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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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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불평등 ‘포텐’이 터졌다

“노인이 약하다면 더 빨리 퍼져야지” 악담하는 사람들, 보호장구 지급받지 못한 비정규직 청원경찰, 생계가 위협당해 스스로를 격리시키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
등록 2015-06-18 07:40 수정 2020-05-03 04:28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공포가 모두에게 똑같진 않다. 대부분의 사망자가 나온 고령층은 메르스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6월11일, 평소와 달리 한산한 서울 종로 탑골공원. 정용일 기자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공포가 모두에게 똑같진 않다. 대부분의 사망자가 나온 고령층은 메르스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6월11일, 평소와 달리 한산한 서울 종로 탑골공원. 정용일 기자

“마스크를 쓰십시다! 네 세트 1천원!”

6월10일 오후 4시30분, 서울 지하철 1호선 열차가 용산역을 지날 무렵, 마스크를 파는 노점상이 나타났다. 지하철에 있는 이들 가운데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은 노인보다 청년층이 오히려 많아 보였다. 노점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 한 분이 1천원을 건넸다. 그가 마스크를 사고 쓰는 사이에 지하철은 서울역을 지났다.

“오는 사람이 절반으로 줄었어요”

‘특징: 한번 발생하면 피해가 심각하고 회복이 어려워 예방과 빠른 신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하철을 나오다 마주한 포스터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발빠른 공권력이 아니지 않은가. 실은 혜화경찰서가 만든 ‘Wanted 공개지명 수배’ 포스터였다. ‘학교폭력, 가정폭력, 성폭력, 불량식품. 4대악 신고는 117입니다’. 불량식품 대신 감염병이 들어 있어야 맞았을 포스터 옆으로 다리를 절뚝이며 노인이 지나갔다. 종로3가 지하철역 1번 출구를 나와 탑골공원으로 향하자 노인들 행렬이 스쳤다.

“절반은 줄었어요, 엄청나게 줄었어요.”

이날 오후 5시, 팔각정 주위로 드문드문 앉은 이들을 보며 탑골공원 관리인들이 말했다. 메르스의 여파로 탑골공원에 나오던 어르신 수가 반으로 줄었단 것이다. 관리인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일주일 전부터 그랬어요.” “저녁 6시 (공원) 문 닫을 때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던 사람들이 지금은 별로 없잖아.” “단골 해장국집에 갔는데 장사 안 하는 줄 알았어. 전에는 줄 서서 먹었거든. 장사가 안 돼서 큰일이야.”

팔각정 주변에서 말을 걸었다. “어르신, 메르스 걱정 안 되세요?” “딸이고 손자고 나가지 말라고 그러지. 근데 집에 있으면 뭘 해? 여기 나와서 걷기라도 해야지.” “마스크는 안 쓰세요?” “가방에 있어. 근데 답답해서.” 올해 여든셋인 정진수씨는 “혈압이 높고 당뇨도 있지만 크게 걱정은 안 한다”고 말했다. “메르스로 희생된 노인이 많은데 걱정 안 되세요?” 재차 물어도 답은 같았다. “괜찮아. 정부의 초기 대응에 문제가 있었지만 이제는 잘하고 있잖아. 괜찮아.” 그는 뒷주머니에서 영화 광고 전단지를 꺼내며 말했다. “개봉이 6월이라고만 돼 있고 날짜가 없네.” 대화를 하다 눈에 들어온 그의 모자에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 배지가 붙어 있었다.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이들 곁으로 갔다. “메르스 때문에 취재를 나왔어요.” 말을 건네자 지팡이를 짚은 김민석(78)씨가 “공기로 전염되는 것도 아니고 손발 잘 씻고 다녀서 괜찮아”라고 말했다. 서넛이 둘러앉은 노인들 사이에 정부의 대응을 둘러싼 말들이 오갔다. “빨갱이들이 또 혼란을 부추겨!” 옆에 앉은 노인이 목소리를 높이자 김씨 어르신이 대꾸했다. “아니, 요즘 빨갱이가 어딨어?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메르스 불안에 대한 질문은 이내 얼굴 붉히는 논란으로 번졌다. “나는 좀 걸어야겠어.” 자리를 뜨는 김민석씨 손목에 ‘대통령 김대중’이라고 새겨진 시계가 보였다.

