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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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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교육감, 정치를 하라!

교육부와 익숙하고 지루한 싸움 이어온 진보 교육감, 이제 정치력 갖춰 시민과 함께 정부 압박하고 행동력 높여 긍정적 변화 이끌어야
등록 2015-05-27 05:19 수정 2020-05-02 19:28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선거 공약은 매우 선명했다. ‘자사고 폐지-일반고 전성시대’. 당선 뒤 조희연 교육감의 행보는 공약만큼 선명하지 못했다. 영훈국제중 지정 취소를 2년 유예했고, 자사고 지정 취소 적용 시기도 2016년으로 늦췄다. 지지층으로부터 실망을 샀다. 지난 5월7일에는 진보 쪽 교육단체 모임인 서울교육단체협의회가 조 교육감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영훈국제중 지정 취소를 2년 유예하기로 결정한 뒤다. “영훈국제중은 입시 부정 말고도 일반학교를 슬럼화하고 사교육을 초등학교까지 확산시킨 주범으로 지목돼왔다. 이번 결정으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핵심 공약이었던 일반학교 살리기 정책이 사실상 막을 내린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 1심 재판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아 이미 ‘흔들리는’ 그에게는 아픈 일이다.

진보 교육감 vs 교육부, 숱한 싸움
지난해 10월31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경희고·배재고 등 6개 자율형 사립고에 대한 지정 취소 방침을 발표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지난해 10월31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경희고·배재고 등 6개 자율형 사립고에 대한 지정 취소 방침을 발표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대표 공약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율형 사립고 폐지는 교육부의 제동에 걸려 답보 상태다. 지난해 10월 시교육청이 경희고·배재고 등 6개 자사고 지정 취소를 결정했지만, 교육부는 지정 취소 처분을 취소하라는 시정 명령을 내렸다. 그에 응하지 않겠다고 시교육청이 통보하자 교육부는 직권으로 서울시의 지정 취소 처분을 취소해버렸다. 지난해 12월 교육부는 애초 교육감이 자사고·특성화중·특목고를 지정하거나 지정 취소할 때 교육부 장관과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조항을 아예 ‘동의’를 거치도록 바꿔버렸다. 결국 남은 건 법정 싸움이다. 자사고 지정 취소 건은 대법원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다.

이 상황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2010년 동시지방선거가 시행되면서 숱하게 봐온 상황이다. 2008년부터 한국 사회는 보수 정부가 집권했고, 이후 두 차례의 교육감 본선거에서(당선무효 판결로 인한 재선거를 논외로 하면) 서울·경기 지역은 진보 교육감이 당선됐다.

교육정책에 대한 입장과 철학 차이는 법정 분쟁과 권한 다툼으로 이어졌다.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 시절엔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싸고 교육청과 교육부의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2012~2013년엔 학교폭력 가해 내용을 학생부에 기재할지를 놓고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있는 시·도교육청과 교육부가 힘겹게 싸웠다. 시국선언 교사 징계를 두고 벌어지는 시·도교육청과 교육부의 갈등도 여전하다. 서울시교육청과 교육부의 ‘자사고 설립 취소’와 관련한 법정 분쟁도 그래서 익숙한 한편 지루하다.

1차적인 잘못은 교육부에 있다. 교육 전문가들은 교육부가 교육감의 자사고 설립 취소 권한에 대해 법률 개정이 아닌 시행령 개정을 통해 편법적으로 개입한다고 비판한다. 김용일 한국해양대 교수(교육학)는 “학교 정책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교란할 수 있는 내용인데 법률 개정이 아니라 시행령 개정을 통해 하고 있다. ‘교육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는 헌법 31조 6항의 법률주의와도 어긋나는 위헌적 태도”라고 말했다. 국가기관에 법률 서비스를 지원하는 정부법무공단 역시 교육부에 ‘자사고 지정 취소는 교육청의 고유 사무’라는 취지의 법률 검토 의견을 전한 바 있다.

