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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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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의 균열 이스라엘의 발악

제국주의 시대 극우 유대인이 고안하고 미국의 전략적

보물이 된, ‘시온주의’의 인공적 피조물 ‘이스라엘’의 역사
등록 2014-08-13 08:30 수정 2020-05-02 19:27

도대체 왜 가자지구에 대한 학살과 봉쇄는 계속되는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하마스 시설을 타격한다는 것은 대놓고 가자지구 민간인을 죽이겠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인구를 박멸하겠다는 것이 아니고서야 이스라엘의 학살극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근본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성서 시대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시리아’라고 하면 현재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전 지역을 가리켰다. 그중 팔레스타인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의 성지가 있는 곳이었다. 예루살렘(이스라엘), 카이로(이집트), 다마스쿠스(시리아), 베이루트(레바논), 라바트(모로코), 바그다드(이라크)에서 유대인과 아랍인은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였다.

영국의 이익을 보호해줄 동맹국

지난 7월29일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은 가자지구의 동쪽에서 포연이 피어오르고 있다. 이스라엘과 구미 제국주의의 이해관계 속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지난 7월29일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은 가자지구의 동쪽에서 포연이 피어오르고 있다. 이스라엘과 구미 제국주의의 이해관계 속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1849년 영국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을 잇는 요충지 아덴(남예멘의 수도)과 알제리를 장악하면서 중동과 아프리카에 식민화 물결이 들이닥쳤다. 프랑스와 러시아도 이 물결에 합류했고 후발 산업화로 승승장구하던 독일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1916년 4~5월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는 사이크스-피코(Sykes-Picot) 협정을 통해 중동 지역을 각각 나눠가졌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됐다.

같은 시기 유대인들 사이에선 ‘시온주의’(유대인 국가 건설 운동)가 꿈틀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활동한 우익 언론인 테오도어 헤르츨은 반유대주의 여론에 떠밀려 스파이로 내몰린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건을 지켜보며 정치적 시온주의를 구체화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지지를 받는 비발전국에서의 유대인 국가’상을 저서 를 통해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는 훗날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이 되는 과학자 하임 아즈리엘 바이츠만에게 너무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보호하는 제국주의 질서가 중동에서 균열이 나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가자지구 학살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바이츠만은 영국의 영향력 아래 시온주의 국가를 만들면 그 시온주의 국가는 영국의 이익(특히 수에즈운하)을 보호해주는 동맹국이 될 것이라고 영국 지배층을 설득했다. 1917년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던 땅에 제국주의를 돕는 유대국가 건설을 보장해주리라 선언했다.

밸푸어 선언은 유대인들의 이주에 가속을 붙였다. 시오니스트들은 전세계에서 자금을 끌어들였고 영국 고등판무관이 내린 포고령에 힙입어 팔레스타인 땅을 헐값에 사들였다. ‘유대인의 땅, 유대인의 노동, 유대인의 상품’이라는 기치 아래, 새 정착민들은 아랍인 노동자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은 땅에서 유대인들은 노동조합뿐 아니라 기업가, 은행, 보험회사, 지주, 사회보장의 구실까지 광범하게 포괄하는 그들만의 공동체(히스타드루트)를 만들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1936년 4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진정한 총파업으로 항의했다. 이를 두고 당시 한 영국 관리는 ‘혁명 초기’라고 묘사할 정도였다. 파업과 납세 거부 같은 시민불복종 운동이 팔레스타인 전역을 휩쓸었다. 영국의 대응은 야만적이었다. 파업 첫날부터 계엄령을 선포했다.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뒤 국제 무대에서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처지에 팔레스타인에서 식민통치를 하느라 골머리를 썩느니 이라크의 석유에 좀더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1947년 2월 영국 노동당 내각은 팔레스타인에서 퇴장하고 이 국가의 장래 책임을 유엔에 넘기겠다고 밝혔다.

