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소득을 나눠갖는 세상을 상상하라

이제는 상식이 된 기본소득… 7인이 말하는 ‘나에게 기본소득이 필요한 이유’
등록 2014-02-26 05:39 수정 2020-05-02 19:27


우리는 알고 있다. ‘일자리가 곧 복지’가 아니라는 것을. 나라 전체의 경제 규모가 아무리 커지더라도 일자리는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 고용률 70% 달성은 요원하다. 반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사람은 늘어난다. 인구의 40%는 불안정노동자다. 노동소득분배율을 비롯한 소득 불평등 정도는 나날이 나빠져만 간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한계에 부닥친 자본주의 체제를 뛰어넘을 대안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하지만 상상은 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나눠갖는 ‘분배의 재구성’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불안정노동 사회를 치유할 해답은 없을까. ‘모든 국민은 기본소득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기본소득을 지급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에 이런 조항이 신설되는 상상을 해본다. 기본소득은 누구나 인간다운 경제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일정한 소득을 보장하라는 거다. 기본소득의 특징은 간단하다. 첫째, 무조건적이다. 당신에게 노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당신의 재산이 얼마인지도 따지지 않는다. 둘째, 개별적이다. 가족이 아니라 개인에게 준다. 3살 아이라도, 80살 노인이라도 그 존재 자체로 권리를 가진다. 마치 투표권처럼. 셋째, 보편적이다.
당신이 만약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라도, 당신이 거리를 떠도는 노숙인이라도 똑같은 돈을 받는다.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비정규직과 실업자는 일자리가 없어도 버틸 힘을 얻고, 전업주부와 문화예술인은 자신의 노동 가치를 새롭게 인정받고, 대기업 정규직은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여유로운 삶을 꿈꿀 수 있게 된다. 뜬구름 잡는 상상이라고? 기본소득의 맹아는 이미 현실에 돋아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당시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씩 기초노령연금을 주겠다’고 했던 공약은 사실상의 부분(노인) 기본소득안이다. 2010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뜨겁게 달궜던 무상급식 공약 덕분에 보편복지와 기본소득의 철학은 이제 상상이 아니라 상식이 됐다. 2월23일, 국내에서는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1천 명의 선언문이 발표됐다. 김종철 발행인, 홍세화 발행인, 강남훈 한신대 교수, 금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이 선언운동을 제안했다. 기본소득 논의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려는 개인과 사회단체들의 모임인 ‘기본소득공동행동 준비위원회’도 새로이 발족했다. 은 1000호를 맞아, 기본소득 논의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깊숙이 들여다봤다.

1

1

불안정노동자 김태호(24)“그래도 덜 굶겠단 든든함”

직업은 ‘알바’였다. 18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고시원에 혼자 살게 되면서 처음 했던 알바는 전단지 뿌리는 일이었다. 도박 홍보 전단 1천 장을 매일 거리에 뿌렸다. 하루 4만원을 벌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라 매달 40만원도 받았다. 그래도 혼자 먹고살기엔 빠듯했다. 학교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20살엔 교복을 팔았다. 시급 5천원짜리 알바였다. 통장으로 월급이 들어오니 기초생활비는 끊겼다. 가스충전소에서 일하며 먹고 자기도 했지만 한 달도 견디기 힘들었다.

최근까지 일했던 마지막 직장은 서울 홍익대 입구 지하철역 근처 편의점이다. 지난해 4월 제대한 뒤 밤 10시부터 아침 8시까지는 편의점에 서 있는 채, 낮 시간에는 고시원의 좁은 방 안에 누운 채 지냈다. “진짜 빡셌다.” 밤이라도 손님은 끊이지 않았다. 식사는 항상 편의점 구석에 서서 삼각김밥이나 컵라면 따위로 때웠다. 유통기한이 지난 ‘폐기’ 제품이 단골 메뉴였다. 30분도 제대로 쉬지 못했지만, 그땐 그게 근로기준법 위반인 줄 몰랐다. 시급은 5800원. 마지막 달엔 6100원까지 올려줬다. 주휴수당, 야간근로수당 등을 못 받았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어 7개월 동안 자기도 모르게 떼먹었던 수당 360만원을 받아냈다.