지지 확보하고 설득하는 정치력 절실

그러나 교육부와 법정에서 다투는 것 말고 자사고 등 특권학교 폐지라는 본인의 정책을 관철할 방법과 전략은 없는 걸까. 왜 진보 교육감들은 계속 정부에 ‘끌려다니는’ 느낌이 드는 걸까.

곽노현 전 교육감 시절 교육청에서 일했던 한 정책담당자는 “자사고 폐지는 현재 상황에서 ‘협의’든 ‘동의’든 교육부 장관의 지지 없이는 관철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이건 다 알고 가는 거다. 그렇다면 자사고 폐지를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여론으로, 다른 자료로 바깥에서부터 압박해 들어가는 여러 가지 실천적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고 말했다. 자사고 등을 지정 취소했을 때 교육부가 행정처분 등으로 제동을 걸 것을 알면서도 법정에서 해결하는 것 외에 다른 정책 실현 방법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김용일 교수는 “자사고 폐지 등 해당 정책을 시민에게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책을 수행할 때 지지 세력이 확보되고 시민들이 정책의 효능감을 적극적으로 느끼도록 하는 정치 과정의 관리가 필요한데 그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무상급식의 경우, ‘밥이 교육이다’ 등 무상급식이 의무교육의 일환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면서 정책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해당 정책 실현을 뒷받침했다. 자율형 사립고 등 ‘특권학교’의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일반고를 살리는 일의 효능감을 국민이 체감할 수 있게 하는 정치력과 다양한 기획력이 조희연 교육감과 그 참모들에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자사고 폐지를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여론으로, 다른 자료로 바깥에서부터 압박해 들어가도록 여러 가지 실천적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곽노현 전 교육감 시절 한 정책담당자)

근본적으로는 교육부와의 권한 설정을 새롭게 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성기선 가톨릭대 교수는 “지역의 어느 교육감이 ‘교육자치는 사기다’라고 말할 정도로 교육감의 권한이 교육부로부터 제약을 받는 영역이 많다”고 지적했다. 학교 설립·취소, 조례 제정은 물론 교육감의 독자적 영역으로 여겨지는 교육청 인사조차 교육부의 개입이 크다.

서울시교육청의 부교육감과 기획조정실장의 경우 교육부 장관의 제청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돼 있다(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 조희연 교육감 역시 이에 대해 지난해 10월 와의 인터뷰에서 “교육청에는 부교육감과 예산을 다루는 기획조정실장이 있는데 교육부 장관이 임명한다. 교육부가 지방자치를 허용하면서도 통제 장치를 둔 것이다. 제도적으로 언제든지 교육부가 (교육감의 권한을) 제약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산 역시 교육감이 자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폭이 미미하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2015년 서울시교육청 예산안 7조6901억원 가운데 인건비·복지비 등 반드시 써야 하는 경직성 경비는 6조9498억원으로 전체 예산의 90%를 차지한다. 혁신학교 등 정책을 추진하는 데 쓰는 예산은 7403억원에 불과하다. 육동일 충남대 교수(자치행정학)는 “교육부 장관과 교육감 사이의 권한 배분이 명확히 이뤄져야 하는데 지금은 중첩된 부분이 너무 많다. 그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보 교육감들 뭉치고, 움직여라!

교육감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법이 정한 권한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지난해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17개 시·도교육청 가운데 13곳에서 이른바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당선됐다.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의 절대다수를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차지하게 됐다. 자사고 축소 등 공동 공약도 내걸었다. 그러나 교육부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자사고 설립 취소에 대한 협의’ 조항을 ‘사전 동의’로 강화해도 반대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않았다.

송재혁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변인은 “지난 지방선거는 사실상 여당도 야당도 아닌 ‘진보 교육감의 승리’라고 불릴 만큼 진보 교육감이 많이 당선됐다. 그만큼 ‘입시 위주 경쟁 교육을 벗어난 교육’에 대한 기대감이 컸지만 진보 교육감이 많아진 뒤 달라진 게 무어냐라는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다”며 “진보 교육감들이 뭉쳐야 하는데 아무런 실력 행사도 하지 않고 있고 그로 인한 변화도 없다”고 지적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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