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공단을 둘러본다. 어디에도 과거의 흔적은 없다. 구로공단의 상징이던 굴뚝공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은 이름이 바뀌어 가산디지털단지역이 된 가리봉역을 제외하고는 3공단에서 2공단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길이던 ‘수출의 다리’는 빽빽한 빌딩 숲 사이에 가려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굴뚝공장 시절 이 다리 위에 서면 2공단과 3공단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끔 이 다리 위에 서서 회한에 젖곤 했는데 이젠 그런 가벼운 감상마저 끼어들 틈조차 없는 냉혹한 자본의 빌딩 숲에 가려져버리고 말았다.
파업 20주년 행진 때의 그렁그렁하던 눈수출의 다리를 넘으면 만나는 2공단 사거리변은 서울의 대표적 패션타운가로 변해 있다. 마리오아울렛이 있는 자리가 효성물산, 건너편 대우어패럴 자리는 현대아울렛이 들어섰다. 1985년 분단 이후 최초의 노동자 동맹파업이 일어났던 곳. 당시 43명이 구속되고 2천여 명이 공장에서 쫓겨났다. 이들을 변론하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현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기도 하다. 공장에서 쫓겨나온 이들의 한 축이 모여 노동자 정치운동의 첫발이기도 했던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꾸리기도 했고, 서노련의 정치투쟁 노선을 비판하며 현장 활동을 중시했던 이들이 서울노동조합운동연합, 이후 서울남부지역노동자연맹(남노련) 등에 함께하기도 했다. 현장노동자들 대다수는 다시 무수한 현장으로 들어가 한국 사회 민주노조 건설의 주축이 되어 1989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건설의 산파가 되었다. 2005년 구로동맹파업 2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위원회를 꾸리고 그들과 다시 만나 20년 만에 가리봉오거리를 행진해갈 때 그들 눈에 그렁그렁하던 굵은 눈물방울을 잊을 수 없다.
“공장 안에서 내 이름은 ‘스테이박기’에서 ‘애리후세’로 바뀌어 있었고, 내 친구 경희는 ‘밑단아’라고 불리었고, 송정 살던 친구는 ‘애리달이야’로 불렸다. 현장에서 우리들은 이름 대신에 자신이 맡은 공정으로 불렸다. 소매달이, 카우스달이, 30년 지기 친구인 지연이는 ‘애리달이’였다. 밖에서 우리들을 ‘수출의 역군’이라고 불렀을지라도 그것은 대우실업 사장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지, 우리는 이름도 없었고 심지어 사회에서는 ‘공순이’로 불리며 공장에서 생산매수를 빼는 기계 부속에 지나지 않았다. …한번은 땀띠가 곪아 원단 가루가 달라붙어 너무 아파 회사에 가던 길에 나도 모르게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날 다시 자살을 기도했다. -(유경순 엮음), ‘나는 노동자, 노동자 세상을 만들기 위해’ 중에서, 김준희(대우어패럴)
2공단 사거리를 지나면 바로 가리봉오거리다. 줄여 ‘가오리’라 부르기도 했고, 일확천금의 내일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꿈과 애환이 서린 애칭으로 ‘가리베가스’라 불리기도 했던 공단 생활의 중심지였다. 죽음과도 같은 공장을 벗어나 한 번만이라도 집단적으로 진출해보고 싶었던 해방의 거리이기도 했다. 도로변에 있던 ‘모세미용실’을 점거해 구속된 노동자 학생들이 있었고, 거리투쟁 10분 만에 모두 연행돼 끌려갔던 노동자들이 있었다.