환자가 병을 찾아야 하니 ‘병원쇼핑’ 당연
정규직이 아니란 이유로 기초적인 보호장구도 지급받지 못하는 사례가 감염병 위기를 키우고 있다.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정규직이냐 하청노동자냐에 따라 차별받고 있는 것이다.

6월12일 현재, 메르스 사망자 11명이 나왔다. 확진자의 평균연령이 55살 안팎인 반면 사망자 11명의 평균연령은 71.2살이다. 80대 2명, 70대 5명, 60대 3명으로 6월1일 숨진 57살 여성을 빼면 모두 60대 이상 고령층이다. 25번째 환자였던 57살 여성도 천식, 고혈압, 의인성 쿠싱증후군(관절염에 의한 스테로이드 복용이 원인) 등 병력이 있었다. 이렇게 기저 질환이 있는 고령층이 메르스로 숨졌다. 한국 사회의 건강불평등은 메르스 사태를 통해 아킬레스건을 드러냈다. 문제는 건강약자 고령층이 반복되는 감염병 위기 때마다 희생양이 되는 양상은 메르스가 지나가도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메르스 노인 한 명 땜에 그런 건가요? 노인이 숨기고 병원 몇 군데 다녔다던데. 진짜 욕밖에 안 나와요.” “노인들이 메르스에 약하다고? 그럼 더 빨리 퍼져야지!”

포털 사이트 검색어로 ‘메르스 노인’을 치면 첫 화면에 뜨는 끔찍한 말들이다. 그렇게 노인은 메르스 사태의 최대 피해자이지만 또한 가해자로 비난받는다. 최초 환자가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의료 쇼핑’을 해서 메르스가 퍼졌단 원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동선을 곰곰이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의사인 우석균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1번 환자는 아파서 동네 의원에 갔다가 중소 병원에 갔다가 대형 병원에 갔다”며 “환자 스스로 병을 찾아야 하는 현재 의료 전달 체계에선 누구나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68살 1번 환자에 이어 75살 76번 환자가 논란이 됐다. 일부 종합편성채널은 ‘거짓말’이라는 선정적인 제목을 달았다. 그가 건국대병원에서 삼성서울병원에 갔던 사실을 숨겼단 것이다. 우석균 정책위원장은 “고령의 환자는 삼성서울병원에 갔다는 것이 중요한지도 몰랐을 것”이라며 “삼성서울병원이 이 환자에게 전화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전형적으로 추적 관리에 실패한 사례”라고 지적했다. 당시는 삼성서울병원이 감염병원으로 발표되기 전이었다. 이렇게 메르스 위기가 심화될수록 ‘피해자 책임전가’(Victim Blaming)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고령자는 전부 응급실 등 병원을 통해 메르스에 감염됐다. 만성질환이 있는 고령자가 심야나 휴일에 아프면 응급실에 가야 하는 의료체계가 메르스를 키우는 저변이 됐다. 변혜진 보건의료단체연합 기획실장은 “주치의 제도가 있으면 환자가 아플 때 언제든 의사에게 전화하고 상담받는다”며 “주치의 방문 제도로 만성질환자가 응급실에 가는 횟수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건강약자를 위한 의료체계가 구축되지 않아 기저 질환이 있는 고령자들이 더욱 감염병 위기에 취약하다.

1인 가구 생계지원 45만원은 충분한가
“신분이 불안한 이들에게 시민의식을 요구하려면 먼저 시민권을 주어야 한다. 약자의 약자인 동포 간병인을 비난하는 것은 대표적 피해자 책임전가.” (우석균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

대형 병원 문제도 메르스 위기를 키웠다. 6월12일 현재, 삼성서울병원에서 14번 환자에 노출돼 감염된 메르스 환자만 60명이다. 1차 진원지 평택성모병원 감염자보다 많다. 변혜진 기획실장은 “매머드급 병원이 매머드급 감염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 등 이른바 ‘빅5’ 병원이 군비경쟁을 하듯 병원 몸집을 키우고 환자를 유치하면서 ‘의료계 군비경쟁’(Medical Arms Race)이 빚어졌다. 삼성서울병원 외래환자는 하루 8천여 명, 서울대병원은 9천여 명에 이른다. 그렇게 전국에서 빨아들인 환자들을 통해 메르스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메르스 사태를 맞아 한국의 불평등 ‘포텐’이 터졌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청원경찰로 일하다 감염자와 접촉해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92번 환자는 병원으로부터 마스크 등 보호장구를 지급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대형 병원은 경비, 후송, 식당 등의 업무를 도급·위탁 업체에 맡기고 있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직종을 막론하고 같은 수준의 보호장구를 착용해야 하지만, 의료진과 정규직이 아니란 이유로 기초적인 보호장구도 지급받지 못하는 사례가 감염병 위기를 키우고 있다.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정규직이냐 아니냐에 따라 차별받고 있는 것이다. 변혜진 기획실장은 “메르스 감염은 하나의 체인처럼 엮여 있지만, 하청으로 병원 업무의 체인을 끊어서 예방도 못하고 추적조사도 놓쳤다”고 지적했다.

