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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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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너마저…

나쁜 판결 간 경쟁 심했던 한 해, 하급심에서 의미 있는
판결 있었지만
대법·헌재 스스로 보장된 독립성 지키지 않는 모습 보여
등록 2014-12-19 09:11 수정 2020-05-02 19:27
지난 12월2일 저녁,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 9명이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 모여 최종 선정작을 추려내기 위해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지난 12월2일 저녁,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 9명이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 모여 최종 선정작을 추려내기 위해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대략 ‘더’ 난감.

2014년 올해의 판결 심사는 ‘대략 난감’으로 표현된 지난해보다 더 암담했다. 사법부는 헌법을 유린한 국가정보원엔 면죄부를,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에겐 한 맺힌 눈물을 주었다. 올해의 판결 후보작 81건에도 생존권과 정치적 자유가 거듭 위협받는 현실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한파가 몰아친 12월2일 저녁 심사위원 9명이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8층 회의실에 모였다. 심사위원장인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비롯한 9명의 심사위원들은 올해의 판결을 선정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열띤 토론을 거듭했다. 예년과 다르게 사회적 채찍질이 필요한 ‘나쁜 판결’에 대한 논의가 먼저 시작됐다. 후보작 25건 중 심사위원 모두에게 추천을 받은 문제적 판결이 있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판결이다.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정치 개입’을 한 것은 맞지만 ‘선거 개입’을 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이광수(이광수법률사무소 변호사·이하 이): 국정원장 공직선거법 무죄 사건에서 핵심은 ‘선거운동’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는 점이다. 구체적 사건에서 어느 것이 선거운동에 해당하고 어느 것이 해당하지 않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저 ‘선거운동’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행위가 이루어진 상황과 연관시켜봐야 한다. 재판부는 노무현 대통령이 총선에서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 발언을 한 것을 선거운동으로 볼 수 없다고 한 헌법재판소 판단을 끌어왔다. 그러나 수백 명을 선출하는 총선과 여야 후보가 특정돼 경합하는 대선에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최은배(법무법인 엘케이비앤파트너스 변호사·이하 최): 대선 기간에 국정원이 댓글을 다는 방법으로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면 국정원법상 정치 관여 행위가 성립된다. 아울러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임과 동시에 ‘선거운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 상식에 부합한다. 양형 면에서도 아쉬움이 있다. 국정원 수장이 정치에 관여한 사실만으로도 실형을 선고해 민주주의를 왜곡시키는 행위에 경종을 울렸어야 했으나 집행유예 판결을 했다.

문병효(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하 문): 검찰이 수사를 제대로 했어야 한다. 검찰총장까지 물러난 상황에서 사실관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축소된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판사는 사실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일반 시민들은 납득하지 못하고 법률 전문가들만 납득할 수 있는 판결은 결국 좋은 판결이 아니다.

일반 시민은 납득하지 못한 국정원 사건 판결

하태훈(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하 하): [쌍용차 정리해고 판결도 많은 분들이 추천했다. 서울고등법원 판결은 좋은 판결 후보에, 이를 파기환송한 대법원 판결은 나쁜 판결 후보에 올라와 있다.]

: 약자 보호와 인권 옹호 관점에서 볼 때 경영상 해고를 정당하다고 인정하기 위한 요건을 엄격히 해석해야 한다. 대법원이 사용자 처지를 지나치게 우호적으로 여기고, 근로자 생계는 무겁게 고려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대법원에서 파기됐다 하더라도 정리해고를 무효라고 본 2심 판결 역시 판사의 생각이 담긴 판례다. 좋은 판결로 올려 항의의 메시지를 전하면 어떨까 했다.

: 개인적으로 쌍용차 대법원 판결을 나쁜 판결로 꼽지 않았다. 한쪽에서 좋다고 평가받는 판결이 또 다른 쪽에서는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판결을 ‘좋다, 나쁘다’로 구분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노동계로서는 매우 섭섭한 판결이겠지만, 법리적으로만 보자면 고등법원처럼 볼 수도 있고 대법원처럼 볼 수도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 긴급조치 9호에 따른 수사나 재판을 불법이라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은 어떤가.

장완익(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이하 장): 긴급조치 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나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 대법원은 당시 법에 따라 사람을 끌고 가 고문한 경우 가혹 행위 자체는 불법이지만, 끌고 간 행위는 불법이 아니라고 보았다.

: 국가의 잘못에 대해 재심을 통해 명예를 회복시켜주기는 하지만, 당시 수사관들이 무슨 죄가 있었겠느냐는 시각이다.