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월급날이면 500원을 주고 들어가 밤새 놀곤 했던 나이트클럽은 없어진 지 오래다. 이 근처에 공단 내에 유일한 책방이던 ‘공단서점’이 있었고, 우리의원과 구로의원, 푸른치과 등이 있었다. 한때 이곳 공단에 위장취업한 일명 ‘학출’만 3천여 명에 달한다고 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좌절되고 5·18 광주민중항쟁이 짓밟히며 각성한 수많은 이들이 기층민중 조직화를 위해 이 공단으로 왔었다. 그들 모두에게 가리봉오거리는 잊을 수 없는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을 것이다. 오거리로 들어왔다가 다시 떠나간 수많은 이들에 의해 한국 사회 민주주의는 조금씩 성장해나갔다. 가리봉시장으로 가기 전에 잠깐 그전 조이커피숍이 있던 골목을 끼고 돌아 지금도 서울남부금속노조가 세들어 사는 속칭 ‘목욕탕 건물’을 올려다본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단체들의 공개 활동이 가능해진 무렵부터 지금까지 구로공단 민주단체 활동의 한 거점이 되었던 건물이다. 이곳에 구로노동연구소와 옷을 만드는 사람들, 구로청년회, 구로노동자문학회, 박영진·김종수 열사 추모사업회, 삶이 보이는 창 등 다양한 단체가 함께 이웃이 되어 살아왔다. 밤새워 노래가 끊이지 않던 곳. 그 많던 벗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가리봉시장을 찾아/ 친한 친구랑 떡볶이 500원어치, 김밥 한 접시/ 기분나면 살짜기 생맥주 한 잔이면/ 스테이크 잡수시는 사장님 배만큼 든든하고/ 천오백원짜리 티샤쓰 색깔만 고우면/ 친구들은 환한 내 얼굴이 귀티난다고 한다/… /앞판 시다 명지는 이번 월급 타면/ 켄터키치킨 한 접시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고/ 마무리 때리는 정이는 2800원짜리/ 이쁜 샌달 하나 보아둔 게 있다며/ 잔업 없는 시장가자며 손꼽아 기다린다 -박노해 ‘가리봉시장’ 중에서
새벽 포구처럼 등을 환하게 달았던 시장오거리에서 1공단 114번 구종점 쪽으로 향하면 곧바로 만나는 곳이 가리봉시장이다. 공단 노동자들이 야근을 마친 뒤, 혹은 휴일날 비로소 힘겨운 노동에서 벗어나 잠깐 동안의 휴식과 여유를 얻던 곳. 기껏해야 떡볶이나 국수 한 그릇, 순대 한 접시였지만 그 꿀맛을 누구도 잊지 못하는 곳. 아끼고 아껴 궁색한 살림살이나 생활필수품 한두 가지를 겨우 사던 곳. 한잔 술에 겨워 울분을 토하고 날이 새도록 앉아 노동자에 대해,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하던 곳. 애틋하고 가난한 사랑의 눈길이 몰래몰래 마주치던 곳. 새벽 포구처럼 어선들의 등처럼 주렁주렁 등을 매달고 그 좁은 거리를 환하게 비추던 순대곱창집도 모두 문을 닫고 ‘호남곱창’집 하나만 남았다.
초등학교를 간신히 마치고 올라온 어린 여성노동자로 가득 찼던 가리봉시장을 이젠 조선족 이주노동자가 지키며 살고 있다. 구로공단 주변에만 5만여 명이 산다고 한다. 명절 다음날이라 일 나가지 않는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근처 쪽방에서 나와 볕을 쬐며 앉아 있는 사람들. 길바닥에 펼친 장기판이나 바둑판 주위로 빙 둘러서서 훈수를 두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잠시의 평화가 깃들어 있다. 그들의 처지는 1970년대 청계천의 전태일이나, 1980년대 구로공단 노동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른 게 있다면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주목하지 않고, 그들에게 이 사회의 가장 힘겨운 노동을 떠맡기면서도 그들을 국외자로 취급해 양심의 눈을 닫는다는 것뿐일지 모른다.
