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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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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한다, 고로 민주주의는 존재한다

2014 갑오년에 가득한 ‘데모’ 열기를 싸안은 데모당
금기어가 된 데모의 복권, 데모의 생활화를 꿈꾼다
등록 2014-01-08 04:41 수정 2020-05-02 19:27
기의식 속에 2013년 7월 ‘데모가 희망’이라고 외치는 데모당이 출현했다. 지난해 12월31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타종 행사 현장에서 데모당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정용일

기의식 속에 2013년 7월 ‘데모가 희망’이라고 외치는 데모당이 출현했다. 지난해 12월31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타종 행사 현장에서 데모당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정용일

‘데모’. 누군가는 말만으로 몸서리친다. 두려워하여 몸을 떤다. 다시 ‘데모’. 누군가는 아득히 먼 추억으로 뒷걸음친다. 그리워하여 몸을 떤다. 양자 모두 기억에 의존한 회고적 반응이다. 그리하여 데모는 오래 전진하지 못했다. 의미 그대로 ‘실행’되지 못한 채 기억에 수장됐다. 2014년, 데모는 다시 삶의 영역으로 돌아와야 한다. 의회 민주주의가 실현하지 못하는 ‘또 다른 민주주의’를 위해, 데모는 다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실행’돼야 한다. 고리타분한 대중집회 참여자가 아니라 주권자로서 ‘데모꾼’이길 선택한 이들이 있다.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유쾌하게, 데모하겠다고 공언하는 이들, 데모당이다. 후진 기어를 넣고 달리는 민주주의 속에서 전진하는 데모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 _편집자

“사람들이 주권자인 사회는 국회의원 선거가 아니라 데모에 의해 가능합니다.” -일본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

경찰 채증조의 카메라가 일제히 한 무리의 시위대를 향한다. 시위대 중 한 명이 느닷없이 뒤돌아 튄다. “잡아!” 경찰 경비과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서울역 광장을 가로지른다. 남자가 100여 명의 경찰 기동대원들에 둘러싸인다. 이어 실랑이. “가방 열어요!” “절대 못 열어! 영장 가져오라고요.” 이내 포기.

남자의 가방 가득 무엇이 들었는지 경찰은 심증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2013년 8월24일 민주노총의 쌍용차 문제 해결 범국민대회를 앞두고, 페이스북에 ‘그들’이 무엇을 올렸는지 경찰은 알고 있었다. 대범하게도 ‘그들’은 ‘화염병 데모’를 예고했다. 운명의 8월24일, 서울역 광장에서 ‘그들’이 깃발을 올리자 경찰이 몰려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야 한다.’ 긴장감이 한여름의 광장을 달궜다.

마침내 시위대가 가방을 열고 물건을 꺼냈을 때 경찰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쌍용차 국정조사 실시! 국정원 해체!” 종이로 만든 화염병 모형을 높이 든 채, 시위대는 웃음을 터뜨렸다. 경찰을 농락한 시위대의 머리 위로 깃발이 펄럭였다. ‘창당’ 한 달여를 맞은 ‘데모당’의 공식 출사표였다.

“데모 없는 세상!”을 위하여

때는 갑오년이다. 혁명과 궐기의 기운이 강하다. 한민족은 자타 공인 ‘데모’ 민족이다. 일찍이 1176년 고려의 천민 망이·망소이는 도당을 모아 공주를 함락시켰고 조선시대에는 유생부터 민초들까지 신문고와 격쟁, 복합상소, 민란 등 다양한 데모로 민의를 전달했다. 해방 이후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일궈낸 공 또한 ‘데모’에 있다.

그러나 개국공신이 숙청당하듯 민주화 이후 데모는 그 지위를 박탈당했다. 언제부터인가 데모는 그들만의 언어가 되었고, 갇힌 언어가 되었다. 데모를 ‘수단’으로 삼는 정당정치가 데모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다.

