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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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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성기는 살아 있다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재개…중단…재개…중단… 대북 심리전 65년 반복된 역사
등록 2015-09-01 07:53 수정 2020-05-02 19:28

국내 대북 심리전 역사 65년을 통틀어 대북 확성기가 이처럼 주목받은 적은 없었다. 가히 ‘확성기의 재발견’이다.
북한은 지난 8월25일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을 조건으로 지뢰 폭발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준전시상태를 해제했다. 북한은 졸지에 ‘스피커를 두려워하는 나라’가 됐다. 북한이 대북 확성기 방송을 유독 껄끄러워한 지는 오래됐다. 1990년대 이후 급격히 심화한 체제 불안 탓이다.
김종대 편집장은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고 운영이 어려울 때 심리전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럴수록 북한 체제상 ‘최고 존엄을 건드리는 일을 가만 놔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전방에 있는 북한 군인들이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확성기 방송을 집단적으로 접하는 데 대한 부담감과 체제 결속에 균열이 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군 당국이 지난 8월10일 경기도 파주 등 비무장지대 접경지역 2곳에서 11년 만에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 2004년 6월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합의에 따라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고 대형 확성기를 철거하고 있는 군인들. 연합뉴스

군 당국이 지난 8월10일 경기도 파주 등 비무장지대 접경지역 2곳에서 11년 만에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 2004년 6월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합의에 따라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고 대형 확성기를 철거하고 있는 군인들. 연합뉴스

“전단에는 독약이 발라져 있으니…”

우리 군이 대북 심리전에 활용해온 무기는 크게 3가지다. 라디오 방송, 삐라(전단) 및 물품 살포, 확성기 방송 등이다. 한 탈북자 출신 연구자는 라디오 방송과 전단 및 물품 살포는 북한에서 사전 제한을 가해왔다고 설명했다.

“1960년대 이전에는 (남쪽의) 전단은 허위라고 교육하면서 찢어버리라고 지시했고, 1970년대에는 습득시 보위부에 신고하도록 지시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전단 발견시 아예 보거나 줍지도 말고 즉각 안전부나 보위부에 신고하도록 지시했다.”(김나영, 2014, ‘환경변화에 따른 대북심리전 발전방향’, 경희대 공공대학원 석사 논문)

남쪽에서 살포한 생활물품에 대해서도 “독약이 발라져 있고 폭발물이 장치되어 있다고 선전하여 발견 즉시 안전부나 보위부에 신고하도록 했다”고 한다. 라디오 방송에 대해선 “개인이 라디오를 소지하는 것을 금지하고 평양방송, 중앙방송에 주파수를 고정시켜놓고 보위원이 정기적으로 가정을 방문해 주파수 고정 여부를 점검했다”.

하지만 확성기 방송은 방해 방송을 하거나 사후적으로 그 내용이 거짓이라고 교육할 수밖에 없다. 들리는 걸 막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대북 심리전의 역사는 한국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 9월10일 창설한 ‘대적선전부대’(현 국군심리전단)가 그 시초다. 한국전쟁 당시 대북 심리전은 미군이 주도했다. 이미 2차 세계대전에서 심리전을 도입한 미국은 극동사령부와 미8군사령부를 중심으로 한국전쟁 심리전을 총지휘했다.

라디오와 확성기 방송을 통한 심리전도 했지만 항공기 등을 활용한 전단 살포에 주력했다. 전단은 전시에 빠르고 광범위하게 심리전을 벌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당시 미 극동사령부 등은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북한군과 민간인 등을 상대로 월평균 6500만 장의 전단을 뿌렸다고 한다(정희수 새누리당 의원, 2012, ‘남북 간 심리전단의 어제와 오늘’, 국회 국방위원회 자료집).

1953년 7월 체결된 한국전쟁 정전협정은 대북·대남 심리전까지 제어하진 못했다. 협정 제1조 6항은 “쌍방은 모두 비무장지대 내에서 또는 비무장지대로부터 또는 비무장지대에 향하여 어떠한 적대 행위도 감행하지 못한다”고만 돼 있다. 심리전이 협정에서 금지하는 적대 행위에 포함되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당시 북한은 대북 확성기 방송에 대해 공식적으론 체제 비방을 하지 말라고 하진 않았다. 단지 최전방 접경지역 학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주민들이 수면을 취하지 못해 고통이 극심하다는 사정을 계속 말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1991년 8개 중대 국군심리전단 창설

전후 체제 경쟁이 심화한 1960년대 들어 우리 군은 대북 방송을 통한 심리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강원도 등 접경지역에서 인민군가를 트는 등 북한이 대남 방송을 적극적으로 벌이던 때였다.

