의 실상을 전했다. ‘4대강 바람’을 일으키고 싶어 시도한 일이었지만 때마침 닥친 제15호 태풍 고니 때문에 ‘개고생’을 하기도 했다.

“투명카약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받았을 때는 망설였어요. 그런데 시민들에게 4대강 사업의 폐해를 더 생생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전하기 위해 결국 승낙한 거예요. 어떤 조선소 사장님께서는 아예 카약 1대를 후원하겠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기사는 늘 새로워야 하는데 녹조 기사를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쓸 수는 없잖아요. 지금도 새로운 기사를 써야 한다는 고민을 항상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강은 흘러야 강, 강이 죽으면 사람도 죽어”
4대강 사업이 마무리된 2012년 10월 금강에서 물고기 수십만 마리가 떼죽음했다(왼쪽). 2012년 10월 금강 물고기 떼죽음 당시 발견된 초대형 메기.  김종술 기자 제공

4대강 사업이 마무리된 2012년 10월 금강에서 물고기 수십만 마리가 떼죽음했다(왼쪽). 2012년 10월 금강 물고기 떼죽음 당시 발견된 초대형 메기. 김종술 기자 제공

2012년 10월 김종술은 신경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 열흘 넘게 잠을 거의 못 이뤘다. 자신도 모르게 대낮에도 차량에 전등을 다 켜고 다녔다. 주위 사람들이 일러준 뒤에야 깨달았다. 원인은 또렷했다. 당시 금강 백제보 일대 60여km 구간에서 13일 동안 물고기 60만 마리가 무더기로 폐사해 강물에 떠올랐다. 환경부 쪽은 5만 마리 정도로 추산했지만 거짓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매일 새벽 공무원들보다 먼저 강에 나가 폐사한 물고기를 확인했다. 전날 수거돼 자루에 담긴 물고기를 한 마리씩 일일이 세었다. 그렇게 13일간 그가 확인한 수치가 60만 마리다. 7일째 되는 날에는 길이가 136cm에 이르는 초대형 메기가 배를 뒤집고 죽은 채 강변으로 떠밀려오기도 했다. 지옥 같았다고 했다.

원인을 명확히 찾기 위해 어류 전문가들에게 연락했지만 한결같이 “현장에 안 가서 모른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당시엔 물고기 떼죽음을 마치 금기어처럼 생각들 하더라고요.”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와서는 씻어도 씻어도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두통도 나날이 심해졌다. 결국 신경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두 달 넘게 먹어야 했다. 그의 서랍에는 지금도 두통약이 수북하다. 두통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때 그의 머리에 두통처럼 강렬한 문장이 새겨졌다. “고인 물은 썩는 게 진리다. 강은 흘러야 산다.”

지난 6년 김종술은 가진 걸 모두 잃었다. 4대강 사업 때문이고 이명박 전 대통령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고마운 일로도 여긴다. 일개 이름도 없는 지역신문 기자가 상과 영광을 한꺼번에 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에 미쳤으니 굿이라도 해서 물귀신을 쫓아내야 한다는 말도 듣지만, 그는 지치기는커녕 이제 시작하는 기분이라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을 두고 그는 간명하게 갈파했다. “흐르는 물을 보로 막아서 수질을 살린다는 건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겁니다.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이명박은 사이비 교주같이 4대강 사업을 한 것이고 국민들은 그 사이비 교주의 놀음에 놀아난 거예요.”

저널리즘을 모른다, 그는 리얼리즘이다

그는 저널리즘을 모른다. 책 펴들고 배운 적 없다. 고집이 세서 잘 배우려고도 않는다. 강물에 젖은 옷, 눈물로 빤 손수건, 강변 흙 묻은 신발, 무릎에 날마다 붙이는 파스, 그리고 그가 쓴 900여 개 기사. 그것들만이 그를 증거한다. 그는 리얼리즘이다.

9월1일 저녁 그의 집에서 된장찌개 끓이고 돼지고기 구워 저녁을 함께 먹었다. “하다 하다 더 못하면 산에 들어가서 살아야죠.” 그는 총각이다. 숫총각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언제든 찾아가면 된장찌개 끓여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란다. 산으로 숨지 않기를 바란다. 그의 리얼리즘에 공감하는 이들과 더 오래, 더 많이 연대하기를 바란다. 지금보다 더 자주 홀로 울더라도….

2015년 9월, 4대강 보의 수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고 있다. 금강 비단물결은 흐르지 못하고 있다. 김종술도, 비단강도 울고 있다. 눈물 없이, 강물 없이 그를 말할 수 없다.

공주=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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