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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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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지지 마라

매뉴얼대로 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끔찍한 아이러니,

현대문명이 가져온 안전의 사각지대
등록 2014-05-01 07:24 수정 2020-05-02 19:27

‘매뉴얼은 오작동한다.’
차라리 이런 전제로 행동하는 편이 낫겠다고 누군가 주장해도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세월호 참사가 매뉴얼의 무능과 오작동을 생생하게 증명했기 때문이다. 재난시 매뉴얼을 지키지 않은 선장과 선원은 목숨을 건졌고, 착실하게 질서를 지켰던 이들은 ‘착한 바보들’이 됐다. 에 게재된 조남준 작가의 ‘착한 바보들’은 바다에 잠겨 멀리 뱃머리만 보이는 그림과 함께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고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누가 예쁜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었니”라고 말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시키는 대로 따르면 괜찮을 거라고 어른들을 믿고 따르던 네 침착한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착하면 죽는다, 이토록 끔찍한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는가.

생명과 삶과 상반되는 매뉴얼

매뉴얼은 구조시에도 작동하지 않았다. 매뉴얼에 따랐던 사람들은 매뉴얼에 따라서 구해져야 마땅한 일이나, 매뉴얼에 따른 구조는 적나라한 무능만 드러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질서와 훈육만 강조하는 매뉴얼이 우발성에 대처하는 능력을 잃게 했다”고 말했다. 고미숙 고전학자는 “인간의 무의식적 야생성을 죽여버린 사회”를 비판했다. 무조건 매뉴얼을 따라라, 질서를 지키란 교육은 그렇게 난파당했다. 때로는 위기의 순간에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본능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고려하란 충고가 질서에 대한 권유와 함께했다면…. 우리는 어디서도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존중을 배우지 못했다.
현대 문명의 거대한 스펙터클이 가져온 안전의 사각지대가 생겼다. 이동연 교수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비현실적 상황은 9·11 테러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구멍난 배에서 옆으로 파도가 넘치는 모습이 보이는 작은 배가 아니라 거대한 선박에 우리는 몸을 싣는다. 우리가 겪는 재난은 이런 조건에서 덮쳐오기 일쑤다. 매뉴얼은 지도한다. 위험이 감지돼도 판단은 유보돼야 한다. 고미숙 고전학자는 “매뉴얼이 생명과 삶을 중심으로 배치되지 않았다”며 “몸과 생명이 배제된 매뉴얼에 불려다니다 우리 자신에 절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전도된 문명의 한계를 이렇게 지적했다. “시스템, 제도가 많으면 안전할 것이란 환상이 있다. 이런 복잡성이 민주적이란 오인도 있다. 그러나 복잡한 시스템이 나를 구하지 못한다는 사무치는 경험을 우리는 지금 하고 있다.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우리가 그것을 시작한 이유인 근본은 없어져버렸다. 대개의 매뉴얼도 그렇다.”
불쑥 찾아드는 흔한 질문이 있다. 달나라도 가는데 눈앞에서 침몰하는 배, 거기에 탄 사람도 못 구하나? 고미숙 고전학자는 “기술과 문명의 전제가 생명이 아니라 화폐”라며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재난을 예비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자본과 관료가 돈을 들일 아무런 동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아득한 하늘에서 전투기를 타고 지상의 인간을 정확하게 조준하는 무기는 있어도, 물에 빠진 배와 사람을 구하는 기술은 준비되지 않았다.

이제 누가 매뉴얼을 따를 것인가

이렇게 파괴하는 일에는 유능하나 살리는 일에는 무능한 사회는 적나라한 밑바닥을 드러냈다. 뒤집힌 세월호와 함께 색출하고 탄압하는 기술만 발달한 국가도 밑바닥을 드러냈다. 결국 구조의 최전선에 나선 것은 거대한 기계가 아니라 잠수부의 몸이었다. 허망한 시간을 흘려보내며 누구도 과감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매뉴얼에 아이디어는 없다. 그것만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정부의 원칙이었다. 스스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만 남은 국가는 이미 실패한 국가임을 증명했다. 오직 세상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잃지 않았던 ‘착한 바보들’만이 희생되고 있었다. 그렇게 질서를 지키면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란 마지노선이 무너졌다. 이제 누가 매뉴얼을 따를 것인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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