“혁명당파 안에는 데모를 폭력 혁명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이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데모가 과격해지고 소란스러운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환영했습니다. (…) 다른 한편으로 과격한 데모에 반대하는 당파가 있는데, 그들도 데모를 수단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데모를 다음 선거에서 표를 획득하는 수단으로서 봅니다.” 많이 본 장면이다. 데모하지 않는 일본 사회를 꼬집은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이 우리에게도 낯설지만은 않다.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그 결과 사람들이 데모에 오지 않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몰랐습니다.” ‘데모’는 삶의 영역에서 추방당했다.

2013년 7월 데모가 화석화되는 걸 거부하는 이들이 불현듯 나타났다. 데모당이다.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창당한 이 ‘정당’의 당원은 2014년 1월 현재 400여 명이다. 아직 정당 등록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영영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당의 목표는 하나이므로. “데모 없는 세상!” 더는 데모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 때까지 주야장천 데모만 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공안몰이와 노동 탄압은 ‘일신우일신’하는데 야권의 대응은 지리멸렬했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도 구심점이 되지 못한 지 오래였다. 이것저것 따지기엔 갈급한 시국이었다. 데모당은 무엇보다 ‘스피드’를 추구한다. “준비하고 나중에 싸우려 하면 늦는다.”

당원 400여 명 가운데 오프라인에서도 활동하는 ‘진성당원’은 200여 명 규모다. 이들은 한때 대부분 ‘나홀로 데모족’이었다. 보험사에 다니는 데모당원 박충종(52)씨도 한때 그랬다. 그는 생계 때문에 데모를 끊은 지 오래였다. 박씨가 다시 데모에 팔뚝을 내준 것은 2013년 노동절 이후다. “시국이 갈수록 너무 마음에 안 들었어요. 미적미적 살아오며 빚진 마음만 갖고 있었는데 상황이 훨씬 엄혹해지니까 나올 수밖에 없었죠.”

홀로 도는 이들에게도 깃발은 필요하다. 데모는 ‘혼자’서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데모당은 박씨 같은 ‘나홀로 데모족’에게 느슨한 결합을 제공한다. 박씨는 노동당원이지만 데모당기 아래서 데모한다. “당 안에선 의사 결정 과정이 너무 길잖아요. 데모당은 탁상공론이 없어요. 바로바로 우리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 그게 마음에 들었죠.”

데모는 때로 대의제 정치를 넘어선다. 장자크 루소는 “대의제에서 인민은 주권자가 아니라 노예”이며 “인민은 어셈블리(집회)에서만 주권자로 행동할 수 있다”고 했다. 노동당·통합진보당·진보정의당·녹색당 등으로 진보정당들은 갈라져 있지만 데모당 안에서는 한통속이다. 데모당은 ‘이중당적’을 허용한다. 다양한 당적을 가진 이들이 데모당에서 ‘실행’에 뜻을 모은다.

진보 진영에게 들은 “깃발 내려!”

이상선(45)씨는 한 번도 정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 “정당에는 관심 없어요.”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전기·기계 설비 일을 하면서 정확히 12년 동안 데모했다. 정치는 한 번도 비정규직 노동자를 진정으로 대변해준 일이 없었다. “비정규직 노조 일을 오래 하다보니 정치권에 실망을 많이 갖게 됐죠. 정규직 노조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도 우리와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거리감을 좀 느꼈고요.” ‘데모당’에서 그는 첫 당적을 갖게 되었다. 또 다른 데모당원 강태형(52)씨는 노동당에 가입해 있지만 “집회에서 누가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싫었다”고 한다. “노동당이 하는 일들을 보고 있으면 속이 터져서….”


데모당은 ‘나홀로 데모족’에게 느슨한 결합을 제공한다. 박충종씨는 노동당원이지만 데모당기 아래서 데모한다. “당 안에선 의사 결정 과정이 너무 길잖아요. 데모당은 탁상공론이 없어요. 바로바로 우리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 그게 마음에 들었죠.”


