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문을 닫으면 기내의 모든 권한은 기장에게 있다(항공법 제50조 1항).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아무리 직장 상사라도 기장은 항공기를 탑승구로 되돌리는 ‘램프 리턴’을 거부할 수 있었다. 법률상 조 전 부사장은 승객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장은 ‘땅콩 리턴’을 결정했다. 국토교통부 조사에서 그는 “자체 판단”이라고 진술했다. 이같은 진술이 회사 쪽 지시에 따른 것일 수 있다고 보고 검찰이 조사 중이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사회학)는 “신분의식이 전형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라고 분석했다. “돈의 힘으로 모든 사람을 하인으로 만들고 끊임없이 군림하면서 굴복시켰다. (조 전 부사장은) 그 위에서 자기 존재 이유를 찾은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월급쟁이는 돈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돈을 벌기 위해 자기 인격 자체를 스스로 부정해야 했다.”
지난 한 세기에 걸쳐 한국의 전통적인 신분제도는 빠르게 무너졌다. 그러나 그것은 자각적인 청산이 아니었다. 신분제도에 억눌려 있던 하층민의 도발도, 구체제를 개혁하려는 엘리트의 반성도 없었다. 식민지배와 전쟁, 산업화 물결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낡은 질서가 깨져나갔을 뿐이다. 권력이나 사회구조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논쟁이 없었기에 겉으로 보이는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신분의식은 온전히 우리 사회 속에 남았다. 철저한 서열의식과 귀천 관념,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짓밟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심보가 끈질기게 이어지는 이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그 절대적 기준이다.
분노만으론 사회를 바꿀 수 없다
갑의 못된 횡포인 ‘갑질’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극소수 주류층이 제 잘난 맛에 떵떵거리며 절대다수의 국민을 무시하고 조롱한다. 승객의 안전은 아랑곳없이 ‘땅콩 리턴’을 감행한 조 전 부사장이 대표적이다. 추악하고 비열한 갑질을 당해온 을들은 이 사건에 크게 분노한다. 사회학자 오찬호 박사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갑을 관계가 더 포악스럽게 변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일상에서 인지한다. 취업준비를 하며 직장생활을 하며 항상 짓눌려 있으니까 억울하다고 느낀다. 일부에선 예전에도 그랬고, ‘오십보백보’라고도 말하지만 을의 체감은 그렇지 않다. 오십보백보는 별반 차이가 없는 게 아니라 엄연히 두 배로 힘들어진 것이니까.”
차츰 공론화가 이뤄지면서 상식이 작동했다고 김찬호 교수는 진단했다. “매 맞는 아내나 아이들은 집 안에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힘을 움켜쥔 남편이 집 안에서는 곧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정폭력이 만천하에 드러나면 보편적 이성, 상식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 (땅콩 리턴 사건도) 세상에 알려지면서 물질적으로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이 부당함을 발언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부조리한 권력이 드러나면 맞서거나 개선을 도모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땅콩 리턴 사건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우리 사회에서 세습 자본주의를 바꾸자는 개혁 의제는 좀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80대 택시 기사의 4억원 변상을 면제했다는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일화와 비교하며 조현아 ‘개인’을 질타할 뿐이다. 문제의 원인은 ‘개인’에게 있고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개인의 변화라는 자기계발 이데올로기가 뿌리 깊이 박혀 있어서다. 오찬호 박사는 “분노만으로는 잘못된 사회구조를 개선할 수 없다”고 했다. “성찰이 필요하다. 사회철학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개선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데 우리는 분노해서 한 사람만 책임지게 한다. 그것으로 해결이라고 본다.”
갑질 당한 을의 더 포악한 을질
깊은 성찰이 없는 사회에선 부조리한 구조와 억압이 더욱 공고해진다. 갑질을 당한 을이 자신보다 약한 병에게 더 포악한 을질을 해대는 것이다. 병 또한 약한 정에게 갑질·을질을 확대해나간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더러우면 성공하라’는 말이 그런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아이들은 장차 대부분 노동자가 될 것이다. 화이트칼라든 비정규직이든 노동자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아이들이나 부모 대부분은 노동문제를 자신과 관계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두 경영자가 될 것처럼 군다.”
-하종강 성공회대 교수
갑질하는 이유를 사회심리학자 김태형 박사는 두 가지로 설명했다. 우선 남들한테 무시당하거나 무시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치열한 경쟁사회, 그것도 승자독식 경쟁사회다. 사람들은 열등감 혹은 무시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어느 정도 돈을 벌거나 출세를 하면 두려움이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30명 중에 2등을 하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 같지만 그는 1등과 비교하며 괴로워한다. 이렇게 항상 자기보다 앞선 사람을 의식하고 그와 평등해지길 바란다.
그럼에도 자기를 무시한 갑에 대한 분노를 갑에게 표출하지 못할 때가 있다. 권력이나 돈, 지위 탓이다. 그러면 엉뚱한 병을 무시하는 을질이 튀어나온다. 서비스 업체 직원이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격앙하는 소비자, 하급자가 깍듯하게 떠받들지 않는다고 호통치는 고위 공무원들이 그렇다. 남에게 받은 경멸을, 남을 학대함으로써 보상받으려 한다. 위로는 평등주의를, 아래로는 차별주의를 외치는 셈이다.
‘대학 서열 중독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부 대학생은 전국의 200개 대학을 일렬로 세워놓고 대학 서열을 매긴다. 서열이 한두 개 차이 나는 대학을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분노한다. 오찬호 박사는 “대학생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고 말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거리를 두며 스스로 잘났음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직업에도 서열이 분명하다. 2012년 고용노동부와 교육과학기술부가 한국직업능력개발원과 공동으로 고등학교 교과서 7개 과목 16종을 분석해보니 직업에 대한 귀천 관념을 심어주는 표현이 상당히 많이 발견됐다. 전문직을 기술한 빈도가 높고 긍정적 묘사가 주를 이뤘다. 반면 단순노무직, 판매직, 기능직, 농·어업 종사자는 비중도 낮고 부정적으로 묘사됐다. 하종강 성공회대 교수는 “우리 아이들은 장차 대부분 노동자가 될 것이다. 화이트칼라든 비정규직이든 노동자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아이들이나 부모 대부분은 노동문제를 자신과 관계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두 경영자가 될 것처럼 군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정규직 노동자가 되면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노동자와 선을 긋고 경영자 편에 서게 된다. 각자도생하는 개인들은 무력감 탓에 힘센 대상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짙어서다. 그러면 힘을 모아 세상의 잘못된 점을 바꿔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요원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연대와 결속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넘어서려면 연대와 결속이 필요하다. 김찬호 교수는 “부당한 일을 지속적으로 겪는 사람들이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면 상황을 직면할 용기가 생겨난다”고 했다. 그 물꼬를 조 전 부사장 ‘갑질의 피해자’ 박창진 대한항공 사무장이 트고 있다. 그는 KBS와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대한항공의 증거인멸을 고발했다. 특히 앵커가 “대한항공 재직을 원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많은 고통과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을 거라 예상하지만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자존감을 찾기 위해서 스스로 대한항공을 관두지는 않을 것이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 참고 문헌 (김찬호·2014), (오찬호·2013), (김태형·2013), (박노자·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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