지금은 석 달째 일을 쉬고 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돈은 없고, 언제까지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나 인생에 회의가 들어서”라고 했다. 요즘 그에겐 꿈이 생겼다. 사는 곳을 이태원 해방촌의 대안주거공동체인 ‘빈집’으로 옮기고, 서울시 청년혁신일자리 등 창의적인 알바를 찾는 중이다.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졌거든요. 전에는 길을 걷다가 막히면 비켜갔는데, 이젠 바위가 앞에 있으면 기어서라도 넘어가고 싶어요.”

처음엔 뚱딴지같이 들렸던 기본소득을 알게 된 것도, 새로운 꿈을 품게 된 계기였다. “기본소득 월 30만원을 받아봤자 일은 계속해야 하지만, 그래도 덜 굶겠단 든든함이 생기잖아요. 그중 15만원은 저축해서 여행도 다니고 음악도 배워보고 싶어요.” 우리나라 인구 10명 중 4명은 김씨 같은 불안정노동자다. 이들 대부분은 일해도 가난한 ‘워킹푸어’에, 고용보험 등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1

1

불안정노동자청년(15~29살) 고용률 39.7%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40% 미만 기록 최저임금 시간당 5210원



1

1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 황길영(45)삶의 질 향상을 겪어보니

대기업에서 일한다고 ‘불안’에서 비껴나 있진 않다. 황씨는 경기도 부평에 있는 한국GM 엔진공장에서 자동차 변속기를 만든다. 그런데 1993년부터 몸담아온 회사가 요즘 뒤숭숭하다. 2월 말까지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어서다. 사무직과 팀장급 생산직 일부만 대상자라고 하나, 불똥이 어디로 튈지는 모른다. 황씨는 2001년 대규모 정리해고 때 잘렸다가 2003년에 복직한 ‘아픈 기억’이 있다.

당시 해고돼 있는 동안 건설 현장 막일도 했고 PC방 사업도 했다. 실업급여는 6개월밖에 못 받아, 큰 버팀목이 되지 못했다. 아파트까지 팔아 사업자금을 댔다가 PC방이 망하는 바람에, 지금도 전세보증금 대출이자가 월 10만원씩 꼬박꼬박 나간다. 그때 치킨집 등 사업을 했던 정리해고자들은 대부분 실패를 맛봤다. 회사를 나가도 생계수단이 마땅찮으니, 만 60살에 정년퇴직으로 나갔다가 다시 비정규직으로 공장에 들어오는 동료도 많다. 용역업체 소속으로 청소일을 하며 반토막 난 월급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40대 가장의 어깨는 무겁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교육비는 나날이 늘어나고, 소득이 없는 부모님에게 생활비도 보태드려야 한다. 부모님은 “박근혜 대통령이 돼서 월 40만원을 받게 됐다”며 박수쳤지만, 현재 받는 돈은 두 분이 합쳐 24만원 남짓에 불과하다. 황씨의 한 달 240만원 벌이로는, 저축은커녕 돈이 나가는 구멍을 막기에도 벅차다.

그래도 올해부터 주간 연속2교대제가 시행돼 밤샘근무가 사라지면서 황씨는 “삶의 질이 많이 나아졌다”. 오전조일 때는 아침 7시에 출근했다가 오후 3시40분이면 퇴근한다. 오후조는 아무리 늦어도 새벽 2시엔 끝난다. 사내엔 등산·스포츠 모임이 활발해졌다. 황씨는 기본소득이 실시되면 삶이 한층 더 좋아지리라 믿는다. “기본소득이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가면, 여가생활이 늘어나는 건 물론이고 새로운 일자리도 창출된다. 중소업체 노동자나 비정규직과의 사회적 연대 차원에서라도, 대공장 정규직들이 임금 약간 깎이고 세금 조금 더 내더라도 기본소득을 지지해야 한다.”