일주일에 4~5차례씩 각종 데모 현장을 찾는 데모당원들의 움직임은 산발적이다. ‘끌리면 간다’는 것이 데모당의 유일한 방침이다. 거의 모든 데모는 ‘벙개’로 이뤄진다. 데모당원들에게 대의명분과 정치적 손익은 중요치 않다. 대학을 졸업한 뒤 자연스럽게 데모와 멀어졌던 강태형씨에겐 ‘밀양’이 화두다. “집중해서 데모해야겠다는 생각이 사라졌던” 그가 다시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 5월이다. “노인네들이 죽겠다고 덤비는 것, 그걸 그냥 지켜보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가만있을 수가 없었어요.” 직장은 서울, 집은 부산이지만 강씨는 2주에 한 번은 경남 밀양에 간다. 부산 가기 전에 밀양을 들르고 서울 오는 길에 충북 옥천의 유성기업 농성장을 찾는 식이다. 마음이 끌려 찾았던 현장에선 텅 빈 구호가 아니라 꽉 찬 마음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데모 가면 남아 있는 사람들을 두고 오는 게 제일 마음에 걸려요.”

그 불온한 이름 때문에 곤란한 일도 생긴다. 처음엔 집회 현장에서 당기만 치켜들어도 주위가 수런거렸다. “빨갱인가봐.” 데모당을 이끄는 이은탁 당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1980년대까지 민주주의에 기여하며 시민권을 획득했던 ‘데모’라는 말이, 집회·시위가 통제되면서 금기어가 됐잖습니까. 그 금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데모의 복권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데모당은 ‘보여주기’ 데모를 지양한다. 이들의 투쟁 지침은 ‘즐겁게 함께 데모’다. 당적과 소속을 가리지 않고 연대가 필요한 농성장엔 빠짐없이 찾아가 데모하고 있다. 데모당 페이스복

데모당은 ‘보여주기’ 데모를 지양한다. 이들의 투쟁 지침은 ‘즐겁게 함께 데모’다. 당적과 소속을 가리지 않고 연대가 필요한 농성장엔 빠짐없이 찾아가 데모하고 있다. 데모당 페이스복

진보 진영 내부에서조차 데모당을 백안시하는 눈초리도 있다. “깃발 내려! 깃발 내려!” 2013년 9월 서울역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촛불집회에서 한 참가자는 데모당에 소리쳤다. “데모가 무슨 말이야. 당신 간첩이냐.” 급기야 경찰에 신고하는 해프닝도 빚어졌다. 뒤이어 10월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의대회에서 데모당의 깃발을 본 한 전교조 조합원이 “여긴 데모하는 데 아니다. 전교조가 오해받는다”고 추궁해 이후 전교조 본부가 데모당에 공식 사과한 일도 있다. “상대편에 빌미를 제공하지 말자”는 눈치 보기다. 집회·시위는 헌법이 보장한 시민의 권리지만 데모는 선동이라는 보수 진영의 논리를 답습하는 셈이다.

‘앉으나 서나 데모 생각’뿐인 데모당은 그와 같은 우여곡절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우린 내놓고 아무 데나 데모란 말을 붙이니까 그런 자기검열로부터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더라고요.” 이 당수의 설명이다.

입당 조건은 단 하나

데모당에 하나의 지상명령이 있다면 그것은 ‘실행’이다. 이은탁 당수는 “당원들의 관심 데모 분야, 지지 정당, 정세 판단, 집중점 등이 다르지만 실행에 최우선 순위를 둔다는 점에서만큼은 생각이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시위를 뜻하는 ‘데모’는 영단어 ‘demonstration’의 줄임말이다. demonstration은 단어의 쓰임새가 넓다. 시위의 범주를 넘어선다. 실행과 실증을 뜻하고 감정과 의견을 드러내는 행위까지 모두 포괄한다. 그러므로 한 사회의 정치·사회와 관련해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행위라면, 그것이 광장과 거리에서의 집단행동이 아니라 할지라도 모두 데모라고 불러 마땅하다.

데모당원의 입당 조건은 하나다. “최소 한 달에 한 번 데모 인증샷을 페이스북에 올릴 것.” 그 밖에 모든 ‘실행’은 데모로 간주된다. 몸데모, 돈데모, 손가락데모, 모두 데모다. “(집회 현장에서 머릿수를 채우는) 몸데모 여건이 안 되는 당원은 (군자금을 대는) 돈데모나 손가락데모(투쟁 소식 전파, 댓글 응원, 좋아요 누르기, 전화 데모 등)로 대신할 수 있다.”

