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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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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의원 빌려주세요

전세계 70여 개 나라에서 프로그램 운영 중
한국에선 중고등학생 진로 상담용으로 가장 많이 이용돼
등록 2014-01-17 05:22 수정 2020-05-02 19:27
캐나다 밴쿠버 글래드스톤고등학교의 휴먼라이브러리는 기획·운영의 대부분을 학교 도서관 사서의 개인적인 관심과 열정에 의존하고 있었다. 사서 팻 파룽가오는 “학교 차원에서의 지원이 다소 아쉽다”고 말했다.김외현

캐나다 밴쿠버 글래드스톤고등학교의 휴먼라이브러리는 기획·운영의 대부분을 학교 도서관 사서의 개인적인 관심과 열정에 의존하고 있었다. 사서 팻 파룽가오는 “학교 차원에서의 지원이 다소 아쉽다”고 말했다.김외현

힐러리 - 며칠 전 신문에 남자 조산사 인터뷰가 나왔어요. 그런데 캐나다에서 한 명밖에 없다는 거예요.

셸리 - 어머나! (웃음)

- 아…, 그게…, 하긴 남자라고 조산사가 되지 말란 법도 없죠, 뭐.

힐러리 - 그러니까요. 생각해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산부인과 의사들은 남자도 많잖아요. 우리 병원 가면 보잖아요, 왜.

지난해 12월18일 캐나다 밴쿠버 글래드스턴 고등학교의 도서관.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 이 학교가 실시한 ‘휴먼라이브러리’ 행사에 대해 한참 설명하던 세 중년 여성은, ‘남자 조산사’란 대목에서 웃음을 터뜨리더니 수다로 접어들었다. 이들의 폭소 속에서 약간의 민망함을 느끼며, 기자도 슬쩍 끼어들었다. “내년 휴먼라이브러리에 그 조산사를 부르면 좋지 않을까요?”

힐러리 - 맞아요. 그런데 동부에 살던데….(밴쿠버는 서부)

- 스카이프(인터넷 영상 통화)로 하죠, 뭐.

셸리 - 아, 좋은 아이디어예요!

힐러리 - 그래요. 출산 도중만 아니면 못할 것도 없죠. (모두 웃음)

파룽가오와 힐러리 몬트레이는 이 학교 도서관의 사서로, 2010년·2012년·2013년 세 차례 이 학교에서 열린 휴먼라이브러리 행사를 기획·준비했다. 셸리 맥퍼슨은 이 학교에서 경제를 가르치는 교사다. 지난해 10월28일 열린 휴먼라이브러리 행사에 학생들을 데려왔던 그는 “학생들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캐나다에 한 명밖에 없는 남자 조산사

행사는 단 하루였다. 하루 4차례 각 교시마다 2개 반 학생들(한 반당 약 30명)이 참가했다. 전체 학생 1200명 가운데 약 240명만이 행사를 접한 셈이다. 많은 교사가 참가를 희망했지만 모두를 수용할 순 없었다. 파룽가오는 이해도와 질문의 수준을 감안해, 11~12학년(16~18살) 학생들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각 교시에 준비된 ‘사람책’은 10~15명가량이었다. 학교 도서관 쪽은 각 학생이 사람책 3명을 직접 선택하도록 했다. 사람책 1명에 할당된 시간은 20분가량. 사람책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뒤, 질문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사람책들은 사서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을 알음알음으로 섭외해온 경우가 많았다. 해를 거듭하면서 지난 행사 때 반응이 좋았던 이들을 다시 모셔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사람책이 될 순 없었다. 대개는 학생들이 평소 생활에서 접하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목적은 분명했다. 파룽가오는 “휴먼라이브러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차별과 편견을 타파하고 소통과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당 직업에 대한 일종의 ‘진로 상담’이 되기도 했지만, 그건 부차적이었다.

사람책 가운데는 장의사, 보호관찰관, 종교인(목사·승려), 검시관, 운동선수 등 직업만으로 편견의 대상인 이들도 있었다. 남성 간호사, 여성 소방관처럼 성역할론 탓에 편견을 받는 이들도 있었다. ‘몸에 문신을 새긴 사람’이나 ‘아이 엄마’처럼, 평범하지만 학생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삶을 사는 사람책도 있었다.