: 그렇게 보면 나치의 명령에 따라 불법행위를 한 공무원들은 처벌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오정진(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하 오): ‘DNA 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합헌 결정은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개개인의 신체적 주권이 어떻게 박탈당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강제적 셧다운제처럼 무조건적 통제에 대해 합헌 결정이 계속 나오는 건 불운한 일이다.


“양형 면에서도 아쉬움이 있다. 국정원 수장이 정치에 관여한 사실만으로도 실형을 선고해 민주주의를 왜곡시키는 행위에 경종을 울렸어야 했으나 집행유예 판결을 했다.” -최은배 변호사


김성진(사단법인 선 변호사·이하 김): 분야 안배 차원에서 경제 이슈를 나쁜 판결에 포함시키면 어떨까 한다. 초과 베팅을 묵인한 강원랜드에 대해 대법원이 면책 판결을 내렸다. 아버지가 도박에 너무 빠져 아들이 도박을 못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강원랜드가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1·2심에서는 강원랜드의 잘못을 일부 인정했다. 도박 중독 폐해에 대한 고민 없이 ‘도박을 한 사람이 잘못이다’라는 통념에 기반해 내린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 [분야를 고려하다보니 나쁜 판결을 5건만 꼽을 수가 없다. 최종 7건을 선정하는 것으로 정리하자. 좋은 판결을 선정할 차례다. 추천 수는 적었지만 논의해봐야 할 판결을 꼽아달라.]

골프장 사업자에게 ‘내쫓을 권리’는 없어

정남순(환경법률센터 부소장·이하 정): 골프장 민간 개발자에게까지 토지수용 권한을 주는 조항을 문제 삼은 헌재의 결정이 꼭 좋은 판결에 들어갔으면 한다. 대형 개발사업을 ‘공공’의 이름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차를 다 지키기 때문에 법적으로 손쓰기가 어렵다. 공공 개발을 한다며 몇십 년 살던 지역 주민들을 내쫓는 거다. 관광특구 개발 이런 사업도 주민을 내쫓고 사업자 권한만 보장한다. 골프장에 한정돼 있긴 하지만 의미 있는 판결이다.

: 헌재 결정 중 하나를 꼽으라면 나도 이 판결을 꼽고 싶다.

: 한센인에 대한 국가배상 파결을 어떻게 보나.

: 한센병이 전염된다며 한센인에 대하여 국가가 단종·낙태를 시행했다. 그나마 특별법이 제정돼 진상규명위의 피해자 결정 통지 이후로 소멸시효 시점을 봤기 때문에 국가의 책임이 인정된 사례다. 과거 부산 형제복지원에서도 감금 등 인권침해가 있었지만, 소멸시효 문제 때문에 소송을 못하지 않나.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서도 특별법 제정 운동이 있다.

박진(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이하 박): 우리 사회에서 성소수자 혐오가 확산되고 있다. 한센인 사례처럼 국가폭력에 의한 소수자들의 희생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 한센인 판결보다 이동통신요금 원가 공개 판결, 한-일 군사정보보호 협정 공개 판결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 공공기관이 정보공개를 거부하는 사유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영업 기밀과 국가 안전 보장이다. 말씀하신 판결엔 두 가지 사유가 다 들어가 있다.

: 굳이 둘 중 하나를 꼽으라면 한센인 판결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이동통신 원가 공개만으로는 요금 인하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한계가 있고, 공공기관의 정보공개 거부를 법원에서 깬 사례가 많다. 한센인 판결은 소멸시효 시점을 새로 계산했다는 면에서 좀더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 강기훈 유서 대필 재심 무죄 선고는 기간으로만 따지면 나쁜 판결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사실관계가 드러나 있는 걸 이제야 확인한 거니까.

: 법원이 버티고 버티다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칭찬할 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다.

: 한센인 판결을 이야기하면서 과거 국가폭력과 관련해 강기훈씨 사건도 언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뒤집어질 수 있기에 값진

: [좋은 판결 중에서 올해 표지를 장식할 최고의 판결을 꼽아야 한다. 추천 수가 가장 많은 건은 원자력발전소 방사선 노출과 갑상선암 발병의 상관관계를 인정한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판결이다.]

: 여기 오기 전에 삼성 반도체 산재 판결을 1등으로 만들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해에도 선정이 됐더라. 어쨌든 올해는 세월호 참사나 안전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고리 원전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으니 이 판결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 원전 판결은 상급심에서 뒤집어질 수 있다. 그래서 값진 판결이 될 것이다. 논쟁 지점이 많은 판결이지만, 쉬쉬한 문제를 공론화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최고의 판결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원전이 굉장히 위험하지 않나. 한국 사회의 기술 맹신주의가 깨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 정부가 원전을 더 짓겠다고 하는 상황이니까 이러한 정책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기 위해선 이런 판결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 공정 방송을 위한 MBC의 파업을 정당하다고 본 서울남부지법 판결을 추천한다. 현 정권에서 가장 위협받는 부분이 표현의 자유다. 경종을 울릴 수 있는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통고 처분 근거인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교원노조법) 제2조에 대해 법원이 나서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한 것도 의미가 있다

: 교원노조법 위헌 제청은 ‘이건 좀 아니다’라는 부분을 법원이 나서서 문제제기를 한 것이라면, 원전 판결은 보통 법률가의 판단을 뛰어넘은 거 아닌가. 한 표를 행사하라면 후자를 꼽고 싶다.