KBS가 1962년 10월 경기도 화성에 최대 출력 500kW의 남양송신소를 세운 직후, 군은 라디오 FM 대북 방송 ‘자유의 소리’로 북한의 대남 방송에 맞불을 놨다. 접경지역 심리전은 그로부터 10년간 이어졌다.

잠시 평화가 찾아온 것은 1972년이다.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에 이어 같은 해 11월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에서 남북은 ‘대북·대남 방송 및 접경지역 확성기 방송 중지’와 ‘전단 살포 금지’에 합의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980년 9월 북한이 대남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고 당시 국방부 대변인이 발표하면서 대남·대북 방송 심리전은 재개됐다. 같은 해 5월 광주 항쟁을 두고 북한이 전두환 전 대통령 비방 방송을 했다는 것이었다.

우리 군은 1983년 3월 3개 대대 16개 중대로 육군심리전단을 재편한 데 이어 1991년 3월 육·해·공군 심리전 부대를 통합한 8개 중대 국군심리전단을 창설했다. 같은 해 12월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 합의’에 이어 이듬해 9월 남북화해 부속합의서에서 “남과 북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방송과 시각매개물(게시물)을 비롯한 그 밖의 모든 수단을 통하여 상대방을 비방·중상하지 아니한다”고 했지만 남북 간 심리전은 멈추지 않았다.

평화는 8년 뒤 왔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두 달 전 우리 군은 전단과 물품 살포를 중단했다. 6·15 남북 공동선언 후속으로 이어진 남북 장관급 회담에선 2004년 6월15일 자정부터 휴전선 근처 대북 확성기 방송과 발광다이오드(LED) 전광판 심리전을 중단하기로 했다. 우리 군은 휴전선 근처 94개소 대북 확성기와 11곳의 대형 전광판을 철수시켰다.

당시 회담을 총지휘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당시 북한은 대북 확성기 방송에 대해 공식적으론 체제 비방을 하지 말라고 하진 않았다. 단지 최전방 접경지역 학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주민들이 수면을 취하지 못해 고통이 극심하다는 사정을 계속 말했다”고 전했다.

65년간 반복된 비정상적 사태

그러다 6년만인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건 뒤 대북 심리전이 재개됐다. 대북 확성기 방송은 하지 않고, 라디오 FM 방송 ‘자유의소리’만 송출했다. 이어 군은 2010년 11월 북의 연평도 포격이 이어지자 10년 만에 전단과 물품 살포를 재개했다. 이듬해 2월까지 총 6차례에 걸쳐 300만여 장의 전단과 1만 점의 생활용품을 살포했다. 이는 2011년 2월 송영선 전 새누리당 의원이 국방부 자료를 인용해 발표하면서 알려졌다.

북한은 노동당 통일전선부를 중심으로 대남 심리전을 수행해오다가 2000년 남북 공동선언 뒤 전단 살포와 접경지역 대남 방송을 중단했다. 그러다 천안함 사건 이후 대남 심리전을 재개했다.

북한은 2011~2014년 강원도와 백령도 등지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찬양하고 국방부·새누리당·대통령을 비방하는 내용의 전단 수만 장을 살포했다고 2014년 10월 새누리당 손인춘 의원이 국방부 자료를 인용해 밝혔다. 우리 군이 지뢰 폭발 사건에 반발해 지난 8월10일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자 북한 역시 대남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

현재 국군심리전단은 2014년 4월부터 3개 중대로 재편해 총 300여 명이 속해 있다고 국방부는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밝혔다. 이들은 대북 방송 ‘자유의 소리’ 제작·송출, 그리고 심리전 장비 및 매체 개발·관리를 한다.

국군심리전단을 지휘하는 합동참모본부가 최근 진성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자유의 소리’ 방송 주제는 크게 4가지다. 그 내용은 자유민주주의 우월성 홍보, 대한민국 발전상 홍보, 민족 동질성 회복, 북한 사회 실상 홍보 등이다. 가수 아이유의 , 빅뱅의 과 같은 대중가요를 틀거나(민족 동질성 회복), 김정은 제1위원장이 취임 뒤 외국에 한 차례도 방문하지 못했다는 방송(북한 사회 실상 홍보) 등을 해왔다.

8월25일 남과 북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모든 확성기 방송을 이날 낮 12시부터 중단”하기로 했다. 뒤집어보자면, ‘비정상적 사태가 발생하면 언제든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방부는 이틀 뒤 “대북 확성기가 10년 이상 돼서 교체, 유지·보수의 필요성이 있어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65년간 반복돼온 ‘비정상적 사태’는 종식될 수 있을까.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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