그리하여 데모당의 페이스북 게시판은 ‘데모 포털’에 가깝다. 날마다 데모 정보가 공유되고, 데모 벙개를 제안하는 목소리가 빼곡히 올라온다. 시민들에게 ‘57분 데모정보 서비스’를 제공하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겠다는 포부도 있다. “데모하고 싶은데 정보가 없어서 답답할 때 데모당에 전화를 걸어 안내에 따라 번호를 누르면 실시간 데모 장소, 시간, 교통편, 일기, 데모 종류, 데모당 추천 데모, 구호, 준비물, 경찰 배치 상황, 주의사항, 맛집, 화장실, 투쟁사업장 자매결연 신청 정보 등을 얻을 수 있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은탁 당수는 “원하는 사람 누구나 데모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데모당이 일조하고 싶다”고 전했다.

데모는 무엇보다 유쾌해야 한다. 그래야 지속 가능하다. 목적만 남은 싸움은 쉽게 지친다. 데모당은 ‘유희로서의 데모’를 즐긴다. 아이 돌보랴, 직장 다니랴 겨를이 없는 김선아(45)씨는 “기분이 꿀꿀하면” 데모를 한다. “나오면 확실히 기분 전환이 되거든요. 에너지도 생기고.” 김씨는 “단박에 바뀌는 건 없잖아요. 재밌어야 꾸준히 해요”라고 말했다.

2013년 12월31일엔 밀양으로 ‘땔감데모’를 다녀왔다. 부산·충주·서울·경기 등에서 30여 명의 당원이 모여 밀양 평밭마을에 갔다. 어르신들이 지내는 움막에 들일 땔감을 팼다. 즉석에서 ‘도끼질 콘테스트’도 열었다. 충북 음성에서 중식당을 운영하는 한 당원이 ‘한 끼 대접하겠다’고 하여 귀경길에 공짜밥도 얻어먹었다. “데모하면 밥이 나온다”는 즐거운 비명이 나왔다. 그에 앞서 11월11일엔 ‘빼빼로데이’를 맞아 제주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옥천 유성기업 등 전국의 농성장에 빼빼로를 닮은 가래떡을 1kg씩 싸서 보냈다. ‘가래떡데모’다. 데모당원들은 “대부분의 데모 기획 아이디어는 ‘뒤풀이 데모’에서 나온다”고 귀띔했다.

‘운동을 희화화한다’는 손가락질도 있다. 그러나 데모당은 “지금보다 더 가벼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엄숙함이 곧 강고함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데, 결국 일반 시민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벽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벽을 낮추고 싶어요. 2008년 촛불 당시에도 마지막까지 꿋꿋했던 이들은 운동세력이 아니라 ‘촛불시민’이었거든요.”(이은탁 당수)

웃으며 시작해 쓰게 마무리된 타종 데모

데모당이 갈 길은 멀다. 이제 겨우 ‘데모’의 복권을 위한 첫걸음을 디뎠을 뿐이다. 2013년 12월31일, 데모당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쫑데모’를 열었다. 한 당원의 긴급 제안으로 서울 보신각 타종 행사에서 “박근혜 퇴진, 반대 민영화”를 구호로 게릴라 데모를 계획했다. 경찰 추산 10만여 명이 모인 행사장 중앙에서 당기를 올려들 생각이었다.

“빨갱인가봐.” “광주 사람들인가봐.” 타종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이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무지했다. 경찰이 몰려들어 당 깃발을 빼앗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지자 여기저기서 “왜 여기서 시위를 하냐”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웃으며 시작했던 데모는 대중의 신경질적인 반응 속에서 쓰게 마무리됐다. 깃발은 빼앗기고, 경찰에 붙들려 옷은 엉망으로 찢긴 채. 데모는 엄단해야 한다는 법질서, 데모꾼에겐 엄벌이 당연하다고 믿는 시민의식 가운데서 ‘데모의 생활화’를 꿈꾸는 이들의 바람은 자주 찢겨나갈 것이다. 결국 더 큰 데모의 자유는, 더 많은 사람들의, 더 잦은 데모 속에서만 가능한 법이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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