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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팔레스타인을 너무 모른다

가자지구의 가족 연락 닿지 않아 애타는 마흐모드 등 팔레스타인

출신 사람들 “팔레스타인 이해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필요한 일”
등록 2014-08-12 08:03 수정 2020-05-02 19:27
팔레스타인 출신 귀화인 마흐모드가 아내, 다섯 명의 딸과 인천 송도의 집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친척들을 두고 온 그는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이 시작된 뒤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팔레스타인 출신 귀화인 마흐모드가 아내, 다섯 명의 딸과 인천 송도의 집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친척들을 두고 온 그는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이 시작된 뒤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언젠가 아버지는 말했다. 나라를 잃어버린 자는

온 천하에 제 무덤도 못 가진다.

그리고 나더러 떠나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팔레스타인 민족시인 마무드 다르위시 ‘나의 아버지’ 중에서

“오늘밤 죽을 수도 있다”며 소녀가 두려움에 떤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서 아이들이 울부짖고, 대답 없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아비가 절규한다.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비참을 보며 한국 인천의 하늘 아래서 함께 눈물짓는 이들도 있다. 야스민(14), 루바(12), 리나(10), 디마(6), 타라(4). 운이 좋지 않았다면, 별처럼 반짝이는 다섯 명의 딸들도 가자지구의 벽 뒤에 숨어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낙인으로 형벌 같은 삶을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스크카니 마흐모드(43)는 적어도 지금 자신의 아이들이 그 천형을 피한 것에 안도한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향 땅

지난해 4월, 마흐모드는 한국인이 됐다. 요르단에서 태어난 그는 평생 요르단과 한국을 오가며 살았다. 한국 국적을 갖게 되기까지, 그는 자신의 ‘국적’으로 표기된 나라에 발을 들여본 일조차 없다. 아버지의 고향이 있는 팔레스타인이 그의 나라였다. 점령당한 팔레스타인에 뿌리 뽑힌 망명자가 입국하는 것은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불허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 때문에 이스라엘만 알아요. 이스라엘만이 나라라고 생각해요. 팔레스타인? 잘 몰라요. 한국은 나에게 고마운 나라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해 더 잘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지금 거기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잖아요.” -스크카니 마흐모드


아버지의 고향은 가자 북쪽의 ‘알리드’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구두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부유하진 않아도, 부족함도 없었다. 유대계 이주민들과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이 아직 평화롭게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양들의 목에 달린 방울이 딸랑이는 소리가 쿵쾅거리는 장갑차 소리로 대체된 것은 1948년의 일이다.

그해 4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군대는 유명한 피의 숙청인 ‘데이르야신 학살’을 저질렀다. 마흐모드의 가족은 알리드를 떠나 가자로 향했다. “한두 달이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대요. 그런데 20년을 살게 되었지요.” 마흐모드의 세 형이 가자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자에서도 그들은 뿌리내릴 수 없었다. ‘분할의 시대’가 끝나고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점령 통치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원주민 80% 이상이 수십 년 동안 ‘디아스포라’로 떠돌게 될 운명에 처했다.

1967년 6월 벌어진 아랍연합군과 이스라엘의 3차 중동전쟁은 엿새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마흐모드의 가족도 다른 팔레스타인 난민들처럼, 난민에 비교적 우호적인 요르단행을 택했다. 땅도 집도 없이 새로 시작한 삶은 녹록지 않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모른 채 마흐모드가 태어났다. 그래도 그는 운이 좋았다. 일찌감치 한국 자동차 부품과 중고차 무역의 가능성을 알아본 덕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직후 한국에 와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에는 아직 친지들이 있다. 할아버지 형제의 자녀들이다. “한국식으로는 육촌이에요.” 마흐모드가 설명했다. 일가족이 요르단으로 망명한 뒤 태어난 마흐모드는 그들을 직접 만난 일이 없다. 사진과 전화 통화로 안부를 물을 뿐이다. 그래도 다른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러하듯, 마흐모드에게 가족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뿌리’에 의지하는 것은 오랜 이산이 낳은 결과일 것이다. 마흐모드와 한국에 살고 있는 그의 형제들은 살림이 안정되고부터 팔레스타인의 가족들에게 1년에 두어 차례씩 돈을 보내주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선 어떤 일을 해도 돈 벌기 힘들어요. 우리만 잘 지내는 게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파요.”

“죽을 때는 꼭 팔레스타인에서”

친지의 일부는 팔레스타인의 수도인 라말라에, 일부는 가자에 산다.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이 시작된 뒤 한 달 가까이 가자에 있는 가족들은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잘 지내는지 확실히 몰라요. 그래서 너무 힘들어요.” 마흐모드의 얼굴에 근심이 깃들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처지가 한반도의 이산가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살아서는 만날 수 없고, 늘 생사라도 알고 싶은 혈육.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지 못한 마흐모드가 “죽을 때는 꼭 팔레스타인에 가서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향을 그리는 ‘망향가’ 같은 것이 팔레스타인에도 있는지 그에게 물었다. 그의 딸 야스민과 루바, 리나가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른다. “이건 아주 슬픈 이야기예요. 예루살렘은 우리의 도시, 우리의 땅이고. 우리가 비록 지금 당장 거기에 있지 못해도 영원히 싸워서 언젠가 우리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예요.” 마흐모드가 노래의 의미를 대신 설명했다. 마흐모드의 아이들은 요르단과 한국을 오가며 살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팔레스타인 알리드가 자신의 뿌리인 것을 안다. “우리 고향은 팔레스타인이란다.” 요르단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늘 이야기해주었다. 속이 깊은 루바는 얼마 전 아빠와 함께 서울에서 열린 이스라엘 규탄 집회에 참여해 “이스라엘은 한국에 무기를 판 돈으로 팔레스타인 가자의 어린이를 죽인다. 한국은 이스라엘을 돕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마흐모드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회에 나가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더 많이 알리기 위해서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마흐모드는 한국인 친구를 사귈 때마다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국은 옛날에 팔레스타인하고 상황이 비슷했어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일본하고 한국 같은 관계예요. 일본이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한국 사람들 어떻겠어요. 계속 싸워야죠.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한테 나쁘게 (공격) 안 해요. 이스라엘이 문제를 일으키려고 전쟁을 자꾸 하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해 너무 모른다. 한국의 뉴스와 신문에선 팔레스타인이 남한과 북한의 관계처럼 이스라엘과 세력 다툼을 벌이는 것처럼 보도된다. 틀린 이야기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 때문에 이스라엘만 알아요. 이스라엘만이 나라라고 생각해요. 팔레스타인? 잘 몰라요. 한국은 나에게 고마운 나라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해 더 잘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지금 거기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잖아요.”

“남한과 북한 같은 관계가 아니에요”

지난 6월 법무부 집계를 보면, 국내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국적자는 34명에 지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인이지만 망명 뒤 인접 아랍국가의 국적을 갖게 된 이들을 포함하더라도 그 수는 미미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다. 유대인 역사학자 일란 파페의 지적대로 팔레스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민족주의적이거나 인종적이거나 종교적 관점이 아닌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필요한 일이다. “오만한 장군, 탐욕스런 정치인, 냉소적인 외교관”과 같은 악당이 아닌 “여성, 아동, 농민, 노동자, 평화운동가”들의 희생을 지지하는 일이기도 하다. 서울의 이스라엘 규탄 집회에서 어느 아랍인이 들고 있던 손팻말의 다음과 같은 문구처럼 말이다. “여러분은 가자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인의 감정을 느낄 수 없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휴머니즘입니다.”

인천=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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