6% 소유한 인구 30%에게 55% 땅을 안겨

그런 가운데 팔레스타인의 진정한 비극은 시작됐다. 1947년 유엔은 유대인 이민자들 중심의 유대국가와 팔레스타인인 중심의 아랍국가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팔레스타인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온 아랍인들에게는 기가 막힌 내용이었다. 전체 토지 면적의 6%를 소유하고 있던 인구 30%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영토의 55%를 할당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스라엘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 1948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나크바’(재앙)라고 부르는 학살이 시작됐다. ‘데이르야신’이라는 한 아랍 마을에서는 이스라엘 특공대에 의해 팔레스타인 사람 254명이 일렬로 세워진 채 총살당했다. 공포에 질린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을 부랴부랴 떠나야 했던 이유다.

이스라엘은 갑자기 중동 땅을 점령한 새로운 식민종주국에 대항하는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1차 중동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의 군대를 격파했다. 특히 1967년 벌어진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미국에 자신의 유용성을 확실히 입증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터였다. 그해 6월 이스라엘은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의 군대를 엿새 만에 제압했다.

미국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스라엘이 ‘미국 대신’ 중동 문제를 해결해주는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확신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정상국가’의 지위를 확보했고 새롭게 점령한 영토의 주권도 승인받았다. 이후 1979년 이란혁명으로 친미 팔레비 왕정이 무너지자 이스라엘은 미국에 없어선 안 될 중동의 보물이자 전략적 자산이 됐다.

이스라엘은 미국에 제3세계와의 통로 구실도 했다. 1960년대에 이스라엘은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케냐, 나이지리아 등 15개 아프리카 국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친교는 특히 두터웠다. 미국의 무기는 이스라엘을 통해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극단적 인종차별 정책)를 지원했다.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군 사이의 4차 중동전쟁에서 미국의 군사적 지원은 신속했다. 정교한 최신 무기를 공급했고 22억달러의 군수품 공급 협정을 체결했다.

이스라엘을 향한 미국의 지원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번 가자지구 학살에 이용된 이스라엘의 미사일방어체제 아이언돔의 경우 1대를 배치하는 데 5천만달러, 1발을 쏘는 데 2만달러가 든다. 가자지구의 피바람 속에서도 미국은 아이언돔 지원액을 늘리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이라는 병영국가를 활용해 중동에서 패권을 유지하며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요르단 등의 나라에서 자신의 거점을 만들어왔다. 급기야 이란혁명(1979년)의 치욕을 되갚을 날을 기다리며 2003년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2001년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점령, 2003년부터의 이라크 침공 및 점령으로 미국민이 50년간 사회보장제도를 누릴 수 있는 3조달러의 돈만 날렸을 뿐이다.

미국의 퇴각은 중동 질서에 커다란 변곡점이 됐다. 1967년 이스라엘이 아랍연합군을 엿새 만에 격퇴했을 때 아랍의 평범한 사람들이 느꼈던 깊은 좌절감을 씻어주는 구실을 한 것이다. 그런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자신을 보호하는 제국주의 질서가 중동에서 균열이 나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가자지구 학살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3차 인티파다가 멀지 않았다

몇 년 전 아랍 혁명으로 아랍 지배자들의 통제력도 약해졌다. 이집트에서 혁명이 한창일 때는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을 폐기하라는 요구도 아래로부터 제기됐다. 이 협정을 계기로 이집트라는 중동의 가장 강력한 국가를 친미 동맹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미국으로선 큰 위협일 수밖에 없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시리아의 바샤르 아사드 같은 독재자들이 죽거나 약해지면서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세력들의 영향력도 커졌다. 최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파타당의 연합정부 구성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가자지구 학살은 이에 균열을 내려는 이스라엘의 발버둥이기도 하다.

결국 시온주의는 영국과 미국이 만든 피조물이다. 그 피조물의 발악을 우리는 지금 똑똑히 보고 있다. 요즘 미국 과 아랍권 위성방송 같은 외신을 보노라면 중동 특파원으로 오랜 경력을 쌓은 토머스 프리드먼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구상해온 모든 것이 이제 더는 의미 없게 됐다. (…) 이스라엘은 아랍인들의 일에서 최대한 발을 빼야 한다. 거대한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 이스라엘이여, 길을 비켜라.” 제3차 인티파다(항쟁)가 시작될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지금, 1차(1987년), 2차(2000년)에 이은 새로운 항쟁이 아랍의 봄을 다시 소생시키는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어진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반전평화연대(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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