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영(33·가명)씨는 23살 때부터 식품 유통 쪽에서 일했다. 새벽 4시부터 일하는 고단한 생활이지만 한 푼이라도 모아 대리점 주인이 되리라는 꿈을 키웠다. 2011년 9월 보증금 500만원을 내고 남양유업과 대리점 계약을 맺었다. 마진이 좋다는 소문에 뛰어들었지만 첫 달부터 적자였다. 박씨가 주문·관리 프로그램인 ‘팜스21’에 다음날 필요한 주문량을 등록하면 몇 시간 뒤 거짓말처럼 물량이 바뀌어 있었다. 바로 ‘물량 밀어내기’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나홀로 소송’공정거래위원회의 실태조사를 보면, 남양유업은 2007년부터 유통기한 만료가 임박한 제품이나 비인기 품목 등을 대리점에 강제 할당하거나 임의 공급하는 방식으로 밀어내기를 해왔다. 떠안은 물량을 대리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떨이 판매하거나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박씨도 그랬다. 영업적자는 달마다 수백만원씩 쌓였다. 1년도 안 돼 빚이 6천만원을 웃돌자 2012년 7월 대리점을 그만뒀다. 하지만 남양유업은 현금보증금 500만원과 선납한 물품대금 300만원도 돌려주지 않았다. 박씨가 항의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너무 억울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2013년 1월 박씨는 ‘나홀로 소송’을 제기한다. 마지막 달에 648만원을 주문했지만 남양유업이 1285만원이나 많은 1933만원어치의 제품을 밀어내 손해를 입었다는 주장도 했다. 지난 10개월 내내 반복된 일이지만 우선 1개월분만 청구했다.
때마침 남양유업의 횡포가 사회문제로 폭발했다. 5월5일 인터넷에 올라온 욕설 음성파일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 파일에서 30대인 남양유업 영업사원이 아버지뻘인 50대 대리점주에게 막말을 퍼붓는다. “망해, 망해. 그러면 망하라구요. 이 OOO야!”(영업사원)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김웅 남양유업 대표이사가 기자회견을 자청해 “죄송하다”며 대국민 사과문을 낭독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남양유업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정확한 주문량과 공급 내역이 들어 있는 팜스21의 기록을 제출하라고 법원이 명령했지만 남양유업은 이 프로그램을 최근 폐기했다며 거부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단독 오규희 판사는 10월2일 “회사가 100%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손해액 산정을 위한 기초자료가 회사에 편중돼 있으므로, 남양유업은 형식적 입증책임만 내세울 게 아니라 증거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법원의 조처에 성실하게 답할 의무가 있다. 남양유업이 자료 제출을 하지 않으므로 박씨가 주장하는 손해액이 입증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차태강 변호사는 “의료사고로 피해를 입은 환자처럼 대리점주를 상대적 약자로 보고 입증책임을 완화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남양유업은 변호인 5명을 선임해 항소했다. “대리점주 100% 승소라는 판례가 남는 게 두려운 것”이라고 박씨가 말했다.
대국민 사과 하고도 법정에선 돌변박씨는 아내와 3살짜리 아들과 함께 살던 아파트(24평)를 팔아 우선 ‘빚잔치’를 했다. 없는 살림에 항소심을 맡을 변호인(차태강 변호사)도 선임했다. 밀어내기로 손해 본 금액도 1개월분에서 10개월분으로 늘려 손해배상을 확대 청구할 계획이다. 박씨가 말한다. “남양유업은 지금껏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여론이 잠잠해지자 ‘갑의 횡포’를 다시 휘두른다. 그대로 놔두면 안 되니까 싸움을 멈출 수 없다.”
심사위원 20자평▶김성진 남양유업 자료 제출 거부는 곧 도둑질을 자인한 것.
유성규 을(乙)이 주인 되는 세상을 향한 발돋움.
최재홍 밀어낼 때 좋았니? 국민들로부터 밀리니 어떠니?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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