의료진이 아니라도 병원 노동자에게 충분한 수준의 보호장구가 지급돼야 한다. 그러나 비정규 노동자들은 메르스 감염이 두려워도 마스크조차 눈치를 보며 써야 한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의료진이 아니라도 병원 노동자에게 충분한 수준의 보호장구가 지급돼야 한다. 그러나 비정규 노동자들은 메르스 감염이 두려워도 마스크조차 눈치를 보며 써야 한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이번엔 이주노동자 문제가 터졌다. 지난 6월9일, 93번 환자로 확진된 중국동포 여성이 격리 조치를 어기고 서울 시내를 ‘활보’했다고 보도됐다. 동탄성심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했던 그가 격리병원을 벗어나 자신이 살던 동네를 돌아다녔단 것이다. 우석균 정책위원장은 “하루 벌이가 목숨 같고 가족 생계까지 책임지는 이들에게 ‘지금 증상은 없지만 격리될래, 일을 못해서 굶어죽을래?’ 묻는다면 누가 격리를 택하겠느냐”고 지적했다. 뒤늦게 나온 격리 대상 1인 가구 생계지원 45만원은 충분한 대책이 아니란 것이다. 우석균 정책위원장은 “신분이 불안한 이들에게 시민의식을 요구하려면 먼저 시민권을 주어야 한다”며 “약자의 약자인 동포 간병인을 비난하는 것은 대표적 피해자 책임전가”라고 지적했다.

지난 6월5일, 국립중앙의료원이 ‘메르스 중앙거점 의료기관’으로 지정되면서 이곳에 입원하고 있던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후천성면역결핍증(HIV·AIDS) 환자 13명이 다른 병원으로 가야 했다. 이들은 지난해 유일한 HIV 감염인 요양시설이었던 수동연세요양병원의 인권침해가 드러나면서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온 환자들이었다.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고 의사소통도 어려운 환자가 대부분이다. 권미란 ‘에이즈인권연대 나누리+’ 활동가는 “수동연세요양병원, 국립중앙의료원을 옮겨다닌 중증환자가 구급차 병상에 누워 가는데 말도 못하는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이렇게 감염병 위기의 불길은 이어져 결국 건강약자의 안전을 위협한다.

“우리가 정성을 다하면 된다는 거죠?”

“21세기 최초의 대유행병은 26개국에서 약 8500명을 감염시켰다. …인플루엔자처럼 사스도 노년층을 특히 좋아했다. 그들의 사망률은 50%가 넘었다. 반면 청년층의 사망률은 불과 7%였다. 어린이들도 거의 목숨을 잃지 않았다.”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위기를 다룬 마이크 데이비스의 저서 의 일부다. 이 책은 “한 해 평균 3만6천 명에서 5만 명이 인플루엔자로 인해 사망한다. …이들 대다수가 노년층(특히 빈민)이다. …주로 아이와 노인을 죽이는 전염병은 청장년층을 죽이는 질병만큼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반복되는 슬픔에 무심한 인물이 있다. “여기 계시다가 건강하게 다시 나간다는 것은 다른 환자분들도 우리가 정성을 다하면 된다는 얘기죠?”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월6일, 메르스 환자를 치료 중인 국립중앙의료원을 찾아서 한 말이다. 첫 환자가 나온 지 16일 만의 방문이었다. 국민의 불안을 달래려고 했다 쳐도, 적절치 못한 말이었다. “건강하게 다시 나가지” 못하는 국민은 안중에 없는 말이었다. 그의 지지 기반인 고령층이 정부의 메르스 대응 실패로 억울하게 숨지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다. 메르스 위기가 그의 지지층을 뒤흔들고 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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