“학생들로부터 가장 열렬한 호응을 받았던 사람책 가운데 하나는 시각장애(전맹) 여교사였다. 그는 결혼해서 아이들도 있고, 동정을 질색하는 굉장히 독립적인 인물이었다. 시각장애인에 대해 막연한 편견을 가졌던 학생들은 그를 접해보고는 많이 놀랐다.”(몬트레이)

2012년 캐나다의 국영 은 전국의 공공도서관 시설을 이용해 휴먼라이브러리를 실시했다. 사전에 이 학교에 와서 운영 방식을 배워갔다. 지난해부터는 근처의 다른 학교에서도 휴먼라이브러리가 시작됐다.
캐나다를 비롯해 현재 휴먼라이브러리가 퍼져 있는 곳은 전세계 70여 개 나라에 이른다. 2000년 덴마크에서 ‘사람을 책으로 빌려준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2003년 유럽평의회의 ‘인권 및 사회통합을 도모하는 청년’이라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정되면서 그 보폭을 넓혔다. 방식은 다양하다. 대규모 뮤직페스티벌이나 북페어의 부대행사로 열리기도 하고, 학교나 공공도서관의 일상적인 사업이 되기도 한다. 시민사회단체나 대학 동아리들은 마을공동체 복원이나 소수자운동으로 휴먼라이브러리를 활용한다.

진로 고민이 베스트셀러

국내엔 2009년 라는 에세이집 출간이 촉매제가 됐다. 방송작가 출신의 김수정씨가 영국 런던에 살면서 휴먼라이브러리를 접한 뒤 15명의 영국인을 사람책으로 대출해 직접 들은 이야기를 맛깔나게 엮어낸 책이다. 2010년 국회도서관에서 남자 승무원, 여자 소방관 등을 일대일로 빌려주는 행사를 연 것을 시작으로, 2014년 1월 현재 국내에서 휴먼라이브러리 행사를 진행했거나 진행하고 있는 관련 기관·단체만 40곳이 넘는다.
가장 큰 흐름은 역시 도서관에서 나타난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 노원정보도서관 지하 1층은 주말이면 사람책 대출로 붐빈다. 노원구의 지원을 받아 2012년에 설립된 이곳 휴먼라이브러리에는 모두 455명의 사람책이 등록돼 있다. 사람책은 지역 주민이 단연 많다. 승무원, 예술관장, 의사 출신의 사람책은 진로 고민이 많은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다. 정치인인 안철수 의원은 정보기술(IT), 우원식 의원은 애국자 가족을 주제로 한 사람책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일상적인 대여 체계와 공간이 갖춰진 이곳의 대출 건수는 지난해 상반기에만 2400여 건에 달했다.


“학생들로부터 가장 열렬한 호응을 받았던 사람책 가운데 하나는 시각장애(전맹) 여교사였다. 그는 결혼해서 아이들도 있고, 동정을 질색하는 굉장히 독립적인 인물이었다. 시각장애인에 대해 막연한 편견을 가졌던 학생들은 그를 접해보고는 많이 놀랐다.” -몬트레이


이웃한 서울 성북구에서도 지난해 구립도서관 8곳이 돌아가면서 휴먼라이브러리 이벤트 행사를 12차례 벌였다. 강영아 성북구 달빛마루도서관 관장은 “보통 사람책 13~14명이 참여하고, 독자 3~5명이 사람책 한 권을 대출해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말했다. 관악구 통합도서관, 군포시립도서관, 수원시평생학습관 등도 사람책 대출 행렬에 동참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도서관 사업은 ‘편견 깨기’라는 휴먼라이브러리의 취지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지역 주민과의 소통에 강조점을 찍다보니 진로 상담이나 취미 생활, 정보 교류 등에 사람책 주제가 집중되는 탓이다. 양시모 노원휴먼라이브러리 관장은 “중·고등학생이 진로 상담을 위해 대여하는 비중이 80%다. 자기 삶을 터놓고 드러내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는 일단 정신만 살려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공공기관은 ‘재능 나눔’ 위주로 가는 거다. 우린 그중에서도 소통과 공감에 더 신경 쓸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노원휴먼라이브러리는 사람책을 대상으로 ‘소통활동가 양성학교’를 열어 비폭력 대화법 등을 집중 교육하고 있다. 도서관을 넘어, 사회 갈등을 치유할 시민교육으로서 휴먼라이브러리가 커나갈 가능성이 엿보이는 시도다.