‘벌집’ ‘벌방’ ‘닭장집’… 주인만 바뀐 기억의 공간그 고가 너머 한 닭장집 지하 끝방에 살았다 보증금 50에 월세 8만원 바퀴벌레와 쥐벼룩이 혼거하던 방 슈퍼집 외상 장부에 씌어지던 라면과 부탄가스…. 여덟 개의 칸막이 닭장 위에 툭 트인 안방과 마루를 가진 주인 여자는 가끔씩 방문 앞에 서서 가지 않았다, 월세를 내지 않으려면 너의 젊음을 내놓으라는// 그 방에서 때론 네 명이 부침개를 해먹고, 다섯 명이 술잔을 돌리고, 여섯 명이 자기도 했다 나는 그 지하에서 맑스와 레닌과 모택동과 호찌민과 중남미 혁명사와 한국 근현대사를 월경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유했다 그러다 지치면 살갗이 벗겨지도록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수음을 했다 -졸시 ‘이 삶의 고가에서 잊혀질까 두렵다’ 중에서구로공단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의 공간을 들라 하면 ‘벌집’ ‘벌방’ ‘닭장집’ 등으로 불리던 노동자들의 생활공간이다. 2평 정도면 크던 곳. 잔업·철야를 밥 먹듯 해서 받는 월급이 7만~8만원이던 시절, 보증금 30만원에 월세 3만원 정도 하던 방들. 하지만 그조차 공단 초기 군대 막사보다 못하고 생활의 자유가 없이 무슨 수용소처럼 운영되던 공장 기숙사를 벗어나 독립된 공간을 가져보고 싶던 이들에겐 꿈의 공간이기도 했다. 어느 닭장집이나 지린내가 가시지 않았는데, 늦은 밤 변소 가기가 귀찮은 이들이 방문 앞에 달린 현관 겸 부엌의 수챗구멍에 볼일을 보는 게 일상 문화였기 때문이다. 이 작은 방마저 혼자 얻기 힘들어 여럿이 함께 자취생활을 하기도 했다. 근무시간이 다른 이들끼리 모여 얻는 식이었다.
가리봉시장 근처엔 아직도 이런 벌집이 많아 둘러본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문을 활짝 열어놓은 방이 많다. TV를 켜두고 한여름의 달콤한 낮잠에 든 사내들이 보인다. 여성들이 사는 방은 그나마 싼 플라스틱 발로 안이 보이지 않게끔 해두었다. 스물일곱 개의 방이 원형감옥처럼 좁은 마당을 향해 나 있는 집이 있고,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해 불을 켜둔 지하방도 보인다. 그곳 어딘가에 다시 ‘잃어버린 순이’를 찾는 황석영이 있을지도 모르고, 을 쓰고 있는 신경숙이 있을지도 모르고, ‘동트는 새벽’을 꿈꾸었던 공지영이 있을지도 모르고, ‘노동의 새벽’을 꿈꾸었던 박노해가 있을지도 모르고, ‘파업’과 ‘활화산’을 꿈꾸었던 안재성과 이인휘가 있을지도 모르고, 다시 ‘취업공고판 앞에’ 선 박영근이 있을지도 모른다. 인종과 피부색을 넘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꿈꾸는 백무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김문수가 원희룡이 손학규가 박원순이 유시민이 심상정이, 다른 박영진과 김종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의 다른 김소연과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정의가 창궐하는 무권리의 살인 공단얼마 전 ‘구로공단역사기념사업회’를 발족한다고 참석해달라는 전화가 왔지만 참석할 수 없다고 했다. 아직도 진행 중인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현재에 대해 눈감고 공단의 어제만을 박제화해서 기념하려는 뜻에 동참할 수 없어서였다. 2000년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재개발되면서 회생한 공단은 현재 입주기업 수 2만여 개에 고용 규모는 구로공단이 한창 번성하던 시절보다 더 늘어 16만여 명에 달한다. 세련된 공장형 빌딩과 패션타운이 들어서고 정보기술(IT) 기업이 전체의 80%에 육박하는 새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90%를 넘는 노동자들이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고, 노동조합 조직률은 2%에도 못 미쳐 대부분이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노동자들에게는 온갖 부정의가 창궐하는 노동자 무권리의 살인 공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더욱 수만 명에 이르는 이주노동자가 1970년대 대한민국을 다시 살고 있지만 그 불의에 눈감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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