1

1

생산직 노동자평균 근로시간 주 40.2시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32.8시간



1

1

대기업 사무직 노동자 황선홍(34)이건희랑 같이 받아도 좋아

황씨는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기본소득을 접하고는 적극적인 지지자가 됐다. “황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나진 않았어도, 대기업에 취직해 남들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쉽게 돈을 모아왔다. 기본소득이 실시돼 세금을 조금 더 내거나 불이익을 본다고 해도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2007년부터 10대 그룹의 한 계열사에서 일해온 황씨는 최근 서울 시내 아파트를 1채 샀다. 생애 첫 주택 구입자에게 각종 혜택이 많아 부모님 도움과 은행 대출을 받아서 좀 무리를 했다. 앞으로 10년 동안은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한다. 황씨처럼 우리나라 가계가 진 빚의 규모는 최근 1천조원을 돌파했다. 황씨의 경우 미혼이라서 아직 추가 부담이 크진 않다. 월급의 20%가량은 저축할 여유가 있다. 만약 기본소득이 실시된다면 월 30만원의 추가 여윳돈이 생기겠지만, 개인적인 이해타산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지지하는 이유는 2가지다. 저소득층에게 기본소득을 주면 내수가 활성화될 거다. 그러면 일자리도 늘어날 거고. 또 기존에 자신의 비참함을 증명해야 했던 사회보장제도와 달리, 무조건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부자에게 왜 돈을 주냐고 비판하는데 무상급식에 빗대자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손자의 밥은 1천만원짜리고, 내 밥은 5만원짜리고 그런 거다. 세금을 내는 게 다르니까. 기본소득 재원 마련도 결국은 부자들한테 세금을 더 많이 걷는 방식으로 조세개혁을 하자는 것 아니냐.”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을 준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에도 황씨는 찬성했다. 노년층부터 긍정적 여론이 쌓이면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으로 나아갈 발판이 마련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약속은 깨졌다. 박 대통령은 기초노령연금을 물가에 연동하겠다며 오히려 개악할 태세다.

1

1

사무직 노동자국민 1인당 가계부채 1983만원, 일반 가계부채 1천조원 돌파



1

1

장애인 권은춘(42)“애들한테 짐이 되고 싶진 않아요”
똑같이 빚내어 집을 샀더라도 그 무게는 다르다. 충북 청주에 사는 권씨는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다. 전동휠체어는 그의 다리다. 남편도 1급 장애인이다. 최근 권씨 부부는 5800만원을 대출받아 작은 아파트를 1채 샀다. 11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불편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기가 힘들어, 조금 넓은 집으로 옮겼다. 월 24만원꼴로 20년 동안 빚을 갚아야 한다.
갚을 일은 막막하다. 권씨는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다. 장애인연금으로 권씨와 남편에게 각각 월 15만원씩 수당이 나오고, 기초생활비까지 더해 월 95만원가량 현금을 손에 쥔다. 취직은 어차피 엄두도 못 낸다. 이 돈으로 가족 넷이 먹고산다.
사실 빚은 갚아도, 안 갚아도 골치다. 자산(집)이 생기면 기초생활수급권 자격이 박탈된다. 그렇다고 안 갚으면 빚은 고스란히 아이들 몫으로 남는다. 초등학교 6학년과 2학년인 두 아들은 비장애인이다. 권씨는 아이들을 눈물로 키웠다. 뇌성마비 장애인은 손가락 하나도 제 맘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기저귀를 갈다가 행여 손이 엇나가서 아이를 다치게 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따듯한 물로 목욕 한번 시키는 것도, 가스불로 물을 끓여 옮기고 아이를 씻기고 정리하기까지 네댓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키운 아이들은 20살부터 장애인 부모라는 짐을 짊어져야 한다. 부양의무제 탓이다. “나 하나도 먹고살기 힘든 세상인데, 더구나 장애인 부모가 애들한테 짐이 되고 싶진 않아요.”
권씨가 기본소득에 귀가 쫑긋해진 이유다. 기본소득을 받으면 집 걱정도, 아이들 걱정도 한결 덜 수 있다. 게다가 장애인연금을 받을 때마다 권씨는 “진짜 고립된 느낌”이었다고 털어놨다. 사회가 장애인을 사회적으로 배제시킨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반면 기본소득은 무조건적이다. 그가 장애인인지, 집이나 부양가족이 있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노동에 따라 분배받는 체제는 모든 장애인에게 해방적인 공간이 될 수 없다. 기본소득 체제는 장애인들의 완전한 사회 통합에 훨씬 더 적합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장애학 이론가인 폴 애벌리의 말이다.
1

1

장애인
장애인연금 지급 대상: 소득 월 68만원 미만(부부 108만8천원), *대상자 32만7천명(소득 하위 63%),지급액: 최대 월 20만원




청주·홍성=글·사진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