대부분의 도서관 사업은 ‘편견 깨기’라는 휴먼라이브러리의 취지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지역 주민과의 소통에 강조점을 찍다보니 진로 상담이나 취미 생활, 정보 교류 등에 사람책 주제가 집중되는 탓이다.


‘편견 깨기’에 충실한 곳은 아무래도 시민사회단체와 대학가다. 마포 민중의 집과 교육공동체 ‘벗’ 등이 함께 운영하는 ‘숨쉬는 도서관’이 대표적이다. 2011년부터 서울 마포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이벤트 행사를 통해 사람책 대여사업을 벌여온 이곳에 등록된 사람책 목록은 80여 개. 자급자족 귀농부부, 자립음악생산협동조합 소속 뮤지션, 공동주택에 사는 이웃, 병역거부운동가, 동성애자 등 소수자가 많다. ‘숨쉬는 도서관’ 운영자인 박은주(하품)씨는 “대안적인 삶을 주제로 하는 사람책이 인기가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인디문화가 꿈틀대는 홍익대 인근에 있다는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결과다.

민간 ‘사람도서관’도 등장

감명 깊게 사람책을 읽은 이가 많아질수록, 휴먼라이브러리도 더 멀리 퍼져나간다. 서울 마포구 신수중학교에선 ‘숨쉬는 도서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한 영어 교사가 지역 주민들을 학생들에게 대여하는 도서관을 새로 만들어 ‘숨쉬는 책’이라고 이름 붙였다. 서울 성동구 서울숲에서 2011년부터 해마다 열리는 ‘리빙라이브러리’ 행사도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직접 사람책을 섭외하는 기획 행사다. 고려대와 연세대에서도 노숙인, 탈북자, 무슬림, 남성 페미니스트 등이 사람책으로 참여하는 행사가 2011~2012년과 2013년 각각 열린 바 있다. 연세대에서 지난해 5월 열린 행사를 처음 제안한 정재훈씨는 “친구들이 자신의 편견을 마주하고 생각해볼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람책을 소수자 위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바람은 지방에도 불고 있다. 광주재능기부센터는 2년째 ‘사람을 빌려주는 도서관’을 매달 열고, 대전시 사회적자본센터는 지난해 10월 개원 첫 행사로 휴먼라이브러리 페스티벌을 선택했다. 대구에서는 방과후 학교에 사람책을 보내주는 민간 ‘사람도서관’까지 등장했다.

조금은 결이 다른 흐름도 존재한다. 2012년 설립된 소셜벤처 ‘위즈돔’은 일종의 상업화된 휴먼라이브러리다.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는 플랫폼을 표방하는 이 회사 홈페이지에는 현재 750명이 사람책으로 등록돼 있고, 1만7천 명이 사람책을 빌려봤다. 방식은 간단하다. 자신을 ‘책’으로 등록하고 싶은 사람이 주제,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해 인터넷에 띄우면, 그 책을 읽고 싶은 독자가 만남을 신청하면 된다. 다만 참가비가 있다는 점이 휴먼라이브러리와 다르다. 독자는 1만~3만원의 참가비를 내야 하고, 위즈돔은 참가비의 30%를 수수료로 챙겨간다.

살아 있기에 형태와 방식도 진화한다

“사이트에 등록된 사람책의 대부분은 유명 인사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지식이나 경험도 유명 인사나 교수처럼 정당하게 가치를 인정받는 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참가비를 받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종이책 시장에서도 서점과 도서관이 공존하지 않나?” ‘상업화’ 우려에 대한 한상엽 위즈돔 대표의 답이다. 한 대표는 “참가비를 기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책들에게서 장학금을 모아, 취업준비생이나 차상위계층에겐 참가비를 무료로 해주는 시스템을 운영 중”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반면 ‘숨쉬는 도서관’ 운영자인 박은주(하품)씨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사람책은 대가 없이 활동해야,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순수하게 재능을 기부한다는 의미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휴먼라이브러리는 ‘살아 있는’ 도서관이다. 살아 있기에, 그 형태와 운영 방식도 진화한다. 도서관이든, 소셜벤처든, 사회단체든, 그 색깔은 달라도 휴먼라이브러리 운영자들이 입을 모으는 대목이 하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장이 채워져야 한다는 것. 휴먼라이브러리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 그리고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이다.

밴쿠버(캐나다)=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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