: 최고의 판결은 꼭 하나만 꼽아야 하는 건가. 방송사 파업을 정당하다고 본 판결은,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후퇴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 표명이 될 것 같다. 원전 판결에는 안전한 에너지 정책이 필요하다는 미래지향적 내용이 들어 있다. 두 가지를 다 잘 엮어서 쓰면 안 될까.

강자의 힘에 자꾸만 기우는 사법부

: [원전 판결엔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듯하다. 올해 사법부 판결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나는 ‘사법부 너마저’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삼권분립 원칙을 사법부조차 지키지 못한 것 아닌가 싶다. 사법은 선출되지 않은 힘이기에 강자의 권력에 기울어서는 안 되는데 그쪽으로 향하는 것 같아 우려된다. 대법원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지 않다.]

: 소수자, 사회적 약자, 노동 분야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많이 아쉬웠다. 여성, 비서울대, 재야, 소수자 및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분들이 대법관으로 많이 들어갔다면 올해처럼 우울한 판결이 많이 나왔을까. 유럽에도 대법원장이 있긴 하지만 판사들이 잘 재판하도록 지원하는 역할이다. 우리는 인사권 등 사법행정이 너무 한곳에 집중돼 있다. 고등법원장이나 지역별로 인사권을 분산시킨다든지 외부 인사 참여, 위원회 제도 등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 우리가 뽑은 판결을 보면 환경, 노동, 정치, 표현의 자유, 강자와 약자의 관계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너무 심각하다. 판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헌재나 대법원의 인적 구성을 보면 불공정한 결과를 예상할 수 있다. 헌재는 재판관이 9명인데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뽑고, 대법원장이 다시 재판관 3명을 추천한다. 독일처럼 국회 구성에 따라 재판관을 추천한다든지 최소한 헌재를 바꿀 수 있는 조처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 2년 연속 심사에 참여했는데 올해는 지난해보다 나쁜 판결 심사 논의가 길어졌다. 나쁜 판결 간 경쟁이 심각한 한 해였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나쁜 판결을 보면 대법원·헌재 판결이 많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이나 헌재가 소수자 권리 보호라는 사명을 소홀히 한 것 아닌가 싶다.


“사법부에 대한 기대가 없지만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게 중요하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올바르게 가고 있지 않다는 위험신호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 국가폭력을 행사한 주체가 잘못을 바로잡기 바랐는데 정부는 꼼짝도 안 하고 사법부는 계속 후퇴하고 있다. 사법부가 정부보다 정부를 더 위해주는 거 아닌가.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다시 국회로 가고 있다. 정부나 국회가 할 일이 있고 사법부가 할 일이 있는데, 이러한 기대가 완전히 무너진 한 해가 아닌가 싶다.

: 좋은 판결과 나쁜 판결을 가려내다보니 나쁜 판결을 골라내기는 쉬웠고, 좋은 판결을 골라내기는 어려웠다. 인권이라는 가치는 그 보편성을 인정받을 수 있음에도 우리 사법 현실에선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소수자 인권 보호에 애쓴 사법부에는 무한한 존경을 표한다.

: 나는 좋은 판결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환경 관련 소송을 많이 하는데 번번이 지다보니 법원에 기대할 게 있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좋은 판결이 많구나 싶었다. 대법원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지만 최소한 하급심에서 숨통을 틔워주는 판결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기대는 없어도 기댈 수밖에 없는

: 여기 계신 분들은 누군가를 변호하지만, 나는 내 사건으로 무수한 재판을 받았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판결을 보면서 사법부는 정의로운 심판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법부가 정의로운 심판자이기를, 우리 사회는 간절히 원한다.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지금까지의 억울함이 모두 풀린 듯 눈물을 흘렸다. 사법부에 대한 기대가 없지만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게 중요하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올바르게 가고 있지 않다는 위험신호다. 사법부가 이러한 위험신호를 알아봐주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주면 좋겠다.

: 모든 문제가 법원에서만 논의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법원은 마지막 희망이다. 사법부가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판단해주면 좋겠고, 부당한 건 더욱 강건하게 부당하다고 해주면 좋겠다.

정리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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